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 보기만 해도 어쩐지 하품이 절로 나오는 단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재미없게 ‘사전적 정의’를 가져와 보겠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실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실험 (實驗)
1) 실제로 해 봄. 또는 그렇게 하는 일.
2) 과학에서, 이론이나 현상을 관찰하고 측정함.
3) 새로운 방법이나 형식을 사용해 봄.
법령 중 명칭에 ‘실험’이 들어간 법률은 「실험동물에 관한 법률」 뿐입니다. 지방정부 조례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행정규칙에 ‘실험’이 들어간 규칙명 또한 대부분 과학에 관한 규칙뿐입니다. 그렇다면 실험은 과학자의, 연구는 연구자의 전유물인 것일까요?
다시 한 번 정의를 들여다봅니다. 문장을 가만히 따라 훑다 보면 ‘누가’와 ‘어디에서’가 빠진 빈칸이 손끝에 툭 걸려 옵니다. 희망제작소는 이 여백에 각각 ‘시민’과 ‘현장’을 넣어 문장을 뾰족하게 만듭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내가 실험(연구)한다”라는 뚜렷한 목표가 생기면, 비로소 시민 연구가 시작됩니다.
이렇듯 희망제작소는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된 시민이 모여 만들어 내는 힘을 믿습니다. 단 한 명의 영웅이 단숨에 바꿔 낸 세상이 아닌, 가장 보통의 사람들이 켜켜이 쌓아 올린 변화가 뒤집은 사회를 희망합니다. “온도를 99℃까지 올려도 마지막 1℃를 넘기지 못하면 물은 영원히 끓지 않는다”라는 비유는 흔들림 없이 실천과 도전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흔히 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의 목표와 결과가 100℃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끓지 않은 덜 뜨겁고, 적당히 따듯하고, 미지근한 물이 필요하니까요. 끓지 못했다고 해서 의미 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 서울 유일 법정문화도시, 문화도시 영등포의 실험
2023 수변문화탐구생활 <#수변에서 #OO한 #실험하기>에 모인 실험이 딱 그렇습니다. 희망제작소와 영등포문화재단은 영등포 수변을 배경으로 75일 동안 시민 실험 프로젝트 <#수변에서 #OO한 #실험하기>를 진행하였습니다.
새삼스레 물가에 모여 이야기하고, 수변의 꽃을 발견할 마음을 가진 참여자 40팀과 40개의 실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그 성과로 신문 1면에 나오고, 전국 각지는 물론 전 세계에서 참여자가 몰려오고, 필요한 시설이나 제도가 생…. 겼다면! 물론 정말 뿌듯했겠지만, 우리의 이번 목표 지점은 아니었으니 아쉽거나 실망스럽진 않습니다. 그보다 더 유용하고 의미 있는 다양한 온도의 물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2021년, 법정문화도시로 선정된 문화도시 영등포의 꿈은 ‘우정과 환대의 이웃, 다채로운 문화생산도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민 실험 프로젝트 <2023 수변문화탐구생활>도 영등포구 거주자뿐 아니라 일상과 삶이 영등포 수변과 다양한 이유로 엮인 곳곳의 관계인구라면 누구든 참여할 수 있도록 참여의 문을 활짝 열어 두었고요. 덕분에 물길 따라 각양각색 좌충우돌 시끌벅적 실험실이 생겨났습니다.
