‘마음껏 걸을 권리’ 되찾으려면

희망제작소는 2012년 한 해 동안 월간 도시문제(행정공제회 발행)와 함께 도시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다양한 정책 아이디어로 제시해보려고 합니다. 희망제작소 각 부서 연구원들이 매월 자신의 담당 분야와 관련된 다양한 아이디어를 풀어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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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 당선 한 달 만인 지난해 11월 26일부터 종로구 인사동길과 감고당길(풍문여고~아트선재센터)의 차량 통행이 크게 제한되었다. 주중 평일에도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는 사람들만 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 중심의 걷고 싶은 거리 만들기에 초점을 뒀다”는 게 종로구 관계자의 설명이다. ‘안전하게 보행할 거리를 가질 권리’에 한 발 더 다가선 행정조처로 보인다.

[##_1C|1401339500.jpg|width=”400″ height=”269″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인사동 거리_##]
17년 전 서울시 출입기자 시절, 기획기사로 보행권 확보 캠페인을 벌인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세종로와 태평로엔 횡단보도가 아예 없어서, 예컨대 노약자나 장애인들이 덕수궁에서 바로 건너 서울시청을 방문하려 해도 지하보도를 이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지하철2호선이 지나가는 강남 테헤란로도 마찬가지여서 횡단보도로 길을 건너려면 복잡한 인도로 평균 1.5㎞ 이상 걸어가야 했다. 횡단보도들도 대부분 20㎝ 안팎의 턱이 그대로 설치되어 있어서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에겐 너무 불편하고 위험했다. 특집기사가 제법 반향을 일으키고 녹색교통운동 등 시민단체의 노력도 유효해서 서울시는 이듬해인 1997년 보행환경기본조례를 제정했다. 이어 부산광역시 등 다른 광역자치단체들도 같은 내용의 조례를 제정했다. 하지만 횡단보도의 턱이 경사면으로 바뀌고 대로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가 활성화하기까지는 10년 남짓 시간이 더 걸렸다.

[##_Gallery|1204494149.jpg|광화문 세종로 횡단보도|1367767993.jpg|기울기를 줘 도로와 인도의 단차(段差)를 없엔 횡단보도 |width=”400″ height=”300″_##]

시민사회의 보행권 캠페인은 2006년 봄 희망제작소가 출범하고 ‘시민들의 작은 아이디어를 모아 관련 법제 개정으로 이어가는’ 이른바 사회창안운동이 시작되면서 다시 활기를 띄었다. 희망제작소가 2007년 녹색교통, 한겨레신문 등과 함께 진행한 이 캠페인은 국회 차원의 보행기본법 제정 운동으로 이어져 17대 국회에선 신명 의원, 18대 국회에선 2009년 7월 이미경 의원이 주도해 ‘보행권 확보 및 보행편의 증진을 위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행정안전부도 지난해 국토해양부와 공동으로 ‘보행안전 및 편의 증진에 관한 법률’(안)을 입법예고 했다. 국회에서 법이 제정되어야 국가 차원의 실질적인 정책 변화가 가능해질 텐데, 아직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 18대 국회가 끝나면서 관련 법안이 모두 자동 폐기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보행권은 인간이면 누구나 안전하고 편안하게 길을 걸어 이동할 수 있다는 기본 권리이다. 보행권에 더해 ‘안전하고 쾌적한 거리를 가질 권리’로 그 개념과 캠페인 내용이 확장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도시화가 진전하고 자동차가 폭증하면서 자동차 우선의 도로교통 체계에 내주었던 인간 중심의 보행기본권을 되찾기 위한 실천적인 개념이다.
 
기본권으로서 보행권 확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보도를 충분히 만들어야 한다. 희망제작소가 2007년 캠페인에서 누누이 강조한 대로, 차도만 있는 전국의 많은 국도와 지방도에 시급히 보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일반국도 1만 4천여㎞ 가운데 보도가 설치된 구간은 4.5%인 530여㎞에 불과하다. 국도보다 대체로 노폭이 좁은 지방도는 사정이 더 열악하다. 서울은 좀 나은 편이지만, 이면도로 포함 총연장 7400㎞ 가운데 34%에만 보도가 설치되어 있다. 한 마디로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보니 OECD 국가 중 교통사고 사망률 1위, 교통사고 사망자 중 절반이 보행자라는 부끄러운 기록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다. 도로를 내면서 차도만 내면 된다는 잘못된 의식과 행정 관행을 지금 당장 바꾸어야 하는 이유이다. 물론 모든 국도와 지방도에 보도를 내려면 엄청난 예산이 필요하다. 도시의 주거지역이나 이미 시가화가 진행된 도심의 상가지역에 넉넉한 보도를 새로 설치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영국 런던시내 도로들처럼 차로 수와 노폭을 줄이고 일방통행 중심으로 도로 운영체계를 재정비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불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다. 행정부의 의지와 성숙한 시민의식이 결합하면 충분히 가능하고, 반드시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는 과제다.
 
