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앙안, 천국보다 평화로운

2011년 1월, 공감만세의 필리핀 공정여행에 참가한 동화작가 이선희님의 여행 에세이 ‘편견을 넘어’를 1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공감만세는 공정여행을 진행하고 있는 청년 사회적기업으로 희망제작소의 청년 소셜벤처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희망별동대 1기를 수료했습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조금 더 많은 분께 공정여행을 알리고, 또 다른 여행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견을 넘어 (4) 끼앙안, 천국보다 평화로운 

밤새 추위에 시달렸다. 낮에 민소매 차림으로 마닐라 시내를 걸었던 기억은 금세 사라졌다. 야간 버스에 탑승하기 위해서는 단단한 준비가 필요했다. 긴 바지와 긴 팔은 물론이요, 양말에 운동화를 챙겨 신고 머플러로 목을 감싼 다음 담요를 그 위에 덮었다. 그런데도 너무너무 추웠다. 코끝에 감각이 사라지고 지긋지긋한 수족냉증마저 되살아났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필리핀의 야간 버스, 이름하야 냉동버스다.

마닐라에서 8시간, 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면 10시간 이상도 달려야 하기 때문에 운전자의 졸음을 쫓기 위한 방편이라고는 하나 8시간을 꼬박 최고 강도의 에어컨 바람을 맞아야 하는 버스 승객은 뼛속까지 얼어버릴 지경이다. 뜨거운 동태찌개가 그리워진다고나 할까?

[##_1C|1364672126.jpg|width=”400″ height=”300″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끼앙안의 풍경_##]
선잠을 잔 때문일까? 아니면 도착 시간이 새벽이어서 일까? 버스에서 내려 선 곳이 마치 무릉도원 같다. 사방을 둘러싼 여러 겹의 산봉우리에는 흰 구름이 걸려있고 선선한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열대 나무가 솟아 있는, 도대체 이곳은 어디지?
고요하고 신비롭고 평화로운 마을, 바로 끼앙안(Kiangan)이다. 끼앙안은 코르디예라 산맥이 펼쳐져 있는 루손섬 북부에 위치해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비몽사몽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누추한 차림으로 홈스테이 집을 찾아갔다. 거지꼴을 하고 찾아간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한 건 왕! 왕! 목청 큰 개와 인자한 미소를 띤 작은 체구의 할머니다. 우리는 편하게 ‘맘’이라고 불렀는데, 그녀는 마치 엄마처럼 우리가 가장 절실히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안내해 준 방에는 가지런히 정돈된 침대가 놓여 있었고, 우리는 씻지도 먹지도 않고 곧장 침대로 뛰어 들었다. 개가 짖거나 말거나 닭이 울거나 말거나 우리는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찬 기운이 몸에서 빠져나가고 다시 눅눅한 기운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왠지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라. 이 얼마나 무례한가. 생판 모르는 남의 집에 쳐들어가 대낮까지 퍼질러 자다니. 방문 밖을 나서려니 아련한 옛 기억이 떠올랐다. 친구네 집에서 늦잠 자고 거실에 나가면 “어이구, 화상들!”하시던 친구 어머니.

하지만 이날 방문 밖에서 마주친 건 친구 어머니가 아니라 잘 생긴 청년이었다. 청년은 나를 보자마자 “샤워할 건가요? 따뜻한 물을 줄까요?”라고 물었다. 분명 꾀죄죄한 몰골이었겠지? 당황한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냥 씻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얼마나 후회했던지.

청년은 이 집의 큰 손자, 아얀이었다. 우리가 홈스테이 들어간 집은 ‘맘’과 그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할머니, 그리고 ‘맘’의 두 손자, 아얀과 드웨인이 함께 살고 있었다. 끼앙안은 조부모와 손자, 손녀로 구성된 가정이 많은데 청장년층이 도시로 돈벌이를 나갔기 때문이다.

수줍음이 많은 아얀과 달리 드웨인은 성격이 활달한 소년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 2학년 정도의 남학생인데, 처음 보는 우리에게 곧잘 말을 걸더니 급기야는 공책을 들고 와 한국어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우리가 적은 한글을 따라 쓰고 그 옆에 알파벳으로 발음을 적어 떠듬떠듬 읽는 모습에서 열정이 느껴졌다. 알고 보니 필리핀에 한국 드라마나 가요 등이 많이 소개되어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이다. 드웨인의 입에서는 “노바디 노바디 벗 유!” 익숙한 멜로디뿐만이 아니라 ‘구준표’ ‘김범’ ‘김준’ ‘윤지후’ 등 드라마 ‘꽃보다 남자’ 속 등장인물들의 한국 이름이 술술 쏟아져 나왔다.

[##_Gallery|1386344018.jpg|이 친구가 드웨인|1320557892.jpg|끼앙안 아이들|1029614002.jpg|끼앙안 아이들|width=”400″ height=”300″_##]
집에서 나와 오후에는 끼앙안의 청년들과 함께 마을 산책을 했다. 동네 꼬맹이들은 우리를 보면 수줍게 “Hello!”라고 인사를 했고 “Hello!” 마주 인사하면 까르르 웃으며 도망쳤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초등학교였다.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고즈넉한 분위기의 하얀색 2층 건물은 울창한 산에 둘러싸여있었다. 복도에는 작은 책상과 의자가 나와 있었는데 수업 시간에 장난치다가 교실에서 쫓겨난 녀석이 반성문을 쓰던 것이리라 상상해보았다. 

