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일’로 해보자”


우리 시대 ‘여럿이 함께하는 경제’를 일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또 어떤 고민, 어떤 혜안을 갖고 있을까. 입사 6개월 차 20대 사단법인 씨즈 매니저 김해인과 입사 6년 차 30대 희망제작소 사회적경제센터 선임연구원 이재흥, 두 주니어가 앞서 길을 걷고 있는 시니어들을 찾아 묻고 답하며 세대공감 토크를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첫 손님은 <(주)한국컴퓨터재생센터>와 <(사)비영리IT지원센터>를 이끌고 계신 한국 대표 사회적기업가 구자덕(47) 대표입니다.


이재흥 (이하 ‘재흥’) :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렇게 인터뷰를 할 목적(?)으로 마주하니 느낌이 새롭네요. 만나면 매번 일과 관련된 이야기만 했던 것 같아요. 일과 가족이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가족 이야기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구자덕 (이하 ‘자덕) : 중3, 고2 딸 둘을 두고 있어요. 큰딸은 올해 12월에 대안학교를 졸업하게 되는데, 진로에 대한 불안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늘 ‘걱정마 잘 할 수 있을 거야. 넌 정말 잘 컸어’ 라고 토닥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음 주에도 경기도 탈학교 학생  대상 토론회에 대표로도 나가고 리더십도 뛰어나거든요. 작은딸에게는 요즘 무조건 잘 보이려고 노력 중입니다. 뽀뽀만 해준다고 하면, 뭐든 요구하는 것은 다 들어 줍니다.

3주 전에도 큰딸이 사소한 걸로 엄마와 크게 다투었어요. 이유를 들어보니, 요약하면 엄마는 동생만 챙겨준다는 거더라고요.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큰딸이 지난해 학교에서 학생회장도 했는데, 아무래도 졸업이 성큼 다가오니까 불안감 등이 증폭되어 예민했던 것 같아요. 대안학교를 나와서 대학을 진학하는 것에서부터 사소한 것 하나까지 고민이 많더라고요.

사실 저는 지금 나이에 아이가 대학을 가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아직 계속해서  꿈이 바뀌고 있거든요. 유기견을 돕는 활동가가 되고 싶어했다가, 다음 주에는 사회복지사가 되려 하고. 또 ‘기존 입시중심 학교시스템’에 부정적이기도 하고요. 딸아이가 다니는 대안학교에서는 영어, 수학 두 과목을 합쳐 일주일에 두 시간을 공부합니다. 물론 검정고시는 패스했지만요. 저는 아이가 인문학 소양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수학공부보다 방학 때 친구들과 부대끼며 연극 공연을 만드는 것이 더 창의로운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해요.


[##_1C|1355321820.jpg|width=”400″ height=”299″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한국 컴퓨터재생센터 구자덕 대표_##]
이해인(이하 ‘해인’) : 그래도 청소년기이니, 어느 정도 이끌어 주는 장치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자덕 : 부모의 삶이, 부모가 그런 역할을 해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요. 다행히 딸아이가 아직 아빠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 다행이고 참 감사하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여전히 나도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다만, ‘나’ 뿐만 아니라 내가 함께 관계 맺고 내가 바라보고 있는 주위 사람들을 딸아이가 많이 보고 배울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내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적 상황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우리 조직뿐만 아니라 이런 전체적 상황을 바라보면서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어린시절 부산에서 평범하게 자랐는데,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세상을 만나고 조금씩 세상에 눈뜨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처음으로 다녔던 교회에서 참 많이 실망했어요.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정말 아니다 싶더라고요. 목사님께서 신도들 헌금으로 돈을 벌게 되니까 개인 땅을 사고, 좋은 차를 사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두 번째 교회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참 많은  것을 배우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성장했던 것 같아요. 장애아동들이 생활하는 고아원에서 운영하는 교회였는데, 전도사님도 당시 민중신학을 하는 열정적인 분이셨어요. 두터운 우정을 나눴던 교회 선배, 후배들 3명이 있었는데 모두 부산 지역에서 내로라 하는 사회활동가로 성장했습니다. 한동안 무척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을 잘 보냈습니다.

