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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종의 사막을 건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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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일 ‘제주올레’ 걷기모임에 참여해서 모슬포 일대를 걸었습니다. 제주도에서도 가장 바람이 거칠어 ‘못살포’라는 별명은 얻은 곳인데, 이날은 초겨울이었지만 날씨가 화창해서 참 좋았습니다.

국민(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어서 기억이 희미합니다. 소풍인지 동원인지 모르나 전교생이 선생님들의 인솔 아래 아침에 먼 길을 떠났습니다. 군사훈련을 구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산비탈을 넘어 모래사장을 밟고 소나무 숲을 지나 두어 시간 만에 도착한 곳은 나지막한 야산이었습니다.

나무는 하나도 없고 잡초가 온 동산을 덮고 있었는데 노란 꽃이 수를 놓은 듯 고왔습니다. 그 야산엔 군용트럭 수십 대가 세워져 있었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모자에 별을 단 장군과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풀밭에 그냥 앉았습니다.

그곳에서 앞을 바라보니 나무가 하나도 없이 역시 잡초만 파랗게 자란 산기슭에 커다란 원이 3개가 그려졌는데 그 원 속에는 알 수 없는 글자(영어알파벳)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로 인접한 바닷가엔 군함이 몇 척 떠 있고, 오른쪽 넓은 풀밭에는 프로펠러 군용기가 뜨고 내리는 소리가 윙윙거렸습니다. 그렇게 멋있는 광경을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친구끼리 떠들고 장난치고 있던 중 갑자기 ‘쉭’하는 소리와 함께 공중에 물감을 뿌려놓은 것 같은 연기가 치솟았습니다. 섬광이 번쩍이고 고막을 찢는 것 같은 굉음이 사방에서 들리는 데 폭탄이 내 귀를 스쳐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습니다. 굉음이 들릴 때마다 조금 후면 산기슭에 그려진 원에서 흙 구름이 피어오르는 게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습니다.

”?”한참 동안 들리던 포격소리가 멈추자 철모에 나뭇가지를 꽂은 군인들이 총을 쏘며 산기슭을 기어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군인들은 산꼭대기에 올라 총을 흔들며 고함을 질렀고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박수를 보냈습니다.

반세기 전 내 눈앞에서 군사훈련이 벌어졌던 곳은 제주도 서남단에 자리 잡은 송악산, 속칭 ‘절울이 오름’입니다. 지금은 제주도에서 인기 있는 관광지의 하나가 되었지만 ‘육군제1훈련소’ 시절 그곳은 군사지역이고 가끔 불발탄을 건드려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빈번했던 ‘접근금지구역’이었습니다.


이번 ‘제주올레’ 길의 코스 출발점은 모슬포 ‘멸케'(멸치가 많이 잡히는 해변이라는 뜻)였는데 이곳에서 20여분 걸어서 도착한 곳이 섯알오름이었습니다. 이 섯알오름은 21세기 들어 4.3비극의 한 획을 그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수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4.3사건이 진정된 한참 후인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정부는 ‘예비검속’을 실시하도록 군경에 지시했고, 제주도에 주둔하던 군은 예비검속된 주민들 중 210명을 재판도 없이 이 섯알오름의 분화구에 몰아넣고 집단으로 총살하여 묻어버렸습니다. 이들의 시체는 누구의 시신인지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땅속에서 뼈가 뒤엉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여러 성씨의 아들들이 하나로 엉킨 이 비극의 상황을 ‘백조일손(百祖一孫)’이라는 말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군사훈련을 재미있게 구경하며 앉아 있던 그 야산이 섯알오름이라는 걸 이번 올레걷기로 알게 됐습니다. ‘제주올레’는 이 코스를 ‘삶과 죽음이 공존했던 길’이라고 인터넷 게시판에 설명해놓았습니다. 정말 적확한 표현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일대처럼 평화롭고 목가적인 곳은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라도를 향한 관광유람선이 물살을 가르고 오름 기슭에는 조랑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을 사시사철 볼 수 있습니다.

제주도를 좀 자세히 여행해본 분들은 느끼겠지만 모슬포 일대는 제주도에서도 지형이 특이합니다. 한라산은 제주도 그 자체인데 이곳에서만은 한라산이 저 먼 곳에 동떨어져 보입니다. 제주도에서도 보기 드물게 광활한 평야가 형성된 곳입니다.

그러나 동중국해의 바닷바람이 거칠게 불어 나무가 자라기 어려울 정도여서 고구마 감자 마늘 등 뿌리 작물이 주로 재배되는 곳입니다. 제주도의 다른 땅이 귤밭으로 변해도 이곳에선 귤나무를 거의 볼 수 없습니다. 바람 부는 날 모슬포 거리를 거닐어보면 그 옛날 서부극에서 보던 미국 소도시를 방불케하는 황량함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관광객들도 별로 찾지 않는 곳입니다.
”?”모슬포 일대는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근현대사의 비운의 주름이 가장 깊게 패인 곳입니다. 그 시원은 여기가 태평양에 가장 돌출된 곳인데다 ‘알뜨르(아래 들판)’라는 비행장 적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차 대전 중 일제는 중국을 폭격하는 중간기지로 이곳 알뜨르에 비행장을 건설합니다. 그리고 전쟁말기 ‘결7호 비밀작전’지역으로 미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집중시켰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비행장과 진지건설에 동원되어 비행장을 만들고 바위에 굴을 뚫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군용비행장 등 군사시설은 해방 후 미군정을 거쳐 한국군이 그대로 물려받게 됩니다. 군인이 주둔했기에 4.3사건의 주요 해프닝도 이곳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곳엔 육군제1훈련소가 설치되어 50만 명 이상이 훈련받고 전선에 투입됐습니다. 육군제1훈련소 시절 모슬포는 제주도에서 가장 사람이 몰리고 저자가 번창하던 기지촌이었습니다.

