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삼백리길 따라 걷는 ‘달콤살벌한’ 여행
남도에 다녀왔습니다. 아니, 남도 길을 걷고 왔습니다.
지난 주 서른 명의 희망제작소 식구들은 3일간 (17~19일) 평창동을 비웠습니다. 일년에 한 번씩은 꼭 치르는 행사죠. 매년 여름 제작소 식구들은 함께 지리산에 다녀오곤 한답니다. 일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평소에는 얘기 한 마디 나누기 힘든 동료들과 오붓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올해 목적지는 조금 달랐습니다. 지리산 보다 조금 더 내려간 곳, 남해의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순천이 올해의 목적지였답니다. 왜 하필 순천이냐고요? 그 이유는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른 아침 서울을 출발해 점심 때쯤 순천에 도착했습니다. 순천시 송광면에 위치한 조계산 자락에서 허겁지겁 점심을 먹고,
곧바로 제작소 식구들은 산행에 나섰습니다. 잠시 몸을 풀 겨를도 없이 바삐 움직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죠. 이 날 제작소 식구들은 5시간에 걸쳐 산길을 걷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조금이라도 여유를 부렸다간 해가 떨어진 뒤 캄캄한 산길을 헤매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죠.
이 날의 인솔자는 희망제작소 뿌리센터의 박상현 연구원입니다. 박상현 연구원이 인솔자로 나선 이유는 간단합니다. 순천 구석구석의 길들을 훤히 꿰뚫고 있거든요. 지난 5월에는 거의 한 달 내내 순천에 내려와 있었다고 합니다. 걷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쩌다 희망제작소 연구원이 순천까지 내려와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현재 희망제작소 뿌리센터는 순천시와 함께 아주 특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남도 삼백리길 프로젝트’.
쉽게 말해 순천 곳곳에 산재한 보석 같은 자연 환경과 유적지들을 거미줄처럼 잇는 탐방로를 발굴하는 작업이지요. 강과 숲, 바다, 나무, 문화, 그리고 사람. 순천이 품고 있는 그 모든 것을 말입니다.
꼭 커다란 리조트를 짓고, 화려한 테마파크를 건설해야만 지역의 경제가 살아나는 건 아닐 겁니다. 순천시와 뿌리센터의 ‘남도 삼백리길 프로젝트’는 길의 가치를 재발굴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이를 통해 관광객 유치 등의 경제적 실리는 물론 지역의 숨겨진 사회ㆍ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효과도 함께 기대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은 최소화하면서 말입니다.
탐방로 입구에 위치한 송광사를 지날 때까지만 해도 제작소 식구들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이국적인 대나무 숲을 지나 불어오는 그 상쾌한 바람! 폭신폭신한 흙길을 걷는 재미 또한 쏠쏠했지요. 바람에 실려오는 숲 향내가 달착지근했습니다. 한 연구원은 서울에서는 만날 수 없는 장수풍뎅이를 발견하고는 환호성을 지릅니다. 저런, 서울 촌놈티를 팍팍 냈군요.
그러나 즐거움은 잠시. 십여분 남짓 길을 걷자 비탈진 산 길이 눈앞을 가로 막습니다. 제작소 식구들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습니다. 선두 그룹과 후미 그룹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여기저기서 숨가쁜 호흡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길을 걷다 만나는 얼음장 처럼 차가운 계곡물이 아니었다면 아마 대부분이 주저 앉고 말았을 겁니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연구원들의 곡(?) 소리와는 상관없이 박상현 연구원은 씩씩하게 선두 그룹을 이끌었습니다. 시커먼 GPS 장비를 한 손에 든채 말이죠. 처음 보는 장비였던지라 슬쩍 값을 물어보니 꽤 고가의 장비라고 하더군요. 홀로 길도 나있지 않은 산 속을 헤매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장비라고 합니다. 그가 혼자 걸었을 산길을 상상하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들더군요.
