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없는 사회창안을 위하여

‘대낮에는 노래방을 회의공간으로 활용하는 건 어떨까요?’
‘카드 결제 시 비밀번호 4자리를 입력하도록 합시다. 지금은 너무 위험해요.’
‘추석을 10월 셋째 주로 정해 미리 연휴계획을 짤 수 있으면 좋겠어요.’

톡톡 튀는 아이디어들이 가장 먼저 사회창안 국제회의 참석자들을 반깁니다. 명동 은행회관 2층 컨벤션 홀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시민의 상상력이 담긴 사회창안 아이디어들이 가득합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참석자들이 ‘경계 없는 사회창안’을 모토로 자유롭게 생각과 경험을 나누는 자리가 펼쳐졌습니다. 9일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사회창안 국제회의 첫째 날 풍경을 전합니다. 시민들이 모아준 기발한 아이디어 못지않게 상상력과 영감이 가득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전 세계 수백 만 명이 사회창안에 관여

“생활 속에서 국민과 소통하는 정책 제안 방식은 모든 국가와 도시에서 추구해야 하는 굿 거버넌스 사례입니다. 시민사회 역량 강화와 정부 정책 수립에 모두 도움이 됩니다.”(행정안전부 김영호 제1차관)

“위키피디아 현상이 말해주듯 평범한 시민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떠올린 크고 작은 아이디어들이 세상의 변화를 이뤄내는 훌륭한 수단이자 통로로 작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회창안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희망제작소 김창국 이사장)

[##_1C|1369588328.jpg|width=”450″ height=”311″ alt=”?”|회의진행을 점검하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김신형 전문위원_##]

환영사와 함께 사회창안 국제회의의 막이 올랐습니다. 첫 번째로 단상에 오른 발표자는 영 파운데이션(Young Foundation)의 제프 모건(Jeoff Mulgan)이사입니다. 영 파운데이션은 사회창안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영국의 공익재단입니다.

“우리는 소셜 디자인에 대해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디어가 나오면 작은 규모일지라도 바로 실험하고 실행을 합니다. 학문적 전통과는 다르고, 정부의 관행과도 다릅니다. 우리는 더 빨리 실행할수록 더 많이 배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프 모건 상임이사는 교육 분야의 활동 사례를 소개합니다. 올해 9월 시작한 온라인 교육프로그램 ‘스쿨 오브 에브리싱(school of everything)’은 누구나 가르치고,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쌍방향 교육 프로그램입니다. 네티즌들은 전 세계의 이웃들로부터 베트남어를 배울 수도 있고, 지붕에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하는 법을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전 세계에서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사회창안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겁니다. 시민단체에서 사회적 기업에 이르기까지 사회창안은 포괄하는 분야도 많고,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분야죠.”

영 파운데이션에서는 올해 초 사회창안에 관여하는 전 세계의 기관들이 교류할 수 있는 온라인 사이트 ‘SIX(social innovation exchange)’를 개설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스페인, 미국, 중국, 호주 등 세계 곳곳에서 길어 올린 아이디어와 자원들이 자유롭게 공유됩니다. 사회 창안은 이제 한 사회뿐 아니라 전 지구를 움직이는 새로운 동력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_1C|1288320762.jpg|width=”450″ height=”270″ alt=”?”|희망제작소 사회창안 아이디어들_##]

제프 모건 상임이사는 사회 창안 단체들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제시합니다. 재원 조달 방식의 다양화, 작은 아이디어를 큰 아이디어로 발전시키는 방법의 체계화, 아이디어와 돈, 힘, 정부를 연결 하는 인큐베이터의 역할 강화 등입니다. 사회창안이 정책 수립과 사회변화에 대한 논의에서 더욱 큰 역할을 차지하도록 하는 문제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굉장히 잠재성이 높고, 기회를 찾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경제 위기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자본주의가 후퇴하는 시기가 더욱 큰 사회적 생산성과 창조성이 나올 수 있는 시기죠. 사회창안 등 과거에는 주목 받지 못했던 사회적 자산들을 새롭게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겁니다.”