해안진지 동굴, 19개의 격납고, 잔디밭 활주로 등은 아마 한국 땅에 가장 뚜렷이 남아 있는 일제의 흔적이 될 것입니다. 육군제1훈련소의 흔적으로는 비석과 기둥과 교회당이 곳곳에 흩어진 채 쇠락해가고 있습니다. 옛 훈련소 터에 해병대 부대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미군이 관할하던 모슬봉 위의 거대한 레이더 기지도 지금은 한국 공군에 인계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비행장 부지를 포함한 약 100만평의 땅이 국방부 소유라는 점이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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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점령 이전부터 이곳은 조선시대의 아픈 역사의 발자취가 거쳐 간 곳입니다. 조선시대 제주는 최적의 유배지였습니다. 거의 200명이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대다수가 당쟁과 사화의 희생자, 즉 정치범이었습니다. 네 살 된 소현세자의 아들에서부터 84세의 노인까지, 한때 임금을 지냈던 광해군에서부터 조선후기 최고 지식인 추사 김정희까지 다양합니다.

궁성에서 얼마나 멀리 보내느냐가 고통의 척도라면 조선 최남단의 대정고을은 제주에서도 최적의 유형지였습니다. 많은 주요 국사범이 대정현감의 감시하에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대표적인 인물로 5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9년 동안의 황금기를 이곳에서 귀양살이 하면서 세한도를 그렸습니다. 추사체는 대정고을의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완성됐다고들 합니다.

또 한사람의 특이한 귀양객이 정난주라는 천주교 여신도였습니다. 정약용의 조카이자 1801년 ‘백서사건’으로 처형된 황사영의 아내입니다. 황사영 일가는 풍비박산이 되고 그녀는 제주 대정현의 관기로 유배되었습니다. 독실한 천주교도였던 그녀는 형극의 관기생활을 하면서도 신앙심과 봉사정신으로 이 일대 주민을 감화시켜 ‘한양 할머니’라는 칭송을 받다가 사망했습니다. 천주교는 십여 년 전 그녀의 무덤을 성지로 조성했습니다. 추사 적거유적지와는 불과 1000미터 거리입니다.

또 하나 이곳 대정지역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1901년 천주교의 폐단에 반기를 들고 제주섬을 혼란의 소용돌이로 변하게 했던 ‘이재수의 난’입니다. 추사가 유배되었던 대정고을은 바로 이재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개인에게도 팔자가 센 사람이 있듯이 모슬포 일대야 말로 팔자가 센 고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슬봉 꼭대기에서 추사 유적지 일대를 내려다보니 여유롭기 그지없었습니다. 4차선 도로 위를 자동차들이 줄을 잇고, 초겨울 양광이 쏟아지는 넓은 벌판은 거의가 파랗게 자란 마늘밭이며 그 밭에는 스프링클러들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집 앞에 천막을 쳐놓고 올레를 걷는 500여명에게 따뜻한 마늘차를 대접하며 삼다수 페트병을 하나씩 나눠주었습니다. 노랗게 익은 밀감 상자를 아예 길에 내다놓고 올레꾼에게 서비스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곳엔 관광객이 한 번도 지나가지 않은 시골길입니다. 현대 사회에선 걷는 것도 이렇게 기획되고 여러 사람의 지원을 받으며 문명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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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해변, 수풀, 오름 등 절경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이 코스가 재미없는 제주도 여행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색다른 제주도의 모습이나 어두웠던 과거를 더듬으며 걸어보면 그런대로 의미 있는 길입니다. 자동차도, 자전거도, 포장길도, 난로나 냉장고도, 파커점퍼도 없던 시대 조선조정을 휘젓던 엘리트 유배객들이 이곳에서 살던 모습을 상상하며 걸어본다면 우리의 삶을 새롭게 바라볼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올 겨울에는 많이 걸어 보는 게 어떨까요. 경제가 어려운데 제주도가 아니면 어떻고 올레길이 아니면 무슨 상관입니까. 제주도는 환율 덕택에 겨울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즘 지방경제는 정말 딱합니다. 우리나라 모든 시골길이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 곳을 걸으며 시골 식당에서 우동 한 그릇이라도 사 먹는다면 좋지 않을까요.


*이 칼럼은 자유칼럼에도 함께 게재합니다.

올챙이 기자로 시작해서 주필로 퇴직할 때까지 한국일보 밥을 먹었다. 혈기 왕성한 시절의 대부분을 일선 기자로 살면서 세계를 돌아 다녔고 다양한 이슈를 글로 옮겼지만 요즘은 환경과 지방문제, NGO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이제는 글 쓰는 것이 너무 지겹다’고 말하면서도, 지난 100년 동안 지구 평균 기온이 0.6도 올랐다는 사실이 인류의 미래에 끼칠 영향을 엄중히 경고하기 위해서 사막을 다녀온 후 책을 쓰고, 매주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현장에 있고 천상 글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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