주제 선정부터 설계, 수행, 결과 도출에 이르는 모든 실험 과정을 시민이 진행한다는 것도 특징입니다. 업데이트되는 실험일지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영등포 수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 편의 옴니버스 드라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40팀이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다양한 취향과 질문을 마음껏 시연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수집한 시민 인터뷰로 희곡을 창작하여 공연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탄소중립활동보고서로 제출합니다. 도림천에서 흐르는 유속을 측정하고 이를 음악으로 연주하기 위한 악기를 제작하기도 합니다. 영등포 수변 둘레길을 따라 행진하며 지역 퀴어 가시화와 모두가 주인이 되는 공공장소를 실험해보기도 하고요.(관련 글 : 영등포 물길은 시민의 별별 실험을 싣고 흐르네)
🌀 “왜?” 찾아 떠난 두 달 반의 여정
지난해 12월 8일, 창문 너머 선유도와 밤섬이 내려다보이는 문화도시 영등포다운 공간 소셜캠퍼스 온 서울2(당산)에서 두 달 반 동안의 드라마를 마무리하는 ‘2023 수변문화탐구생활: 문화도시 영등포 시민실험 프로젝트 결과공유회’가 열렸습니다. <수변문화탐구생활 톺아보기>를 시작으로 짧고도 길었던 11월 한 달간 영등포 수변 곳곳에서 벌어진 수변실험실을 함께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역과 마을은 시민들이 창의적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해볼 수 있는 가장 주요하고 기본적인 공간입니다. 시민 실험을 포함한 다양한 시민주도 문제해결이 지역과 마을에서 촉진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때문에 시민 실험에서는 공간적 정의를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험의 이유와 목표가 명확해지고 과정과 결과 역시 선명해지니까요.
<#수변에서 #OO한 #실험하기>는 어땠을까요? 문화도시 영등포의 공간적 범위는 5개의 강과 천(도림천, 대방천, 안양천, 한강, 샛강) 그리고 3개의 섬(밤섬, 여의도, 선유도)입니다. 40팀이 실험을 진행한 장소를 지도에 찍어 보니 주로 안양천, 선유도, 샛강에서 실험이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밤섬, 대방천에서 진행된 실험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40팀이 진행한 실험은 크게 여섯 개의 분야로(▲다양성, ▲공연, ▲문학/이야기, ▲미술/음악, ▲생태/환경, ▲영상/웹툰) 나뉘었습니다. 참여 팀의 실험 프로젝트들이 전반적으로 고른 비율로 분포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 것은 ▲다양성입니다. 실험 대상 또는 참여자를 고려하거나, 실험 목적 또는 결과가 다양성 개선을 지향하는 실험을 해당 카테고리로 분류하였는데요. 다양성을 주제로 한 실험이 가장 많았다는 점에서, <#수변에서 #OO한 #실험하기>는 문화도시 영등포의 지향점과 결을 같이 하는 적합한 주제와 내용으로 진행되었다고 보입니다.
실험 기간 동안 참여자들이 제출한 실험일지는 무려 197개입니다. 제출된 실험설계도와 실험일지를 바탕으로 워드클라우드를 만들어 주로 어떤 실험 내용을 담았는지도 확인해 보았는데요. 워드클라우드는 중복되는 단어일수록 글자가 커진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번 프로젝트의 중요 키워드 세 가지 ‘영등포’, ‘수변’, ‘실험’이 가장 두드러졌고, 이밖에 ‘참여자’, ‘기록’, ‘공유’와 같이 시민 실험의 주요 특징을 내포한 단어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 활동과 실험을 꿰어 내는 문화도시 영등포 시민 수변실험 매핑
실험을 보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영등포 수변에 한 번 빠져보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엄동설한 한겨울에 한강 물에 입수해 보았다는 말은 아니고요, 그동안 무대 배경으로 납작하게 펼쳐 보았던 영등포 수변 지도를 내 눈앞에 재현하고 그 안에서 나와 우리를 발견해 보았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문화도시 영등포 시민 수변실험 매핑>과 <수변네컷>이 있으면 됩니다.
<수변네컷>은 수변에서 진행한 ‘나(팀)’의 실험을 딱 네 장면으로 담아 보는 시도입니다. 프로젝트 흐름에 따라 기승전결을 한 장씩 꼽거나, 팀 구성원 한 명씩이 각각 주인공이 된 사진을 고르거나, 실험 결과물을 다각도에서 찍어 풍부하게 보여주는 구성을 택하는 등 40팀 모두 개성 넘치는 네컷 사진을 만들었습니다.
