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야장천 동네 모임 열리는 이상한 곳

탁무권 더숲 대표

서울 노원구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더숲은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아쉽게도 몽덕 대장은 출입금지입니다.) 지하 1, 2층 300평 규모인 이 공간엔 40여 석짜리 예술영화관 두 곳과 공짜로 구경할 수 있는 갤러리가 있습니다. 빵, 와인 등을 파는데(빵을 먹고 싶은 몽덕 대장의 분노가 느껴지나요?) 책이 중심인 서점입니다. 갖가지 모임을 할 수 있는 세미나실도 있습니다. 죽치고 앉아 있어도 누구도 눈치 주지 않습니다.

이곳 영화관은 이상해요. 한국독립영화 <벗어날 탈脫> 관객과의 대화를 지난 2일부터 격주로 여섯 차례 엽니다. 첫날엔 주연배우 임호준 씨의 친구인 배우 강일우 씨가 사회를 봤어요. 이후 촬영·조명감독 편, 배우들의 애장품 편 등 주제를 잡아 관객을 계속 만납니다. 잘 알려진 영화도 아니고 이 공간 바로 건너에 대형 극장 체인이 있는데 누가 올까요? 신기하게 이 관객과의 대화는 40석 꽉 찼습니다. 지난해 더숲 영화관에서 관객과의 대화(GV)가 67차례 열렸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인 셈이죠. 이호준 프로그래머(라고 쓰고 ‘눈물’의 지브이 진행자라고도 읽습니다)에게 힘들겠다고 했더니 그저 웃었습니다.(혹은 울었을까?)

“서울 북쪽에 예술전용관이 없다 보니 의정부, 구리, 남양주에서도 오세요. 서울 광화문까지 나가지 않아도 좋은 영화 볼 수 있어 고맙다면서요.” 이호준 프로그래머가 고생하는 까닭은 탁무권 더숲 대표(67)의 딱 하나 주문 탓입니다. “영화를 보고 뒷담화를 많이 하게 하라” 영화뿐이 아닙니다. 인문학 강좌, 북토크, 와인 모임 등이 주야장천 이어져요. 더숲은 ‘뒷담화’ 장려 공간입니다.

▲ 탁무권 더 숲 대표

30년 서점 운영한 사업가…“공간‧문화가 사람을 바꾼다”

지난 1월 13일, 지난 2월 21일과 14일 세 차례 만난 탁무권 대표는 60살에 “망할 줄 알고” 더숲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유일한 형태의 복합문화공간인 더숲에서 사업과 사회적 가치가 만나듯 그의 삶에서도 그렇습니다.(그는 “미화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건 사실이에요.) 30년 동안 여러 서점을 운영한 사업가인데 한국에서 부자들이 돈 벌기 가장 쉬운 방법으로 택하는 부동산은 하나도 없습니다.

“젊을 때 부동산은 사회적 범죄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나이를 못 먹었어요. 저는 부동산이랑 안 맞는 운명이에요. 미화하지 말아요.” 임대공간에 자기 돈 거액을 들여 더숲을 꾸리니 사람들이 “미쳤다”고들 했답니다.

“한국에선 인생의 제일 중요한 이벤트인 결혼식, 장례식에 가봐도 다 돈 세리모니예요. 축제다운 축제가 없어요. 한국 사회는 다 원자화됐어요. 그런데 살아있는 건 원자가 아니에요. 생명체가 되려면 분자가 돼야 해요. 공동체가 허물어지면 행복할 수 없어요. 말만 하면 뒷방 노인네 같잖아요. 구체적인 걸 하나라도 만들어야죠. 우리 동네에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 편하게 나눌 아늑한 공간을 찾기 어려웠어요. 이런 공간이 많아야 (이웃간 교류가 없는) 아파트 문화를 깰 수 있어요. 공간과 문화가 사람을 바꿀 거라고 저는 믿어요.”

이어 번호 매긴 집과 주차장만 연결하고 이웃끼리 인사 한번 나누기도 어색한 아파트에 대한 성토와 자기가 살고 있는 연립주택에 대한 상찬이 이어졌어요.(몽덕대장도 아파트를 싫어합니다.) “윗집에서 음식을 나눠준다니까요.”

