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책 ‘고삐 풀린 망아지, 옥천에서 일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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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여는 사람들 ? 3
풀뿌리 언론의 희망 오한흥
고삐 풀린 망아지, 옥천에서 일내다

기획?희망제작소|글?정지환|
발행일 2008년 10월 6일|신국판(153×210)|230쪽
값 9,500원|ISBN 978-89-7414-223-0 (03040)

상식과 직관에 따라 행동하는 오한흥.
그는 행복하지 않은 일은 하지 말라고 권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으므로…

지역, 희망 그리고 묵직한 감동이 빚어낸 사람들의 이야기, 그 세 번째

많은 사람들이 이제 고전적인 의미의 지역 공동체는 사라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역 곳곳에서 새로운 대안을 만드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자신의 삶을 던져서 지역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들 부와 명예를 좇아 대도시로 몰려들고 있을 때, 그들은 도시를 떠나 지역에 자리 잡고 미래를 향한 큰판을 벌이면서 끊임없는 노력과 거침없는 도전으로 우리 사회의 굳건한 뿌리를 키우는 아름다운 에너지가 되고 있다.

우리 시대의 희망을 찾으러 나서는 지역 인물 탐구 시리즈 ‘희망을 여는 사람들’은 토종벌 총각 김대립, 김제 남포리의 상록수 오윤택에 이어 충북 옥천에서 <옥천신문>을 창간하여 풀뿌리 언론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오한흥을 세 번째 인물로 선택했다. 오한흥,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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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로 충북 옥천군 옥천읍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서른 살이 되던 해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자 운명적으로 옥천 지국장을 맡았다. 길고 깊은 방황의 시절을 보내던 그는 당시 40여 명에 불과한 옥천의 <한겨레신문> 독자들과 만나면서 ‘사회적 개안’을 하게 되었다. 그 후 풀뿌리 언론의 성공 모델인 <옥천신문>을 창간하고 키웠으며,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 옥천에서 <조선일보> 절독운동을 성공시켰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입법전문 정치주간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했으며, 이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안터마을을 보다 건강한 생태마을로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옥천을 언론개혁의 성지로 이끌다

1998년 <조선일보>에서 최장집 교수의 사상 검증을 대대적으로 벌이기 전까지만 해도 오한흥은 <조선일보>를 ‘민족지’로 알았다. 그러나 바로 그때 10년 가까이 구독하고 있던 월간 <말>에 실린 기사로 비로소 <조선일보>에 대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되었다.

오한흥은 <조선일보>의 전매특허인 ‘마녀 사냥’을 보면서‘반민족 범죄 행각을 은폐하기’ 위해 민족지로 행세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임을 간파했다. 지역신문을 발간하면서 상식과 원칙과 소통에 대해 깊이 고민해 왔던 그는 전정표 씨를 비롯해 김봉겸 ? 조만희 옥천중 교사, 김성장 옥천상고 교사 등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언론개혁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일보>가 자행한 반민족 친일 행각을 주민들에게 알려 ‘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옥천으로 가꾼다’는 취지로 ‘조선일보 바로보기 옥천시민모임(약칭은 ‘조선바보’다)’을 꾸렸다. 그 후 3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2000년 8월 15일 정지용 시비 앞에서 출범식을 가졌으며 이 자리에서 <조선일보로부터의 옥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들 회원들은 ‘독립군’이라는 별칭으로 불렸으며, <조선일보> 추방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여 옥천군 군의원 전원(9명)을 비롯해,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지역 명사나 옥천경찰서 등의 단체가 독립군에 가입하는 눈부신 결과를 이끌어냈다. ‘물총닷컴’이라는 온라인 사이트를 개설하여 당시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주었으며 <옥천신문> 의견 광고를 통한 오프라인과의 환상적인 연계로 <조선일보> 절독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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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옥천은 바야흐로 ‘언론개혁의 고장’과 ‘안티조선의 성지’로 급부상했으며, 이러한 역량을 바탕으로 2003년 8월에 국내 최초의 언론 축제인‘언론문화제’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참언론이 가득한 세상을 꿈꾸자’라는 주제로, 여섯 번째를 맞이한 올해‘언론문화제’는 다양한 볼거리와 놀거리가 함께 명실상부한 ‘언론개혁 축제’로 자리잡았다.

다시 풀뿌리로 돌아와 소통의 공간을 꿈꾸다

오한흥은 이제 활동 영역을 ‘옥천’에서‘전국’으로, ‘옥천신문’에서 ‘지역언론 네트워크’로 확장하여 2004년 6월 1일, 국내 최초의 ‘입법전문 정치주간지’<여의도통신> 창간을 이끌었다. ‘풀뿌리 언론의 국회 특파원’을 표방한 <여의도통신>은 한마디로 국회의원들의 ‘과속’을 방지하는‘감시 카메라’라고 할 수 있다. 초기에는 지역언론이 회원사로 참여할 경우 그 지역 출신의 국회의원에 대한 모니터를 수행하여 많은 정보를 지역언론에 제공했지만 2007년 3월부터는 의원 전체 모니터로 취재 방식을 바꾸었다.

2005년 후반기부터 오한흥은 옥천에서 ‘담론문화 만들기’에 나서서 토론 문화를 활성화시키는 작업을 벌였다. 2006년 지방선거가 다가오자 오한흥은 뜻있는 사람들과 의기투합하여 엉뚱하지만 유쾌한 정치 실험을 벌였다.

새로운 정치 풍토, 깨끗하고 즐거운 선거 문화, 진정한 지방자치의 틀을 짜겠다는 포부로 기존의 거대정당들과 겨뤄보자는 발상에서 군 단위의 풀뿌리 옥천당을 만들었다. 사실 풀뿌리 옥천당은 정당법에 근거한 당이 아니라 현 정당정치의 오류와 모순을 고발하는 반어적인 표현이며, ‘생활정치를 추구하는 순수한 정치개혁 시민모임’이었다.

하지만 선거관리위원회에서 풀뿌리 옥천당을 정당법과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했고, 풀뿌리 옥천당은 재판에서 지고 말았다. 오한흥은 이 한바탕의 에피소드를 지배 세력의 위선과 기만의 가면을 벗겨 버린 굿판으로 믿고 있다.

이제 오한흥은 그가 살고 있는 안터마을을 마을공동체로 꾸리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꽃두레마을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그는‘대청호 생태계를 보전하는 평화로운 전원마을’이라는 비전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바쁜 걸음으로 안터마을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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