시민과 구민, 아이디어로 행복해지다

사회 창안의 사례는 바다 건너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가 발 딛고있는 서울에서도 의미있는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서울시 라진구 행정1부시장이 ‘창의 시정’을 추진하고 있는 서울시의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_1C|1209823754.jpg|width=”450″ height=”303″ alt=”?”|이노근 노원구청장_##]

[##_1C|1112408056.jpg|width=”450″ height=”275″ alt=”?”|고규창 행정안전부 제도정책과장_##]

[##_1C|1355306701.jpg|width=”450″ height=”308″ alt=”?”|강연에 집중하는 청중들_##]

“창의 시정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시민 입장에서 생각하기’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서울시 공무원 모두가 사소한 업무일지라도 창의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시민고객의 눈높이에 맞추어 개선해나가는 거죠.”

이를 위해 서울시는 2006년 서울시 직원들의 아이디어 제안창구인 ‘상상뱅크’를 개설했고, 시민들이 자유롭게 시정에 관한 아이디어를 개진할 수 있는 ‘천만상상 오아시스’ 제도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이 온라인 공간을 통해 의견을 제시한 후에는 정책 담당자들이 직접 시민들과 머리를 맞대는 ‘실현회의’를 개최해 아이디어를 현실로 이끕니다.

시민들은 지난 2년간 천만상상 오아시스를 통해 16,095건의 아이디어를 쏟아냈습니다. 다문화 가정에 전달되는 다국어 한국 소식지, 서울시와 함께 하는 소자본 창업, 키가 작은 승객을 배려한 낮은 높이의 지하철 손잡이 등이 모두 시민의 아이디어가 현실화된 사례입니다.

이노근 구청장이 소개하는 노원구의 사례도 눈길을 끕니다. 노원구는 공무원, 학생, 시민들로부터 얻은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정책에 반영하는 ‘소셜 어젠다 마케팅 리더십(social agenda marketing)’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소수관료와 중앙정부가 주체가 된 의사결정 구조는 고비용 · 저효율의 특성을 갖습니다. 이전의 리더십이 지도자 중심의 수직적 리더십이라면 소셜 어젠다 마케팅 리더십은 창의력과 아이디어, 구성원 간의 수평적인 의사소통을 전제로 하는 리더십입니다.”

노원구가 어젠다 마케팅을 펼친 결과 서울시내의 여급발급 대행 기관이 대폭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구마다 획일적으로 부과되던 복지분담비는 이제 각 구의 재정 상태에 따라 차등적으로 부담하도록 제도 개선이 이루어졌습니다.

“어젠다 마케팅을 통해 사회적 비용의 40%를 절감할 수 있다고 항상 주장합니다. 이를 통해 사회의 경쟁력이 높아진다고 생각하고요. 어젠다 마케팅을 실시한 이후 안정적이고, 추가적으로 확보하게 된 재정 금액이 매년 600억 원에 이릅니다.”

사회창안은 프리즘이고, 사회창안은 확성기

정부도 지자체의 노력에 뒤질 수 없습니다. 행정안전부 고규창 제도정책과장은 “주로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외국과는 다르게 한국에서는 정부를 중심으로 국민 제안제도가 운영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국민들이 제공한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현재 30일 이내에 응답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보상과 표창도 이루어지고 있죠. 다른 나라와는 달리 대통령령으로 이를 제도화했습니다.”

[##_1C|1139934919.jpg|width=”400″ height=”250″ alt=”?”|김이승현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 팀장_##]

2005년 국민신문고 홈페이지가 개설된 이후 국민제안 건수는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4만 건 이상의 의견이 접수되었습니다. 현재 국민 제안의 90% 이상이 온라인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국민들이 생활에서 느끼는 불만, 불편들을 아이디어로 발전시켜 실시간으로 제안하고, 그 처리결과를 살펴보면서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국민과 정부와의 관계를 좁히고, 각종 병폐와 문제점들을 개선해나가는 촉진제가 됩니다.”

시민사회계의 대표로는 희망제작소의 김이승현 사회창안센터 팀장이 나섰습니다. “작지만 꽤 희망찬 이야기를 하겠다” 며 운을 뗀 김 팀장은 “사회창안은 프리즘이고, 사회창안은 확성기” 라고 명쾌한 정의를 내립니다.