그러다 또 한번 현실의 벽에 부딪치는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고3때 7월에 친한 교회 후배  한 명이 뇌출혈로 죽게 된 거예요. 원인을 알아보니, 그 전날 체육시간 이후 지각했다는 이유로 학교 선생님이 얼차려, 이른바 원산폭격을 시켰더라고요. 당장 학교에 진상규명과 책임 있는 사과, 무한 책임을 요구했는데, 당시 주위의 많은 선배들이 침묵하거나 앞장서 나서지 않는 거예요. 그 가운데는 교회 선배들도 있어서 실망했죠. 당시 학교에서 제가 반장이었는데, 시위를 준비하다 들켜서 불려가 혼나고 결국에는 반장직을 내놓게 됐습니다. 그 일이 지나고부터는 정말 학교에 가기 싫었습니다. 충격이 컸죠. 그래서 방황을 조금하다가 고3이니 ‘열심히 공부해서 부산을 벗어나자.’ 라는 생각이 커져 매진한 끝에 운 좋게 대학입학을 하고 서울로 떠나왔습니다. 그렇게 1987년 대학생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입학과 동시에 학생운동에 참여해, 열정적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재흥 : 1987년 민주화 항쟁 때 입학하셨으니 정말 뜨거운 1학년을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시대를 참 절묘하게 만나셨네요.

자덕 : 당시에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다 학생운동을 했어요. 다만, 고등학교 때 그런 경험들이 있었기에 남들과 조금 다르게, 혹은 조금 더 열정적으로 발현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전공은 철학을 했는데, ‘가장 졸업하기 편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어서 주저 없이 선택했어요. 사실은 입학 전 고등학교 대학 철학과 선배들을 찾아가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이분들이라면 4년을 함께 보내도 괜찮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해인 : 전공이 이과 공대일 줄 알았는데, 철학이셨다니 조금 의외네요.

자덕 : 컴퓨터나 IT는 논리, 철학이 발달되어 있고, 다른 분야와 연결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철학과 친구들 중에도 이쪽 계통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987년 당시에는  개인용 컴퓨터 이런 것이 없었기도 하고요. ICT라는 것이 결국 현실에 있는 것을 분석하고 기호화하는 능력, 소통하는 능력이 핵심이거든요.
  
저 역시 컴퓨터 본체 뚜껑을 처음 열어본 것이 1999년, 대학졸업 후 이렌컴이라는 대여회사에 들어가서였습니다. 그때 처음 컴퓨터에 윈도우도 설치해봤고요. 이후 회사에서 ERP(전사적자원관리프로그램)도 두 번이나 개발하게 되면서 조금씩 컴퓨터를 배우고 이해하게 되었죠. 원래는 텐트, 유아용품 등 다양한 상품들을 대여했는데 매출추이를 살펴보니 신기하게 컴퓨터만 잘 나가더라구요. 전통적으로 한국문화에서는 상품을 빌려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소비자들의 거부감이 큰데 말이죠. 분명히 IMF 이후 우리 사회 문화에 큰 변화가 오기 시작하더라구요. 변화 움직임이 분명히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본금 천만 원, 다마스 한 대 가지고 두 사람이 회사 내 ‘컴퓨터 대여 사업부’ 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지난해 2012년 기준으로 매출 140억 회사가 되었어요. 물론 회사를 키우는 과정 속에서 내가 일을 다 했다면 거짓말이죠. 주로 제가 일을 벌리고 가져오면 한 분이 선비처럼 일을 맡아 처리하는 역할분담 협업을 통해 사업을 안정적으로 늘려갔어요. 나중에는 일감이 점점 늘어나자 주변에 믿을만한 사람들, 동서, 동생, 친구 등 모든 네트워크를 다 동원해 회사일을 맡기고 함께 키워서 성장시켜 냈습니다. 창투사로부터 투자도 받았고, 벤처기업으로도 지정을 받았구요. G20, APEC 과 같은 굵직한 국제행사들을 유치하면서, 얼굴인식 입장프로그램 등 소프웨어까지 PM을 맡아 개발도 해내면서 인지도와 역량이 크게 향상됐답니다.