다음으로 ‘차 없는 거리’, ‘차 느린 거리’를 대폭 늘려나가야 한다. 인사동길처럼 도심의 상가지역이나 주거지역의 이면도로를 점차 보행자전용 또는 보행자우선(시속 30㎞ 이하 생활도로구역 포함) 도로로 지정해 운영하자는 것이다. 불법주차한 차들을 피하고 빠르게 달려오는 차를 피하느라 늘 긴장하며 총총히 걸어야 하는 위험한 도로를 줄여가는 방안이다. 그러려면 개인승용차 도심 진입을 억제하기 위한 혼잡통행료 징수 지점을 늘리고, 버스전용중앙차로제와 주거지역 공영주차장을 확대하는 등 대중교통 정책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그래야 도심 상가 주위의 경관도 여유롭게 둘러보며 걸을 수 있고, 주택가 주변 길가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지 않겠는가.

[##_Gallery|1003550189.jpg|보도에 인접해있는 소공원|1154317122.jpg|종로 주변 버스 중앙차로|width=”400″ height=”300″_##]
 
기존 보도의 보행편의 증진과 관련해선 각종 장애물 정비와 경사로 수평화 작업이 가장 시급하다. 특히 경사가 심한 보도는 대부분 도로변 건물의 잘못된 설계와 시공 탓인데, 비가 내리거나 요즘처럼 날씨가 추워 얼어붙으면 보행자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또 희망제작소가 2007년 캠페인에서 횡단보도 주변 ‘단주’(차량 진입을 막는 말뚝)를 탄력성 있는 재질로 교체할 것을 주장했던 것처럼, 보도 위에 원칙없이 설치된 각종 공공시설물(육교와 지하도 출입구, 전신주, 환기구, 전화부스, 가로수 등)과 무질서한 불법적치물(노점상, 입간판, 불법 주·정차차량 등)도 보행자, 특히 노인과 시각장애인 등 보행약자들의 안전을 크게 위협하는 복병들이다.

이 가운데 공공시설물 정비는 당연히 중앙 및 지방정부의 몫이겠지만, 불법적치물 정비는 시민들도 적극 나서서 논의하고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행정안전부가 입법예고한 법률안은 입간판 등이 보행자에게 부상을 입혀도 처벌을 받게 하는 등 관련 규정을 강화했지만, 행정당국의 단속과 형사처벌 이전에 시민들과 시민사회단체 스스로 마을만들기 수준의 자발적이고 체계적인 논의를 통해 해법을 찾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_1C|1124194719.jpg|width=”400″ height=”269″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횡단보도 진입로에 설치된 볼라드_##]
모름지기 모든 일은 사람이 한다. 사람들이 먼저 생각을 바꿔야 일도 달라진다는 뜻이다. 보행권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1968년) 덕수궁지하보도의 건설로 서울시청에서 덕수궁 방향으로 태평로를 횡단할 때 지하로 횡단함에 따라 보행자의 안전이 보장되고 태평로 운행차량의 신호대기가 불필요해졌는데, 다시 횡단보도가 생겨났다.
-서울지명사전, 2009,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통행차량의 신호대기를 먼저 걱정하고 지하보도가 보행자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식의 이런 낡은 생각부터 통째로 바꾸지 않는 한 보행권 확립은 요원할 터이다.
서울시내 4대문 안에선 늘 걸어다닌다는 선배가 있다. 걷는 즐거움에 ‘하루 1만보를 걸으면 만병통치’라는 믿음 때문이다. 칠순의 선배처럼 우리 사회의 많은 어르신과 장애인들이 쾌적한 거리를 마음 놓고 활보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글_윤석인 (희망제작소 소장, yunsin@makehope.org)

*본 글을 월간 도시문제 2012년 1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