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2011년 1월, 공감만세의 필리핀 공정여행에 참가한 동화작가 이선희님의 여행 에세이 ‘편견을 넘어’를 1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공감만세는 공정여행을 진행하고 있는 청년 사회적기업으로 희망제작소의 청년 소셜벤처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희망별동대 1기를 수료했습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조금 더 많은 분께 공정여행을 알리고, 또 다른 여행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견을 넘어 (2) 필리핀 ‘골목길 미소’에 반하다

말하자면 내 얼굴은 1시 50분이다. 시계 바늘이 둘 다 위로 뻗친 모습이랄까? 쌍꺼풀 없이 찢어진 눈 때문에 말없이 가만히 있으면 화난 얼굴 같아 보인다. 나이가 들어 눈매가 처지는 것도 있겠지만 요즘 들어 종종 인상이 좋다는 말을 듣는 것은 내가 잘 웃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못되게 생겼다는 말을 하도 들어 그런가, 나는 좀 착하게 보이고 싶은 콤플렉스가 있다. 성형할 용기는 없고(실은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착해 보이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웃는 것이다.

사람들 말에 귀 기울이고, 적당히 반응하고, 적당히 웃으면 사람들은 곧잘 인상 좋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심한 경우,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하루 종일 웃느라 아픈 턱을 쉬기 위해 무표정을 유지한다. 그럴 때 차창에 비치는 내 얼굴은 그렇게 못돼 보일 수가 없다. 하지만 그제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착하게 보이기 위해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배꼽 있는 데까지 푹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웃는 인상이 참 좋다’라는 칭찬은 내게 달디 단 독약과 같았다. 한번 좋은 인상을 심으면 늘 좋은 인상이고 싶고, 어쩌다 얼굴 찡그린 일이 있으면 여간 마음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 웃는 얼굴이 늘 가짜였던 것은 아니다. 진짜 즐거워 웃을 때도 있지만, 즐겁지 않을 때도 이왕이면 웃고 싶었다는 것이다.

필리핀 공정여행을 떠나면서 35리터 배낭을 준비했다. 이것이 필요하면 저것도 필요하고, 저것이 필요하면 이것도 필요한 멍청한 짐 꾸리기 덕분에 배낭은 터질 듯 무거웠다. 배낭 외에 준비한 것은 하나 더. 낯선 사람, 처음 얼굴을 대하는 사람 앞에서 빠질 수 없는 웃는 얼굴. 이 얼굴 때문에 누군가는 나를 꺼려할 수도 있다는 것을, 웃는 얼굴의 나는 모르고 있었다.
 
필리핀에서의 첫 아침. 나는 홀로 길을 나섰다. 필리핀 국립대학 안에 있는 호텔에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사람이 사는 동네가 나온다(신기하게도 대학 안에 마을이 있다). 내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낯설다. 사람도 골목도 개도 집도 모두 내가 아는 단어지만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기만 하다. 

‘더운 나라에 사는 사람은 게으를 것이다’라는 편견은 여지없이 깨졌다. 이른 아침부터 골목은 사람들로 바글바글 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집 밖에 나와 있었던 것 같다. 꼬마들, 할머니들, 아기를 안은 젊은 여자, 웃통을 벗은 중년 남자, 소년들, 청년들 할 것 없이 -심지어는 닭도, 개도 모두 길에 나와 서 있었다- 길은 밖이 아니라 곧 집인 것 같았다. 모두가 함께 사는 집.

”사용자나는 마치 남의 집에 방문해서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주뼛거리는 사람처럼 잔뜩 긴장한 채 걷고 있었다. 25년 전에 아버지가 구입하신, 10년 전부터는 내가 사용하고 있는 낡은 수동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감히 셔터를 누르지도 못하고 말이다. 그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Good morning!”
당황한 나는 어색한 미소로 답을 대신 했다. 그런데 뒤이어 누군가 또 인사를 건넨다.
“Good morning!”
그렇게 그날 아침의 인사 행진이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의자에 앉은 채로, 누군가는 담에 기댄 채로, 누군가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다가, 그들은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한결같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어색한 미소로만 답하던 나도 조금씩 입을 달싹거려 보았다.

“Good morning!”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먼저 낯선 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Good morning!”
그러면 그들은 여지없이 환한 미소와 함께 내 인사에 답을 해주었다.