행사장 벽면에는 영등포 수변을 지도로 표현한 이미지가 걸려 있습니다. 참여자는 지도에 들어가 자신의 <수변네컷>을 실험 장소에 부착하고, 자유롭게 이동하며 다른 네컷을 살펴봅니다. ‘가장 궁금한 실험’에 초록 스티커를, ‘함께 협업해보고 싶은 실험’에 파란 스티커를 붙입니다. 활동이 끝난 후에는 함께 맵을 찬찬히 살펴보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초록 스티커가 가장 많이 붙은 궁금증 유발 실험은 <변신인력사무소>입니다. “네트워킹 기초 안전 워크숍이라는 내용이 있던데, 저도 사람 만나는 걸 꺼려하는 편이라 내용이 궁금해요”라는 질문에, “인력사무소는 목적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을 매개하는 곳이잖아요. 예술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는 플랫폼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콘셉트를 가져왔어요. 수변을 ‘이런 프로젝트 진행하려고 하는데 함께하실 분?’하고 물어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고요”라 답했습니다.
한편, 컴퓨터 바탕화면이 떠오르는 들판 이미지 네 컷도 많은 초록 스티커를 받았습니다.
“사운드 오브 선유도 라는 제목으로 특정 시공간을 음악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원래는 공연을 하면서 영상도 만들겠다는 야심찬 포부가 있었는데 날씨와 일정 때문에 모객에 실패해서 공연은 취소되고 영상 작업만 남게 되었어요. 계획이 틀어지니까 멘붕(멘탈 붕괴)이 되면서 대책이 없더라고요. 팀원들의 멘탈이 이제야 회복되는 중이라 결과물도 아직 마무리 중이다보니 사진 제출을 못 했던 것뿐입니다.” – 바디뮤직코리아
<펭귄의 날갯짓>과 <스포큰드라마lab야단법석>은 서로에게 파란 스티커를 붙였습니다.
“저희 프로젝트는 고립감을 느끼는 청년들, 그러니까 정신질환 및 고립은둔 청년이 모여서 같이 산책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는 프로젝트입니다.” – 펭귄의 날갯짓
“저희도 내년 1월에 고립은둔청년 이야기를 하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 참여자를 모았고 만나서 어떤 책을 읽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궁금하더라고요.” -스포큰드라마lab야단법석
영등포 수변의 어떤 공간에서 무슨 실험이 진행되었는지 기록하여 공유하고, 찾아볼 수 있는 질문들을 함께 고민하며 서로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시민 실험과 지역을 잇는 커뮤니티를 재발견한 시간이었습니다.
🌀 신나게 실험하고 즐겁게 실패하며 연결되기
이어진 네트워킹 프로그램은 ‘회고 시트’를 툴로 사용하여 내가 어떤 실험을 진행했는지 짚어 보고, 동료들과 열심히 실험한 한 달을 함께 돌아보며 격려와 응원을 주고받는 자리입니다. 이질집단 그룹별로 진행된 만큼, 각 팀과 실험의 뚜렷한 개성과 특징이 맞물리며 서로 자극되어 짧고 굵게 풍부한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실험 내용도 분야도, 액션 장소도 시간도 이렇게나 다른데 그 틈에서 공통점이 보인다는 즐거움도 찾았습니다. 실험에서 가장 좋았던 점이 곧 가장 어려웠던 점이기도 하다는 말에 모두가 박수를 치며 우하하 웃었습니다.