‘연결’의 철학이 깃든 ‘더숲’, 사람들로 북적이다

세 차례 갈 때마다 더숲은 거의 꽉 차 있었어요. 젊은이들, 중년 남녀, 노인들까지 한 번 앉으면 잘 안 일어납니다. 그만큼 회전율이 낮습니다. 그만큼 매출은 떨어지죠. ‘연결’의 철학은 테이블 디자인에까지 스며있습니다.

“저는 회전율 낮다는 얘기 싫어해요. 의자와 테이블을 더 놓자는 데도 반대했어요. 의자로 빽빽하면 답답하잖아요. 1인용 사각 테이블 제일 싫어해요. 옛날엔 없었던 거예요. 다 사회의 반영이죠. 원칙이 없으면 그런 테이블을 들여놓게 돼요.”

여기 갤러리는 그림을 사고팔기보다는 감상하는 미술관입니다.

“노원, 도봉, 중랑에 갤러리가 없어요. 우리 아이들은 경쟁 탓에 문화적 감수성을 키울 기회가 별로 없잖아요. 동네에서 ‘쓰레빠’ 신고 부모님이랑 할머니랑 오가며 감상하면 감수성이 길러질 거예요. 예술은 다양성이거든요. 아, 그리고 전 문화적 소양 많지 않아요. 미화하지 말아요.”

그는 회의 시간에 직원들에게 매출을 묻는 대신 이런 철학을 공유한다고 했습니다.(이호준 프로그래머님은 좀 괴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치는 까닭은?) “그렇지 않으면 책임자는 이윤을 택할 수밖에 없거든요. 예를 들어 이 공간에 의자를 더 넣는 거죠.” 탁무권 대표의 예상대로 2016년 12월에 문을 연 더숲은 5년 동안 적자를 봤습니다. 코로나 때는 적자 폭이 더 컸어요. 탁 대표는 되레 투자를 늘렸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고맙다면서 걱정해 주는 거예요. 제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의 예상과 달리 2년 전부터 이 수지타산 안 맞아 보이는 사업은 적자 늪을 벗어났습니다.

서점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보다

1994년, 노원구 상계동에 막 신도시가 들어설 즈음 그는 동네 첫 책방인 노원문고를 열었습니다. 대학시절엔 민주화운동을 했어요.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에서 활동했답니다. 출판사에서 3년 일하다 책방을 냈습니다.

“서점은 순전히 돈 벌려고 했어요. 그때는 돈벌이와 사회적 기여를 이원화했거든요. 책을 판 만큼, 그것도 몇 달 뒤에 출판사에 돈을 지불하는 ‘위탁판매’라 큰 자본이 없어도 됐어요. 당시에 한국에 대형서점은 교보, 종로 정도밖에 없었어요. 지역도서관이 생긴 게 2005년이죠. 그만큼 독서환경이 척박했어요. 나오는 책이 이렇게 많은데 서점이 작아서 되겠나 했죠.”

넓고, 싸고, 위치 좋은 곳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중심가에서 벗어난 곳에 150평 규모로 문을 열었어요. 어떻게 서점까지 발길을 이끌까? 그는 당시 교과서 지정 판매 서점인 교보문고에서 현금으로 제값을 치르고 교과서를 사 날랐습니다.

“사람들이 교과서 사러 왔다 다른 책도 보는 거죠. 당시엔 교보에서도 책만 팔았는데 노원문고엔 문구도 들였어요. 새 학기에 책 사면서 학용품도 보잖아요.” 현재 ㈜노원문고는 6곳, 문구점 2곳으로 확장했습니다.

