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의 나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서 오랫동안 길을 헤매었다. 앞으로 어른으로서 홀로 무언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과 마냥 천진한 아이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주니어와 시니어 그 틈바구니에서 잠시 즐겁게 머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태생부터 소극적인 성격을 지닌 탓에 낯선 사람과 마주치는 걸 두려워하는 내가 큰 마음 먹고 참여하게 된 <동네 한 바퀴in종로구>(이하 동네 한 바퀴)가 바로 그것이다. 이틀에 걸쳐 16시간 동안 동네 한 바퀴에서 함께하며,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고, 웃어주고, 손뼉 쳐주는 많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주니어와 시니어 두 세대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동네 한 바퀴가 끝나고도 그 여운은 계속됐고, 한 달 후쯤인 7월 6일 후속모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험기간이라 고민되긴 했지만 즐거운 시간을 함께했던 주니어와 시니어들을 다시 만나고자 오산시에서 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희망제작소를 찾았다. 희망제작소에 대한 소개를 간략히 듣고 ‘전국 동네 자랑~’ 워크숍을 가졌다. 각자 살고 있는 동네 지도를 그림으로 그리고 우리 동네의 장점과 희망하는 점들을 발표했다. 행사날 특강을 해주셨던 임완수 박사님께 미국의 마을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 어떤 자원이 있는지 처음엔 잘 떠올리지 못했던 주니어들도 찬찬히 지도를 채워가며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이어서 동네 한 바퀴에 참여했던 김정민 선생님의 골목길 해설을 들으며 서촌탐방을 시작했다.
우리가 처음 향한 곳은 윤동주 문학관이다. 문학, 그 중에서도 시를 전공하고 있는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왔던 곳이었다. 윤동주 시인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하고, 시인의 평론을 쓰거나, 연구 과제 때문에 또는 가끔 시가 나를 옥죄어서 시를 쓰는 일이 힘들 때, 내가 지니고 있는 문학의 힘이 다 떨어졌을 때 혼자 찾아와서 충전하고 가던 곳이었다. 더운 여름날이었지만 언덕 위로 부는 바람은 시원했고, 또 높은 곳에 올라 내려다보는 서울의 풍경도 무척 아름다웠다. 그 공간을 다른 사람과 함께 거닐고 있다는 게 신기했고, 또 이렇게 주니어와 시니어가 함께 윤동주 시인을 공유하는구나, 오랫동안 그의 시를 알고 지내며 그 시의 감성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던 시니어분들과 교과서에서 배운 시인과 시라며 반가워하는 주니어분들이 이렇게 만나기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에 새겨진 서시를 읊는 사람들의 목소리, 가늘고, 굵고, 낭랑한, 장난스럽기도 하고 진지하기도 한 목소리가 한데 합쳐져 여름날의 바람을 타고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인왕산 자락이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연초록색 나뭇잎들과 시원한 그늘을 가진 산을 올랐던 건 처음인 것 같다. 마음이 급한 시니어분들은 앞서 가고 주니어분들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뒤에서 따라오는데 나는 그 사이를 걸으면서 따뜻한 장면들을 많이 보았다. 걸음이 빠른 시니어분들이 멈춰서 뒤돌아보며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모습과 가파른 계단을 뛰어 빠르게 뒤쫓는 주니어분들의 모습, 미끄럽고 바위가 많은 산길에서는 서로 손을 잡아주고, 밀어주고, 물도 나눠 마시면서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같이 길을 가려는 모습이 예쁘게 보였다. 아직 멀었냐고 묻는 지친 사람들에게“거의 다 왔어”라고 서로를 응원하면서 우리는 힘들지만 뿌듯하게 산을 내려왔다. 나는 지금껏 다른 사람들에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들에게, 손을 뻗은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길을 잃었던 게 아닌가 싶다. 산길을 오르면서 내 앞에 먼저 갔을지 모를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먼저 말을 걸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먼저 가는 것이나 빨리 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 곁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웃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다.
산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서촌 골목을 걸었다. 높은 건물과 빌딩만 보다가 낮은 지붕과 한옥의 형태로 남아 있는 집들을 오랜만에 마주했다. 골목 곳곳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젠 볼 수 없지만 시니어분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고 있는 옛 서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꼭 이웃의 낮은 담장을 넘어보는 것처럼 정겹고 따뜻하게 골목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뜨거운 햇빛을 피해 처마 밑에서 쉬었다 가면서 느릿하게 걸었다. 인상 깊었던 곳은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이 있던 자리였는데, 아쉽게도 그 상태 그대로 남아 있지 않고 다른 사람이 그 터에 살고 있었다. 나는 시인이 머물렀던 곳이 이렇게 허술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허무해서 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서울이 발전하면서 오래된 건물을 허물어버리고 새 건물을 지을 때 사라진 것 같은데, 동네가 발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것을 소중히 지켜나가는 것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나의 안식처가 되어 준 시는 대단한 게 아니라 이런 일상적인 경험과 따뜻한 이야기를 담은 것이었다. 동네 한 바퀴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함께 걸으면서 보았던 것들,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아이와 어른 사이에서 맴돌고 쭈뼛거리곤 했던 시간이 부끄럽게 느껴지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 길은 얼마나 멀까. 두렵고 막막한 적이 많았는데, 이제 나의 손을 잡아 끌어주는 많은 사람들 덕분에 온전히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앞으로 내가 만나야 할 길들과 사람들. 앞선 사람들과 뒤쳐진 사람들 그 사이에서 나는 서로의 손을 맞잡아 줄 수 있는 존재이고 싶다.
길에서 그냥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를 사람들과 함께 웃고, 이야기를 듣고, 걸었다. 열심히 그린 지도를 들고 동네 자랑을 하던 모습, 우리를 감싸안은 이 계절의 날씨, 나뭇잎이 바람에 뒤척이는 소리, 함께 걸으며 지나친 건물들의 지붕, 우리가 함께한 사소한 이야기들이 어느새 나의 시가 되었다. 나의 시가 되어준 동네 한 바퀴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글_ 정하현 (동네 한 바퀴in종로구 주니어 참가자)
사진_ <동네 한 바퀴in종로구>에 함께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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