학교 종의 생김새가 특이했다. 포탄의 탄피가 종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끼앙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일본의 마지막 격전지였다고 한다. 맥아더가 일본군 사령관 야마시타로부터 비공식 항복 선언을 받아낸 뒤 목을 벤 곳이 바로 이곳 끼앙안이다. 끼앙안을 둘러싼 산 중에 ‘밀리언달러 힐’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미군이 야마시타를 잡기 위해 백만 달러에 달하는 지뢰를 뿌려놓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관청과 경찰서가 있는 마을 중심에는 농구코트가 그려진 커다란 체육관이 있고, 당구장에는 항상 마을 남자들이 모여 게임을 즐긴다. 정육점에는 부위별로 자른 돼지고기와 닭고기, 생선이 진열되어 있고 탄산 음료과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파는 작은 가게가 곳곳에 있다. 재래시장 안에는 바나나, 망고 외에 이름 모를 열대 과일과 야채 등이 우리나라 시골장과 다를 바 없이 죽 진열되어 있다. 이 작은 마을에서 탈 일이 뭐가 있을까 싶게 수많은 트라이시클이 항상 거리에 대기하고 있다.

[##_Gallery|1255625190.jpg|끼앙안 초등학교|1148400255.jpg|끼앙안 초등학교|1339415670.jpg|포탄 탄피로 만든 학교종 |1310250934.jpg|끼앙안 재래시장 |1155096867.jpg|끼앙안 재래시장 |1209192054.jpg|끼앙안 재래시장 |1201524550.jpg|끼앙안 재래시장 |width=”400″ height=”300″_##]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해 교회 건물이 마주보이는 학교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다. 계단에 앉아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건기, 우기로 계절이 나뉘는 열대 지방에서 비는 어떤 의미일까?

여행참가자 중 누군가 필리핀 청년에게 비가 오면 기분이 가라앉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비가 자주 오는 런던에서는 사람들이 비가 오면 기분이 가라앉지 않느냐면서. 질문을 받은 필리핀 청년이 대답하였다.

“괜찮아. 비가 오면 식물도 자라고 마실 물도 생기잖아. 아마 런던에는 라이스 테라스(Rice Terrace)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이 청년은 시트모(SITMo)의 일원이다. 시트모는 ‘Save the Ifugao rice Terrace Movement’의 약자로 이푸가오 지역에 남아있는 계단식 논을 지키는 것과 이푸가오족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NGO이다. 우리는 여행 중에 우리가 밟고 지나며 훼손한 계단식 논을 복원하는 작업을 할 것이다.

밤.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니 적막한 거실에 드웨인이 홀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드웨인은 같이 보지 않겠느냐며 나를 텔레비전 앞으로 청했고, 나는 이왕에 하는 홈스테이인데 가족들과 친해져야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으로 드웨인 옆에 앉았다. 

알아듣지 못할 따갈로그어 방송에 내가 흥미가 없다는 것을 눈치 챈 드웨인은 느닷없이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나는 방에 들어가 있는 친구들을 몽땅 불러왔다.

드웨인은 내리 삼십분 노래를 불렀고, 우리는 드웨인 노래에 대한 답가로 ‘빨강머리 앤’과 ‘과수원길’을 불러주었다. 그 뒤 한 시간 반은 필리핀 게임과 한국 게임을 번갈아 가며 했다. 웃음 많은 드웨인이 우리가 와서 좋고 우리가 가면 슬퍼서 울 것 같다고 말했다. 아얀은 곧 대학에 가니 집에는 할머니와 자신만 남을 것이라고, 너무 외롭다고.

여행자에게는 고요하고 신비롭고 평화로운, 천국보다 더 좋은 이곳이 열다섯 살 소년에게는 어떤 곳일까? 철마다 찾아왔다 돌아가는 여행자들이 이 소년에게는 어떤 존재일까?

여행자는 떠나면 그만인 이곳에서 그는 어떤 삶을 이어나갈지 궁금해졌다. 우리와 함께 찍은 사진을 꼭 간직하고 싶다는 드웨인에게 한국에 돌아가면 함께 찍은 사진을 인화하여 보내주어야겠다.


글ㆍ사진_이선희
가늘고 오래 공부한 끝에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다방면에서 부족함을 절감, 불꽃 튀는 경험을 원하던 중 공정여행에 반해 청년 소셜벤처 공감만세의 일원이 되었다.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북촌을 여행하며 아이들이 스스로 동화를 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월간 토마토에서 어른들이 읽는 동화를 연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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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만세는
‘자유롭게 고민하고 상상하며 길 위에서 배우는 청년들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 라는 구호 아래, 대전충남 지역에서 ‘최초’로 법인을 설립을 한 청년 사회적기업이다. 현재 필리핀, 태국, 제주도, 북촌, 공주 등지에서 공정여행을 진행하고 있으며 공정한 여행이 필요한, 공정한 여행을 실현할 수 있는 지역을 넓혀갈 생각이다. 공정함에 감동한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보자.  ● 홈페이지:
fairtravelkorea.com  ● 카페: cafe.naver.com/riceterrace


● 연재 목록
1.
나는 왜 공정여행을 떠났는가    
2.
필리핀 ‘골목길 미소’에 반하다  
3. 여자 여섯 명, 수다로 지새운 필리핀의 밤
4.
끼앙안, 천국보다 평화로운

Comments

“끼앙안, 천국보다 평화로운” 에 하나의 답글

  1. 김현주 아바타
    김현주

    이선희님이 현지에서 누렸던 일상 속의 여행을 상상해봅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군요. 그 여행길이 심심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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