이렌컴에서 근무하던 시절 제 온라인 아이디가 바로 ‘소유의 종말’ 이었어요. 가훈도 소유의 종말. 우리 딸들은 지금도 인정하지 않지만 말이죠. 그 일을 하면서 제가 사업에 부여하려고 하는 가치는 이런 것이었어요. 사람들은 모두 소유하려고 하는 성향, 욕구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과소비가 생기고, 결국 그렇기 때문에 IMF 구제금융위기가 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죠.

반면에 물건을 빌려 쓴다는 의미의 렌털은 ‘사용가치’가 있는, 그것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어찌 보면 요즘 유행하는 공유경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제가 물건 욕심이 별로 없기도 하고, 내가 모든 것을 욕심내고 소유할 필요가 무엇이 있나 하는 생각이 늘 있거든요. 그래서 4명의 가족이 사는 집도 얼마 전까지 15평에  살았어요. 이런 철학들이 결국 지금의 사회적기업, 사회적경제 활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활동가
 
재흥 : 그런데 왜 회사를 그만두게 되셨나요? 충분히 지향하는 가치를 잘 구현할 수 있을만큼 안정적인 성장도 이루셨는데요.

자덕 : 우선 영리주식회사 자체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구심력이 강해, 소셜미션을 구현하는 데 한계가 있더라구요. 단적인 예로 구성원들과 함께 ‘우리사주조합’을 추진했었는데, 영리조직이기 때문에 잘 안됐어요. 이 회사에 모였던 사람들의 뜻 자체가, 어찌되었든 지분을 투자하든 일을 열심히 하든 돈을 많이 벌자는 생각이 우선이었으니까요. 당시 사원들이 20명 정도였는데 사원들 한 명 한 명의 철학이 쉽게 바뀌기는 어렵거든요. 물론 돈을 벌고 생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기업 고유의 또 다른 미션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무리해서 바꾸는 것도 옳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주식 소유량이 저와 사장님이 갖고 있는 것의 합이 90%여서 설사 우리사주조합을 한다고 해도 다른 사원들이 살 수 있는 분량이 많지 않았어요. 주식을 살 능력이 있는 사람도 적었고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견디기 여러운 업계의 영업생리였습니다. 일의 특성상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기업, 관공서 사람들이었는데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이 사람들과 일을 하려면 다양한 접대와 리베이트 등이 난무하는 가운데에서 일을 만들어 갈 수밖에 없더라고요. 이게 정말 나랑은 안 맞는 거죠. 마지막으로 렌탈이라는 것은 여전히 ‘누군가 소유주’가 있다는 한계가 있어서, 진정한 공유경제나 서로 나누고 연대하고 소통하는 미션을 구현하기는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낮에는 그렇게 회사생활을 하면서, 밤에는 사회운동, 시민단체활동, 지역운동을 하면서 한동안 이중생활을 꽤 오래하면서 살았어요. 2000년에 당시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졌는데, 당시 과천지부 초대 지부장을 했습니다. 또 시민단체 활동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고민이 있어서 지역환경운동연합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을 했고요. 그러다 과천시청 공무원들이 해고되면 가서 복직투쟁 같이 하고, 대책위 꾸리고. 공동육아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부터 또 거기에 결합해 함께 하고.  흔히 말하는 지역밀착형, 현장의 일을 주로 많이 했습니다.

‘사회적기업’에서 답을 찾다

그 와중에 ‘사회적기업’이라는 개념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내가 고민하고 찾던 해답이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재활용 재생 컴퓨터사업 아이템을 중심으로 한 창업구상에 본격적으로 들어갔습니다. 추진한 지 1년 만인 2008년 1월 <한국컴퓨터재생센터>를 설립하면서, 4월 이후에는 자연스레 모든 당직과 지역내 직책을 내려놓았고요. 낮과 밤이 다른 이중생활을 이제 정리해 보자는 결심을 한 거죠.