“저는 글을 쓰고 친구는 그림을 그리는데, 함께 수변을 걸으면서 하루 동안 관찰한 것을 글과 그림으로 채집했어요. 저희는 10년 전 홍대 대학원에서 만났어요. 홍대 쪽에서 한강을 끼고 마주 보이는 곳이 영등포거든요. 그때 저희는 영등포를 보면서 늘 ‘우리 뭐 하고 살까?’ 고민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맞은편인 영등포에서 홍대를 바라보게 되었어요. 대학원 시절보다 멈춰서 사유하는 타이밍을 만들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이 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기록해서 엽서 형태로 만들었고, 모든 과정을 노션에 아카이빙해두었어요. 엽서 뒤에 큐알코드가 있어서 작가노트를 볼 수 있도록 만들었고요. 저희는 11월 2일에 채집을 시작했는데 그때 날씨가 되게 좋았어요. 그래서 영상을 열심히 찍다 보니까 너무 많아져서 2시간 반짜리가 나와 버렸어요 하하. 편집하는 게 무척 힘들었습니다. 다음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게 된 게 성과입니다.” – 프로젝트R
“고립감을 느끼는 청년들이 수변에서 책도 읽고 피크닉도 즐기면서 집 밖으로 나와 보는 기회를 만드는 실험인데 11월 중순 즈음 되니까 너무 춥더라고요. 답사를 나갔다가 독감에 걸려 앓아 눕게 됐어요. 프로젝트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했는데 미뤄서라도 해보라고 응원과 용기를 주셨어요. 재정비하는 동안 날씨가 더 추워졌고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어요. 참여자들이랑 가볍게 산책만 하면서 사진을 찍고, 그걸로 카드를 만들어서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로요. 날씨도 힘들었지만 참여자 모집이 쉽지 않아서 어려웠어요. 고립감을 느끼는 청년들이 나올 거라고 크게 기대는 안했는데, 한 두 명이라도 참여해 주셔서 엄청 뿌듯했어요. 그래서 성과를 ‘방탈출’이라고 적었습니다. 참여자분이 ‘그래도 덕분에 오늘 방에서 나왔다’고 말씀해 주셔서 정말 좋았거든요. ”- 펭귄의 날갯짓
“영등포 수변을 ‘이용’하는 공간에서 ‘이해’하는 공간으로 보게 되었어요. 한 팀은 발달장애인, 다문화가정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행사 당일에 보니 그 당사자보다 함께 오신 활동보조인과 보호자 수가 더 많았다고 해요. 그래서 ‘다함께 향유하는 문화’라는 게 뭘까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셨고요. 실제로 현장에서 실험을 해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알기 어려운 부분이었겠죠? 가장 큰 성과는 ‘다음’이 있다는 것인데요. 다음엔 어떤 만남이 생길지, 이번에 아쉬웠던 점을 다음에 어떻게 바꿀지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저희 그룹을 표현한 숫자는 8입니다. 여덟을 뜻하는 건 아니고요, 옆으로 눕히면 무한대가 됩니다! 무한한 실험들, 무한한 사람들, 무한한 이야기들이 계속 생성되는 가능성이 모였으니까요.” -그룹F
<#수변에서 #OO한 #실험하기>는 지역의 지식 생산과 연구 영역을 전문가들로 한정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시민주도 연구, 시민 실험은 이처럼 연구를 ‘지식인’의 소유로 두지 않으려는 비판적 관점에서 등장한 대안적 연구활동입니다. 사회문제는 계층, 지역, 환경 등 다양한 조건과 맥락에 따라 발현되기 때문에 정부와 시장이 주도하는 개혁, 엘리트 중심의 일방적 정책 추진만으로는 근본적 질문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문화도시 영등포 수변문화실험실은 이러한 시민 연구의 가치에 주목합니다. 시민 실험이 쌓여 만들 변화를 기대합니다. 실패를 기꺼이 즐기는 실험이 남는 이유입니다. 수변실험실에는 실패한 실험이 없습니다. “무언가 발견한다면 그것이 성과”임을 충분히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영등포 물길은 계속 흐릅니다. 일상의 궁금함과 불편함을 직접 탐구해보는 실험, 결과 보다 과정에 집중해보는 경험, 시민이 도시의 주인이 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한 문화도시 영등포의 챌린지도 계속됩니다. #OO한 실험의 빈칸을 채울 무수히 많은 희망과 함께, 따듯한 봄날 영등포 수변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 글: 최나현 시민이음본부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