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사로 고령 지역의 문화 르네상스를 열다.

편집자주/희망제작소 기획 강좌 ‘내가 다시 자치단체장이 된다면’ 의 두 번째 순서가 2008년 8월 19일 화요일에 있었다. 두 번째 강연자는 가야사를 관광으로 변화·발전시킨 이태근 고령 군수이다. 이태근 군수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소외되고 있는 ‘가야사’의 위치를 회복해 고령의 새로운 상징으로 만들었다. 이태근 군수의 정책을 통해 고령은 ‘딸기, 메론, 수박으로만 기억되는 고장이 아닌 가야와 우륵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고장, 대가야 축제가 있는 고장이 되었다.

[##_1C|1379746146.jpg|width=”670″ height=”502″ alt=”?”|이태근 군수가 삼선단체장으로 가지고 있는 다양한 에피소드와 노하우를 청중들에게 알기쉽게 설명하고 있다._##]

고령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본부터 다시 시작하다

고령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상하수도, 도시가스, 교통시설 등 기초시설이 낙후이고 이를 정비하는 것이 급한 과제였다. 도시가스가 들어오게 했고, 나쁜 상수도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낙동강 광역 상수도를 유치했다. 또 대구와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도로 시설을 확충했다.

공무원들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인 관료주의와 나태함을 해결하기 위해 공무원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태근 군수는 160명의 공무원을 정리하여 군(郡) 예산을 절약하고, 정확성과 체계화를 위해 전산화를 시행했다. 공무원들의 지위에 상관없이 무작위로 컴퓨터 시험을 실시 해 성적을 공개하며 공무원들이 전산활용능력이 향상되도록 하였다. 또한 이태근 군수는 직접 현장에 나가 업무 소홀을 질책하고 관리 감독했다.

또 군민들의 복지를 위해서 행정 개편에 주력하였다. 당시 고령군의 버스회사의 누적적자는 50%를 넘다 보니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었다. 버스 기사 마음대로 운행되다 보니, 마을 주민들은 큰 불편을 겪고 있었다. 이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버스 노조원들의 항의와 소송도 있었다. 지금은 새로운 버스 회사와 계약을 맺어, 시골의 어르신들이 편리하게 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 보건 진료소를 개편해 물리치료 시설을 늘리고, 경로당과 마을 회관, 진료소를 통합하였다.

지역의 문제에 대해 솔직히 인정하고 대안을 찾다

이태근 군수 취임 이전에는 수해가 나면 군에서는 민심이 흉흉해 질까봐 이를 은폐하기에 바빴다. 이 군수는 수해 피해를 정확하게 공개해 수해 복구와 방지를 철저히 했다. 이렇게 지역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해결하여 현재의 고령군의 수해가 대폭 줄어들었다.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농업 상무 운동을 전개했다. 기술 발달, 고품질, 고소득을 실현하려 했다. 토양 조사를 하여 맞춤 비료를 제작하고, 연합 사업단을 만들었으며, 향후 10년 후에도 농사를 지을 사람들에게는 우선적으로 지원했다. 영농법인을 활성화 시키고 시설 지원을 위해 노력했다.

또 대구광역시와 인근 지역에 있다 보니 교육문제로 지역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린 학생들이 대구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군에서 운영하는 교육원을 만들고, 인근 고등학교에 많은 투자를 하여 인구의 유출을 막고 인구의 유입을 장려하였다.

[##_1C|1368506651.jpg|width=”670″ height=”502″ alt=”?”|청중들이 이태근 군수의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_##]

대가야의 역사를 복원하여 지역발전의 기틀을 만들다

이태근 군수가 2008년도 취임 후 가진 최종 목표는 ‘고령군만이 가지고 있는 대가야의 역사를 바로 세워 지역 경제의 활성화와 후세들의 삶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가야사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학계의 현실, 지역주민들의 반대는 이 군수가 이겨내야 할 장애물이었다. “관광자원 개발이 주민소득 증대로 이어져 주민의 삶이 윤택 해 진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예산확보를 위해 중앙정부를 내 집 드나들듯이 방문했어요. 이 모든 것은 역사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라고 사업초기의 상황과 이태근 군수의 열정을 설명하였다.

이태근 군수는 지산동고분 44호 분의 순장 모습을 재현한 왕릉전시관, 대가야 역사관을 건립하고,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한 사람인 우륵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를 건립했다. 고령의 박물관, 역사관, 전시관은 건물만 웅장할 뿐 제 기능을 못하는 전시행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였다.

또한 “개관 시간이 되지 않아도 손님이 기다리면 문을 열어주고, 관광객이 멀뚱히 보고 지나치지 않도록 해설사를 붙여 이야기를 해주고, 주말에 절대 휴관하지 않도록 하는 등 규제를 최소화해서 이용자의 편의를 최대한 생각하였습니다.” 라고 말하는 등 기존의 박물관이 가지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로 연간 방문객이 250만 명을 넘었고 감사원에서 비결이 무엇이냐며 감사를 나온 적도 있다고 하였다.

또 해마다 높은 상금을 내 걸어 가야금 연주 경진 대회를 열고, 방학동안 학생들이 가야금을 연습할 수 있도록 시설을 마련해 고령을 가야금으로 대표되는 고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가야 축제 또한 관광객을 철저히 배려한다. 축제 장소 안에서 관광객의 흥을 끊을까봐 요란한 개막식도 하지 않는다. 파도타기를 하듯 서서히 개막 세레모니를 열며, 해마다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관광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려고 노력한다. 현재 고령은 학생들에게 좋은 체험장을 제공해 주고 있다. 역사관뿐만 아니라, 농촌테마파크, 공원 등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아 인근 도시 학생들이 꾸준히 방문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정책에는 생각하지 못한 단점이 있는 법, 고령을 찾는 방문객 수에 비해 주변 상가의 매출은 크게 향상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주민들의 불만에 이 군수는 “콩나물을 키우기 위해 많은 물을 주면 99%는 다 내려가고 1%만으로 콩나물이 생명력을 유지해요. 많은 관광객의 방문만으로도 고령을 살릴 수 있어요” 라는 콩나물시루 이론으로 설득한다고 한다.

고령군수의 아이디어는 여행, 방문, 싱크탱크와의 만남으로

이러한 문화?경제정책을 만들어내는 아이디어를 어디서 나온것일까? 아이디어는 기본적인 구성은 청년시절 운수업을 하며 지역개발에 대한 골격을 잡았다고 한다. 특히 그 시절 고령은 가난하고 접근성도 약했기 때문에 도로가 우선적으로 건설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척도는 문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하드웨어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현재의 아이디어는 여행과 방문을 통해서 얻는다고 하였다. 여행과 방문에서는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실제 체험과 고생을 해야 특별한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다고 한다. 특히 체험과 더불어 희망제작소와 같은 싱크탱크와 연계하여 정책을 세부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수적임을 강조하였다.

Comments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