2012년 2월에 노동부 인력지원이 종료되었지만, 매출이 26억, 순익 8천만 원을 기록했어요. 사실 매출은 2011년에 이미 최고저인 30억 원을 기록했는데, 돈 안되는 일은 하지 말자는 결정 때문에 PC방 대상 리스사업을 접어서 올해 조금 매출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동안 18개월에 한 번씩 바꾸는 제품들을 다시 사줘야 하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거래처가 아까워 서 쥐고 있었던 거였어요. 대신 그 기간에 용역 사업이 많이 늘어나서 장기적으로는 매출구조가 더 다각화되고 건강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지난해 2012년 1월 비전선포식을 했습니다. 그동안 2011년 하반기(9월)부터 조직의 비전과 핵심역량에 대한 논의를 전직원들이 함께해왔습니다. 임원들이 먼저한 뒤, 조직원들의 논의가 추가로 시작됐고, 반년 만에 그 결과를 내놓은 것이죠. 당시 정의한 우리의 첫  번째 핵심역량은 ‘경험과 지식’이었어요. 기술력은 후발주자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 한국에서 업종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많아요. 아직 개인에게 축적된 그 역량이 조직에게 스며들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는 않지만요.

우리가 지향하는 것이 단순히 빨리 일을 처리하는 것 보다는, 단위시간에 많은 양을 생산해내는(high-through-put) 것이어서 이를 위한 시스템을 정립하는 데 집중해 왔고 성과를 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이 두 가지가 핵심역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생산, 처리량으로는 우리가 한국사회에서 1등인데, 질적으로 정말 1등인가? 하는 자신감을 갖기에는 갈 길이 멀죠. 또 구성원들이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자, 지향하자’는 목표를 만들었는데, 아직 진정으로 이것을 구현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재흥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부터는 <(사)비영리IT지원센터>라고 하는 새로운 소셜벤쳐, 중간지원조직 설립을 또 준비하고 계시잖아요. 그 배경이 무척 궁금합니다.

자덕 : 우선, 한국컴퓨터재생센터 같은 사회적기업은 많은 하드웨어들을 재사용하게 하고, 소외계층에 기기들을 보급하고 있지만, 소프트웨어 등 다른 IT기증과 정보격차해소 등 적극적인 사회문제해결은 포괄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는 테크숩 – Tech Soup 같은 기증개발조직이 있어서 1,2,3 섹터를 연결하는 정보격차해소 매개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한국도 이런 조직의 존재가 절실한 때라고 느껴졌어요. 또 그동안 ‘지각생’ 이라고 하는 훌륭한 현장활동가가 비영리단체에게 맞춤형 지원을 해주는 활동에 오랜시간 헌신하고 있었고 단체설립을 준비하던 터라, 보조를 맞춰주고 마땅히 함께 해야만 하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고요. 

해인 : 대표님이 이렇게 새조직을 만든다고 하셨을 때, 직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자덕 : 첫째, 사장님이 더 이상 일을 벌이지 않으니까 편하다. 저는 본래 일을 계속 벌이는  사람이거든요. 두 번째, 얼굴 보기 힘드니까 조금은 보고 싶다라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제 입장에서도 비전 선포 이후 회사경영의 장기적인, 전략적인 부분을 챙겨줘야 하는 터여서 아직 완전히 회사일을 그만두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지난해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동의를 얻고 한시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일단 임시적으로 5월까지만 단체설립활동을 한다고 하는데, 아직 새 단체의 주축을 맡을 사람이 마땅치 않아 지금은 고민이 많습니다.
 
