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그들은 지렁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제작소+지렁이=제렁이, ‘신성한 의식’의 시작

지난 6월 29일 희망제작소 1층 한쪽 구석에서 한 연구원이 수박껍질을 잘게 자르고 무게를 잽니다. 물기를 제거하기 전엔 617g, 꼭 짠 뒤에는 345g입니다. 지렁이 집사 5명이 모여 매주 이 ‘신성한 의식’을 준비합니다. 제작소+지렁이인 ‘제렁이’ 식사 준비입니다. 어른 종아리까지 오는 토분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혁신적’ 뚜껑입니다. 처음엔 스타킹이었는데 다 헤졌습니다. “선풍기 커버에 포크로 구멍을 뚫으니 습기가 딱 적당해요.”(이규리 연구원) 흙을 살짝 퍼내니 꼬물꼬물 지렁이들이 나옵니다. 새끼손가락 반의 반 정도 작은 애들입니다. 꼭 살아있는 짜장면 같습니다.

“입사 뒤 포부는?” “지렁이를 키우고 싶습니다.”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규리 연구원은 면접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렁이로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해보고 싶었어요.” 이 연구원을 조심하세요. 조요요용히 하고 싶은 일을 해버립니다. (일회용품과 작별을 고하는 ‘헤어질 결심’ 챌린지나, 지구를 지키는 미션 ‘지구특공대 300’ 챌린지에 참여해본 사람은 기획자인 그를 아실 겁니다.)

2021년 5월 8일 지렁이 500g이 택배로 희망제작소에 왔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제작소와 지렁이를 합친 ‘제렁이’, 첫 식사는 버섯. 4일 뒤 보니 잘 먹지 않아 다시 잘게 썰어줍니다. 그다음 식사는 달걀껍데기, 양배추, 사과, 참외껍질이었군요. 어떻게 정확히 아냐고요? ‘지렁이 모임’은 조요요용히, 소리리리리리 없이 꼼꼼하게 기록해왔습니다.

지렁이를 키우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1년 정도 암흑기를 거쳤어요.” 이사도 여러 번 했습니다. 스티로폼과 시멘트 화분에 나눠 살게 했다가 토분으로 합쳤습니다. 2021년 6월 28일엔 날벌레 출현으로 골머리를 앓았군요. 계절에 따라 지하실에서 테라스로 다시 1층 내부로 토분을 옮겼습니다. 지렁이들이 계속 죽었습니다. “음식물 넣으면 곰팡이가 피고요.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요. 지렁이들은 죽으면 흙으로 녹아 없어져요.” 2021년 10월 13일엔 이런 회의를 했군요. 그때 기록입니다.

-4명 참석
-배경: 응애는 늘고 지렁이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음
-결정사항
1. 통풍이 잘 되는 베란다 바깥으로 지렁이 집을 이동하자
2. 급여량을 줄이자
3. 주 당번을 정해 우리의 시간을 아끼자(월화수 중심)
4. 계란껍질을 모으자(지렁이가 좋아함)

조용히~ 1년에 음식물쓰레기 10kg 먹어치운 제작소 지렁이

‘제렁이’에게 죽음을 몰고온 원인을 찾았습니다. 문제는 습도! 흙을 갈아엎고 습도를 확 올렸습니다. “진흙 전단계가 될 정도까지 부었더니 괜찮아졌어요.“
2022년 12월 31일 ‘지렁이모임’은 연말정산을 했습니다. 1년간 지렁이가 없애준 음식은 무려 10.133kg,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은 사과껍질과 수박껍질, 가장 많이 먹은 때는 7~9월 (5.159kg)입니다. ‘지렁이모임’은 또 이런 것들을 알게 됐습니다. ‘지렁이는 음식물쓰레기를 여름에 겨울보다 두 배 먹어치운다. 수박, 멜론 등 물기 많고 달콤한 과일을 잘 먹는다. 계절과 상관없이 번식한다.(12월에도 알이 발견됐다는군요.)’

원래는 희망제작소 음식물 쓰레기 처리용으로 들인 지렁이들입니다. 지렁이의 ‘취향’을 알게 될수록 자꾸 거기 맞는 식사를 준비하게 됩니다. 지렁이는 채소, 종이, 계란껍데기을 좋아하고 육류는 싫어합니다. 마늘, 생각 같은 자극적인 음식, 오렌지껍질, 레몬, 튀긴음식은 금물이고요. 지렁이 식성을 보세요. 거의 구도자입니다. “점점 반려지렁이가 돼 가고 있어요. 집에서 지렁이가 먹을 과일껍질을 싸오기도 해요.”(이규리)

지렁이는 대우받아 마땅합니다. 지렁이종교를 만들어도 될 거 같습니다. 지렁이는 눈, 코, 귀, 이, 폐가 없습니다. 피부로 숨을 쉬고요. 앞에 입 뒤에 항문 끝입니다. 완벽한 미니멀리즘이지요. 삶의 핵심만 남겼습니다. 이 삶은 평화일 거 같습니다. 눈, 코, 귀, 이가 없다면 누굴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겠죠. 지렁이는 암수 한 몸입니다. 지렁이 세상엔 성차별이 없습니다. 동성애 혐오도 없습니다. 암수 한 몸이면 편해도 외로운 거 같은데 지렁이는 짝짓기를 해요. 지렁이 몸에 환대라고 띄가 있지요. 거기를 난포막이 감싸고 있어요. 짝짓기로 받은 정자가 난포로 들어갑니다. 짝짓기한 둘이 모두 아이를 낳는 셈입니다. 이토록 평등한 세상이라니! 지렁이는 음식물을 넣어주지 않으면 흙을 먹습니다. 기본소득을 가지고 태어난 셈입니다. 게다가 지렁이는 환경에 따라 개체수를 조절한답니다.(아직도 인간이 지렁이보다 낫다고 생각하시나요?)

결국 지렁이를 사랑하게 되다

사실, 지구 입장에서 보면, 지렁이는 인간보다 더 소중한 존재일 거 같습니다. 인간은 지구를 괴롭히지만 지렁이는 풍요롭게 하니까요. 지렁이는 쟁기질하는 농부입니다. 지표면의 낙옆 같은 유기물을 흙 속으로 끌고와 먹고는 식물에 좋은 분변토를 만듭니다. 토양을 갈아 엎어 산소를 공급하고 양분을 순환시키는 거죠. 식물이 뿌리내리도록 땅 속에 숨구멍을 뚫죠. 지렁이가 있는 땅은 스폰지처럼 폭신폭신해집니다. 블로거 ‘꿈틀지렁이’가 찰스 다윈의 말을 인용한 걸 재인용해보겠습니다. “농업에서 이용하는 쟁기는 우리 인류의 가장 유용하면서도 가장 오래된 훌륭한 발명품이지만 쟁기가 발명되기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지구상의 흙은 지렁이에 의하여 경운되어 왔으며, 인류역사상 지렁이와 같이 이렇게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는 동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 위대한 지렁이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이규리 연구원은 말합니다. “너무 귀여워. 이번에도 열심히 먹어주라~”

정리: 김소민 시민이음본부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