“자기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고 재투자하면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져요. 그런데 한국에선 돈이 모이면 다들 부동산을 해요. 저는 부동산이 없잖아요. 노원문고에선 디자이너를 두 명씩 썼어요.” 그는 노원문고를 열고 1년 뒤부터 매달 기부했는데 아이들과 함께 서점에 온 부부들을 보며 이런 ‘이원화’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저는 서점으로 돈 벌 생각뿐이었는데 지역 사람들이 서점을 좋아하는 거예요. ‘내가 있는 곳이 풀뿌리 민주주의가 자라는 곳’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결’은 더숲 이전 일 복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사회혁신공간데어 이사장,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 등 일 많은 직함이 여럿이었어요. 노원구청과 지역 주민이 함께 만든 노원교육복지재단 이사장으로도 6년 일했습니다. 지역 취약계층에 장학금, 생계비, 주거비, 의료비 등을 지원하는 단체였습니다.

“사회복지는 기본적인 거예요. 그걸로는 부족해요. 행복감을 주려면 문화복지가 중요하더라고요. 중산층이 구심점이 돼야 해요. 중산층 모임이 형성되고 이들이 지역에 관심을 가질 때 공동체가 시작됩니다. 지금은 사는 곳이 그냥 잠자는 곳이잖아요.”

노원교육복지재단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구립도서관 ‘휴먼라이브러리’를 만든 이유입니다. ‘휴먼라이브러리’는 사람이 책인 도서관이에요. 책이 되고 싶은 사람이 도서관에 자신을 등록하고 그 ‘책’을 ‘대출’한 사람과 대화를 나눕니다. 멘토 대여 시스템인 셈이죠. “처음에 600여 명이 ‘책’으로 자신을 등록했어요. 그런데 사실 ‘인간책’은 매개체였어요. 이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커뮤니티가 형성돼 지역에 관심이 커지길 바랐는데, 거기까지 나아가진 못해 실망스러웠습니다.”

건설 재벌의 별장을 열어 모두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지역의 문화 거점인 서점들을 살리려는 ‘연결’도 이어졌습니다. 쉽지 않았어요. 그가 책방을 시작했을 때는 어디서든 책값이 같은 도서정가제가 굳건했던 시절입니다. 2000년 들어 대형마트, 온라인서점 등이 들어오며 할인 경쟁이 이어졌습니다. 10년 동안 서점 5683개(1994년) 중 1500여 곳이 사라졌습니다.(<동네책방 생존 탐구> 한미화 지음) 지역 서점을 묶는 협동조합을 만들었지만 ‘협력’엔 한계가 있었어요. 대형 서점 중심으로 재편하는 양극화에 맞서려고 22개 서점을 연결해 회생절차에 들어간 도매상을 살리려 했던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연결’의 씨앗 중에 하나였던 더숲은 자랐습니다. 자생력을 확보했어요. 게다가 여러 지자체에서 더숲과 비슷한 공간을 만들어달라고 손을 내밉니다. 경기도 시흥 소전미술관에서 3월 말 세 번째 더숲이 열려요. “백자 청자 도자기들이 유리벽 뒤에 전시돼 있다 보니 관객이 많지 않았어요. 건설 재벌의 별장을 열어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꿨습니다. 공간의 힘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4월 소전미술관 더숲에서 소설 <로기완>을 쓴 조해진 작가, 이소연 시인, 은유 작가 북토크가 이어집니다.

그가 어린 시절엔 글이 귀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받아본 신문을 그는 기억합니다.“잊히지 않아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신문 냄새부터 맡았어요. 아침이 정말 좋았어요.” 이제 글은 사방에 널렸고 사방에서 잊히고 있죠. (그마저도 “‘쇼츠’에 중독돼 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대세는 인터넷으로 넘어갔어요. 서점 수요는 줄 수밖에 없어요. 더숲이 서점의 미래, 진화라고 생각해요. 책은 거의 모든 것의 근원이에요. 영화, 그림, 게임 모든 상상력의 체계적 근원이 책이에요. 한국 사회는 가치관이 붕괴했어요. 너무 거대하게 붕괴하면 의식을 못 해요. 그런데 그 말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회복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제 일이 사람들 사이 관계 회복에 도움이 된다면, 스스로 보람을 느낀다면, 난 정말 여한이 없어요.”

– 글: 김소민 시민연결부문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