사실 예전에도 외부활동이 많았습니다. 한국컴퓨터재생센터를 설립하고 6개월 동안은 제가  반상근이었습니다. 이렌컴에서 조직을 분사하기로 한 것이 3개월 만에 결정을 하고 후다닥 나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렌컴에서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가 영입해 데려온 상황이었거든요. 모든 전략적 의사결정에 제가 모두 관여했기에, ‘내가 나오면 이 회사가 가능할까’ 하는 스스로의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퇴사 이후에도 한동안 이렌컴 상무이사직을 유지했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루 걸러 하루씩 출근을 하고, 그러다 오전만 나가고, 그러다 어느날은 아예 안 나갔는데 예상과 달리 제가 없어도 잘 운영 되더고요. 그래서 미련없이 떠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내 역할은 어느 정도 다하지 않았나 싶어요. ‘이후 100년을 지속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밑작업을 내가 해 놓겠다. 그 다음은 새로 사람이 들어와 완성해야 한다.’ 는 생각입니다. 어찌되었든 2018년이면 3~5배 성장해 있지 않을까요? 당장 내년을 목표로 해외법인 설립도 시도하고 있고 한국에서도 부산 경남이나 대전 등에 하나 법인을 추가로 설립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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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공감 토크, 주니어가 시니어에게

재흥 : 사실 사회적경제, 시민사회조직에서 일하는 선배들께서 자주 그만두셔서 롤모델을 찾기 어려워요. 긴호흡으로 의기투합해서 일을 해야 이룰 수 있는 것들이 많은데, 아쉽다는  생각이 자주 들고요.

해인 : 저도 지금은 조직 외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활동하는 가운데 비전을 찾은 편이에요. ‘반려동물협동조합’을 추진하고 있는데, 장기적으로는 비전을 보고 있어요. 지금 활동하시는 시니어분들은 마땅한 후배 활동가가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주니어 활동가들은 보고  믿고 따를 대상이 부족한 것 같아요.

재흥 : 또 하나 고민은 사회적경제, 사회혁신과 같은 새로운 흐름 속에서는 예전과 달리 섹터를 넘나들면서 연결하고,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어서 더 나이 들기  전에 새로운 섹터로 뛰어들어 다양한 경험을 빨리 쌓고 오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자주 합니다. 새로운 흐름에 대비하고 미래를 준비하려면 말이죠.

섹터를 넘나드는 경험이 필요하다

자덕 :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큰 그림을 못 보고, 중간지원조직에 있는 사람들은 현실을 잘 모르기 쉽죠. 이재흥 연구원 나이인 서른둘은 제가 이렌컴에서 일을 할 때였는데, 그때는  눈앞에 닥친 모든 일들을 그냥 처리하는 데 집중했던 것 같아요. 그 전에 대기업에서도 1년 정도 일을 한 적이 있었어요. 기획조정실을 처음 만들었을 때, 제가 공채 1기로 들어갔죠.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니 ‘아 내가 여기 1년 이상 더 있으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곳은 정해진 일을 처리하는 방법, 조직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 반면에 조금만 더 있으면 부조리나 대기업병에 물들지도 모른다는 위기가 생겼어요.

사실 전에도 3년간 직장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 다닐 때 아버지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이모부가 운영하시는 회사에 입사해 군대 다니면서 일을 했어요. 처음에는 경비 일부터 시작했죠. 이후 용감무쌍하게 보험영업사원처럼 명함 들고 찾아가서 “폐기물 치우실 수 있는 것 없습니까?” 라고 물으며 들이대고 일감 얻어오고, 울산 김해를 하루 온종일 운전하면서 다 돌아다니기도 했고요. 나중에는 이사 직함으로 회사를 처분하는 일까지 해봤습니다. 이처럼 대기업, 그 전에 조직경험까지 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사업하는 게 가능했어요. 경비부터 시작해, 총무, 영업 등 모든 것들을 해 본 경험이 있었던 것이죠. 리더를 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경험이 필요해요. 리더가 된다는 것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섹터를 넘나드는 도전을 하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아직 부족하거나 준비가 안 된 부분은 계속 채워 나간다면 좋겠죠. 다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게 어려운 공부, 졸업장, 자격증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실질적인 역량을 쌓는 게 중요하겠죠. 이 부분만 꼭 경계하면 좋을 것 같아요.