그들의 미소에 이유가 있었을까? 낯선 이방인에게 잘 보일 필요 따위 없는 그들의 미소는 ‘그냥’ 미소였을 것이다.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가는 이에게 좋은 하루 보내라는 가벼운 염원 같은 인사.

그러니까 말하자면 필리핀 사람들의 미소는 ‘백화점 미소’가 아니고 ‘골목길 미소’라고나 할까. 백화점 판매원들은 항상 상냥한 미소로 인사를 하지만 그 너머에는 판매 실적을 올리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보이지 않던가. 하지만 골목길에 나와 선 사람들이 나에게 건넨 인사에는 그 어떠한 의도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단번에 필리핀 사람들을 좋아하게 됐다. 내가 매끈한 백화점 바닥보다 우둘투둘한 골목길을 좋아하는 것처럼. 내가 토박이이고, 그들이 이방인인 한국에서 나는 단 한 번도 내 곁을 지나는 동남아시아 사람에게 미소로 인사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내게 미소를 보내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인사에 인색하고 미소에 야박한 한국인인 나로서는 놀라울 따름이다.
   
”사용자
결국, 길을 잃었다. 큰 길은 작은 길로 갈라지고 작은 길은 막다른 길에 다다랐는데 그 끝에서 농구를 하는 한 남자와 마주쳤다(필리핀 사람들은 농구를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남자는 이른 아침부터 집 앞에 터를 내어 만든 작은 농구 코드에서 1인 농구를 하고 있었다). 남자 역시 내게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나도 마주 인사한 뒤 그를 지나쳐 가려다 용기 내어 길을 물어보았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을 상세히 알려주더니 남자는 내 손에 든 카메라를 보고는 사진 한 장을 찍어달라고 한다. 슛하는 동작을 취하는 그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 사진을 보고 있으면 필리핀에서의 첫 날, 내게 인사를 건네던 필리핀 사람들의 미소가 떠오른다. 필리핀 사람들은 아무리 웃어도 결코 턱이 아프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의 웃음은 억지웃음이 아니니까.

”사용자내 웃는 얼굴 때문에 나를 꺼려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행 중반에 나오게 된다. 그들은 내 억지웃음, 아니 억지라는 표현은 너무 가혹하니까 ‘애써’ 웃음이라고 하자. 내 애써 웃음을 처음부터 간파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서로 결코 친해질 수 없는, 친해지고 싶지 않은, 어울리지 않는 부류였다. 나 역시 그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고 그들 역시 나에 대한 편견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과 사람과 나 자신에 대한 편견마저 뛰어 넘고 싶었던 필리핀 공정여행. 이제 하루가 지났다.

“확실히 필리핀식 미소에는 탐구해야 할 부분이 많다. 거기에는 미묘한 사회적 상호 작용이 개입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는 빠지는 법이 없는 이 미소의 인과관계를 파악하여 진의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여러 사람 앞에서 실수로 엉덩방아를 찧는다 해도, 주위 사람들은 그저 당신이 혼자 털고 일어나길 미소로 지켜볼 것이다 (……)  환한 웃음부터 특별한 시선이 동반된 엷은 미소까지, 상황별로 각양각색의 웃음이 등장한다. 그 뜻을 일목요연하게 풀이해놓은 사전은 없다. 직접 부딪혀 이해하는 수밖에.”

<Curious Global Culture Guide 필리핀> (알프레도 로체스 & 그레이스 로체스 저, 휘슬러) 中
 

글ㆍ사진_이선희
가늘고 오래 공부한 끝에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다방면에서 부족함을 절감, 불꽃 튀는 경험을 원하던 중 공정여행에 반해 청년 소셜벤처 공감만세의 일원이 되었다.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북촌을 여행하며 아이들이 스스로 동화를 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월간 토마토에서 어른들이 읽는 동화를 연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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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만세는
‘자유롭게 고민하고 상상하며 길 위에서 배우는 청년들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 라는 구호 아래, 대전충남 지역에서 ‘최초’로 법인을 설립을 한 청년 사회적기업이다. 현재 필리핀, 태국, 제주도, 북촌, 공주 등지에서 공정여행을 진행하고 있으며 공정한 여행이 필요한, 공정한 여행을 실현할 수 있는 지역을 넓혀갈 생각이다. 공정함에 감동한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보자.  ● 홈페이지: fairtravelkorea.com  ● 카페: cafe.naver.com/riceterrace


● 연재 목록
1. 나는 왜 공정여행을 떠났는가
2. 필리핀 ‘골목길 미소’에 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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