지역 연구와 컨설팅 사업을 수행하는 뿌리센터 연구원들은 평창동 사무실에서 좀체 얼굴을 보기가 힘듭니다. 늘 무거운 베낭 하나를 짊어진 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기 때문이죠. 게다가 충분치 않은 인력 탓에 많은 경우 홀로 지역에서 업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같은 직장의 동료이지만, 몇 달 동안 얼굴을 못보기도 하죠. 전북 완주 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뿌리센터 김준호 연구원은 얼마 전 한 지역 언론의 보도를 통해 제작소 식구들이 그 근황을 전해들었을 정도입니다. 바로 이 기사입니다!
몇 시간이나 길을 걸었을까요? 앞서 산을 오르던 연구원들의 환호성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아! 드디어 능선에 도착해습니다.
발걸음을 내딛자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적십니다. 뒤쳐졌던 연구원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합니다. 유난히 산행을 힘겨워하던 한 연구원은 능선에 도착하자 마자 산행을 진두지휘한 박상현 연구원에게 “갈아 마셔버릴거야~”라는 살벌한 멘트를 날립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연구원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능선을 따라 조계산의 정상인 장군봉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바위를 오르다 흙길을 밟으니 날아가는 기분이더군요. 길의 양 옆으로는 자욱한 안개가 융단처럼 펼쳐져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죠. 정말 길을 걷는 즐거움을 한껏 만끽 할 수 있었습니다. 무사히 장군봉(884m)에 도착해 기념 사진도 한 장 박고, 옹기종기 모여 준비해 온 간식도 나눠 먹었습니다. 이제 무사히 내려가는 일만 남았네요.
제작소 식구들 모두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산을 내려와야 했습니다. 부상자도 속출했지요. 사회창안팀 김이혜연 연구원은 벌에 쏘이고 말았습니다, 뿌리센터 전우석 연구원이 딱딱한 신용카드를 이용, 벌침을 제거하는 진기한(?)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죠. 긁히고, 넘어지고, 물리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연구원들은 제각기 탐방로를 걸으며 느낀 점들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순천행의 주요 목적이기도 합니다. 뿌리센터 연구원이 공들여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이니 만큼 제작소 식구들도 함께 길을 걸어보고, 도움이 되는 조언을 들려주어야 했죠.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는 길이 다소 험하다는 의견에서부터, 길을 걷는 도중 식수를 확보할 곳이 부족하다는 의견까지 제작소 연구원들의 꼼꼼한 코멘트가 이어졌습니다. 순천 시민들, 아니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걸을 길이니만큼 날카로운 지적이 이어졌습니다. 모두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말이죠.
산 아래에 자리한 아름다운 사찰, 선암사에 도착할 무렵에는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습니다. 땀에 절은 몸으로 저녁 식사를 마친 연구원들은 첫 날 숙소인 순천 전통야생차체험관에 짐을 풀고 지친 몸을 뉘었습니다. 다섯 시간 남짓 길을 걸었을 뿐인데, 왜 그다지도 눈꺼풀이 무겁던지요. 옹기종기 모여 앉은 채 풀벌레 소리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연구원들도 있었습니다. 소곤소곤 정다운 말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오더군요. 남도 삼백리길 여행의 첫날 밤이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남도의 달빛은 포근했습니다.
사진 / 희망제작소 정성원 연구위원 (sansotong@makehope.org)
☞ 희망제작소의 남도 답사가 언론에도 소개되었답니다 ~ 클릭!
희망제작소 식구들의 남도 삼백리길 답사 둘째날 이야기는 순천만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소설 무진기행 속 주인공이 걸었다던 그 길, 짱뚱어와 농게가 뛰노는 끝없이 펼쳐진 갯벌 이야기. 그리고 유려한 곡선을 자랑하는 순천만의 숨막히는 비경까지. 다음주에 소개될 남도 삼백리길 답사 둘째날 이야기도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