해인 : 나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어떤 특별한 역량이 있나 자주 되묻곤 합니다. 앞으로의 나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지 고민이고요. 

자덕 : 일단 어떤 일이든 부딪쳐서 해보면, 이런 부분들이 부족하다. 잘한다. 잘못한다가 나오지 않을까요? 나 같은 경우,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조정하는 것을 잘 하는 편입니다. 의견 내면 충돌나는 것을 조정하고, 어떻게 하면 풀어낼 수 있을지를 찾아내는 것을 잘하게 되었죠. 사실 이런 역량은 이렌컴에서 No.2 역할을 하면서, 발견되고 개발될 수 있었어요. 그 전에는 잘 몰랐거든요. 사장님을 모시고 일을 하다보니 내부와 외부, 부분과 부분을 폭넓게 보고 연결하는 역할을 잘 할 수 있게 된 거죠. 나는 돌격대장 같은 역할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어요.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한다.”

해인 : 또 한 가지 궁금한 게, 사회적경제에 계신 전문가, 선배들은 내 나이에 어떤 고민을 했을까 하는 거예요. 혹 20대 후반에 대표님은 어떤 모습, 어떤 고민이 있었나요?

자덕 : 저는 28살에 결혼을 했어요. 직장 들어가서 일 배우고, 일 처리하기에 바빴죠. 게다가 얼마 안 있어서 IMF가 터졌고, 이렌컴이라는 회사를 만들었죠. 그 당시가 1999년, 내 나이 32살이었어요. 그야말로 정신없이 일을 하며 가정을 돌봤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회사생활하고 저녁에는 지역, 시민활동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개의 과제를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한다.” 이런 생각이었어요. 미래에 대한 고민이나, 삶의 고민 을 따로 할 시간이 있지는 않았고, 실패의 과정 속에서 하나씩 느끼고 깨달으며 깊어졌던 것 같아요. 이렌컴 안에서 한계를 느끼고, 시민활동 당원활동을 하면서 한계를 느끼고.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민주노동당이 깨지고… 그 깨지는 치열한 논의과정 한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세상을 대체 어떻게 바꿔야 하나?” 하는 고민이 깊어졌던 거죠.

재흥 : 그렇게 활동 중에 지칠 때면 어떻게 극복하고, 또 마음을 전환하곤 하셨나요?

자덕 : 다른 분들이 저와는 살아온 과정이 조금 다르리라고 생각해요. 저는 신앙 속에서 어린 시절 자아가 성장해 왔고, 배움이 짧고 경제적으로 힘들어 늘 치열하게 사셨던 우리 아버지, 어머니, 주변의 그런 사람들을 보고 배우면서 나 스스로를 만들어 왔죠. 말씀해 주신대로 사회운동을 하다보면 그 논리에 내가 지배를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처럼 주위의 분들을 보고, 생생한 현실을 내가 늘 보아왔기에 위험에서 벗어나고 부족한 부분을 매우게 된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시절 세상을 떠난 친구가 없었다면, 우리 부모님 같은 어려움을 안 당하셨으면, 하는 꿈이 있었기 때문에 벽에 부딪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재흥 : 그런데 오늘날의 20대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요? 학생운동을 경험해 본 사람들도 적고, 강한 소명의식을 형성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자덕 : 맞아요. 사실 그게 나의 한계이기도 한데, 나는 활동을 시작할 때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았어요. 내주위의 사람들, 친구들, 당위적으로 생각했던 게 크죠. 그래서 나중에 ‘내가 정말 뭘 좋아하지? 뭘 하고 싶어하는거지?’ 라는 생각들을 하게 됐고, 그 과정 속에 사회적기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이후에도 책을 보고 사람을 만나면서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나라고 하는 사람은 평판, 남들이 나를 어떻게 봐주느냐 하는 것. 나의 존재가치라고 하는 것들이 남들에게서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원위치되고 말았는데, 나의 20대 같은 경우에는 사회적 문제가 아닌, 나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부족해서 한계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2018년부터 제 새 프로젝트가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 사회적경제의 협동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더불어 함께’에서부터 나오는데, 그것은 자기성찰, 요가명상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실천하는 거예요. 그러한 자기성찰 등 활동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가고 소통하는 것이 우리 시대 사회적경제에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나중에 ‘캠핑카’를 하나 사서 전국을 누비며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 길 위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드리는 프로젝트를 하려고요.