씨앗-새싹-나무-열매로 이어지는 희망제작소의 사회창안 프로세스와 모두 3261개에 이르는 아이디어 현황을 소개한 김 팀장은 지난 3년간 현실화된 시민 아이디어 꾸러미를 풀어놓습니다.

“우리가 2006년에 진행한 임산부배려 배지가 최근에는 TV 드라마 <워킹맘>에도 나오더라고요. 관용차 개선 캠페인은 세금절약을 위해 조금 작은 차로 바꾸어보자는 취지였는데, 행자부로부터 배기량을 한 단위씩 낮추겠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좌석버스 ‘빈 좌석 없음’ 표시 아이디어는 많은 시민들이 제안을 했는데, 최근 따끈따끈하게 실현되었죠.”

독일 비영리단체 제브라로그(Zebralog)의 마티아스 트레넬(Matthias Trenel)이사는 첫째 날 마지막 연사로 발표를 진행했습니다. 제브라로그는 인터넷을 통한 참여 민주주의 촉진을 목표로 5년 전 창립된 단체입니다.

“우리 단체의 세 가지 핵심 신념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신념은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통신기술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민주주의의 의사결정 과정이 더 투명하게 바뀌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기업체와 로비스트뿐 아니라 평범한 시민도 손쉽게 아이디어와 견해를 정부에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인터넷뿐 아니라 다양한 매체들이 인터넷과 결합해 더 강력한 참여 민주주의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_1C|1173108565.jpg|width=”450″ height=”314″ alt=”?”|마티아스 트레넬, 독일 제브라독의 이사_##]

[##_1C|1359927998.jpg|width=”450″ height=”204″ alt=”?”|왼쪽이 불만합창단을 만든 올리버 코차_##]

마티아스 트레넬 이사는 5년간 펼쳐왔던 활동의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참석자들은 사례 하나 하나가 발표될 때 마다 독일 시민이 이뤄낸 놀라운 성과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현재 독일은 수십 년 동안 추구해왔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중도노선이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지지하는 당과 관계없이 시민들로부터 공감을 얻어왔지만, 최근의 여론조사에서는 ‘균형을 잃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베델스만이라는 공익재단에서 시민회의를 조직해 경제 개혁의 어젠다를 논의하도록 했습니다. 연령대, 교육 수준 등을 고려해 임의로 선발된 400명의 시민이 다 매체 간 대화 프로그램에 초청 되었죠.”

이들은 주말마다 만나 얼굴을 맞대고, 가장 시급한 사회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난상 토론을 벌였습니다. 이들의 투표로 몇 가지 쟁점들이 선정 되었고, 다시금 두 달 간 제브라로그가 고안한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제안들이 시민헌장으로 집결되었습니다. 이는 다시 독일 의회에 제안돼 채택되었죠. 모두 55개의 제안을 담고 있는 시민헌장은 이제 독일 의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정치인과는 달리 당파적으로 토론하지 않았고, 싸우기보다는 해결책을 찾는 데 집중했습니다.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니고 있음에도, 공동의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_1C|1173328560.jpg|width=”450″ height=”299″ alt=”?”|강연이 끝날 때마다 질문이 이어졌다._##]

발표자 한 명 한 명 차례가 끝날 때마다 참석자들의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진행시간을 고려해서 사회자가 매번 “더 이상 질문을 받지 않겠다”고 제지해야 할 정도로 참석자들이 보여준 지적 호기심은 뜨거웠습니다.

모든 발표가 끝난 후 전날(8일) 열린 사회창안대회에서 1,2,3 등을 수상한 입상자들의 창안 프레젠테이션으로 첫째 날 일정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사회창안 전문가들은 입상자들이 보여준 기발한 아이디어와 열정에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사회창안 국제회의는 내일(10일) 같은 장소에서 이어집니다. 대회 둘째 날에도 역시 일본, 홍콩, 핀란드 등 다양한 국가의 사회 창안 사례를 만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시민 참여, 사회창안이 어우러지는 축제의 현장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취재. 글/ 이현구(자유기고가)
사진/ 박진희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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