둘째, 사회적경제 컨설팅을 하는 겁니다. 우리 회사를 포함해, 기존 사회적기업들은 협동이라기보다는 혁신과 관련된 부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남양주협의회 하면서 느꼈던 것이 “사회적경제가 ‘네트워크’를 통해서, 다양한 영역과 함께 할 때 가능하다.” 라는 생각이었어요. 모든 문제, 모든 의제가 사회적경제 방식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을 해본 경험을 갖고 컨설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완전한 유목민이 되는 것 같은데, 우리  사모님도 저와 함께 가기로 약속했답니다. 대신에 일은 줄이고, 노는 것을 늘리자. 사람들을 만나서 노는 것이 일이 되고, 일하는 것이 노는 것이 되는 일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 이게 목표입니다.

해인 :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듣다보니 저희 대표님과 비슷하시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그런데 왜, 아이들이 이런 생각하잖아요 “난 엄마처럼 부지런하지 못 할 거야. 내가 과연 저분들처럼 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자꾸 들어요.

자덕 : 지역에, 현장에 있으면 정말 열심히만 하면 돼요. 스태플러 찍고 하는 자잘한 업무가 많죠. 그런데 ‘중간지원조직’에 있으면 많은 역량과 전문성을 실제로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런 부담감을 느끼는 게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대기업에서 1년, 영리기업에서 수년간 일했지만, 기업역량을 얼마나 배워왔는가는 의문일 때가 많아요. 반대로 사회운동은 현장에서 상근활동가로 활동한 적은 없지만, 항상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하면서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었죠. 중요한 것은 어디에 가느냐, 어떻께 하느냐 보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스스로 명확히 정리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해인 : 딸아이 같은 더 어린 세대 활동가가 앞으로 더 많아질 것 같은데요, 혹 그네들에게 조언을 좀 해 주신다면요?

자덕 : 소셜이라고 하는 부분이 뭘까. 사회 문제를 바꾸고 이런 것을 꼭 이야기해야 할까?  내가 좋고, 내가 즐기고 그런 것이라면 그 자체가 소셜한 것 아닐까. 그런 동기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할 거라는 생각을 해요.

활동가가 소명의식으로 일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많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소명의식이  나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분리될 수도 없고요. 유럽 사람들을 만나보고 놀란  적이 많습니다. ‘결사체’라고 하니까 굉장히 뭔가 강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인간적인 결사’에 가까운 소박한 것이었어요. 관계라고 하는, 협동이라고 하는 것의 중요성을 생활 속에서 느끼고 구현하는 사람들이기에, 그런 대단한 협동사회경제를 만들고 지탱할 수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소명의식 이런 것은 사회 리더들에게 필요한 것이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내가 하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일로써 했으면 좋겠습니다.

재흥 : 구 대표님은 언제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명확해지셨나요?

자덕 : 사회적기업을 운영하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이렌컴 때처럼 낮과 밤이 다른 이중생활 청산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사회에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그 셋이 다 맞물리는 일을 찾기는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 같고요. 완벽하면 재미없잖아요. 인간이니까 실수도 하고. 나태해지고 놀고 싶은, 기계가 아닌, 그런 존재로서 나를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나태해질 때 정말 나태해지거든요. 그런데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집에 들어가 TV를 보다 재밌으면, 새벽3시 4시까지. 상당히 하나에 몰입하는 경우도 있고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그 자체를 인정해 보세요. 무척 편해져요.

재흥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글 사진 _  이재흥 (희망제작소 사회적경제센터 선임연구원 weirdo@makehope.org)
                김해인 (씨즈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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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경제 세대공감 인터뷰
(1)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일’로 해보자” _  (주)한국커퓨터재생센터 구자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