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 환우, 그리고 모두를 위한 커뮤니티죠.”

한국 사회 곳곳에 ‘해결사’들이 있습니다. 변화를 꿈꾸지만 않고 실행합니다.  희망제작소는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는 이들을 ‘소셜디자이너’라고 호명하고 연결합니다. 오는 12월 14일 <2023 소셜디자이너클럽 사회적가치 투자(SIR) 대회(링크)를 여는 이유입니다. 이날 청중심사단(링크)이 소셜디자이너 10명의 피칭을 듣고 모의 투자합니다. 시민을 만날 소셜디자이너 10명을 소개합니다.

“뇌전증 환우, 그리고 모두를 위한 커뮤니티”  | 심재신 ‘내마음은콩밭’ 공동대표 @대구

“뿌옇게 보이고 온몸에 찌뿌두둥한 느낌….밖이면 불안해요…..내가 시한폭탄같은…그 상황에서 나를 본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이 동영상을 보는 동안엔 시청자는 뇌전증 환자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됩니다. 2019년 대구에서 가장 번화가인 동성로에서 상영됐어요. 뇌전증 인식 개선 캠페인에서였습니다. 영상을 담은 유튜브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지랄한다, 암 걸릴 것 같다, 이런 표현이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이런 표현은 빨리 없어져야 합니다.” 뇌전증은 오랫동안 ‘간질’, ‘지랄병’이란 멸칭으로 불렸어요. 환자들은 병뿐만 아니라 시선 탓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영상을 만든 심재신 내마음은콩밭 협동조합 공동대표가 4년 동안 ‘따뜻한 시선’이란 뇌전증 환자 자조 모임을 꾸리고 인식 개선 캠페인 등을 벌여온 이유죠. 그는 비단 뇌전증 환자만을 위한 활동은 아니랍니다. 한국 사회를 불안이란 전염병이 잠식해가고 있는데 이를 예방하는 방법은 느슨한 공동체라는군요. 그가 펼치는 뇌전증 인식 개선 활동도 이런 공동체를 늘려가는 것입니다. 지난달 23일 심재신(32) 대표를 대구에서 만났습니다.

-뇌전증 자조모임은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제가 뇌전증을 앓았어요. 약을 먹으면서 고등학교 3학년 이후 12년 동안 발작은 없었어요. 대학 졸업하고 한일교류 행사 등을 여는 교육 회사에 다녔고요. 대구 청년위원회, 청년정책네트워크 활동을 했어요. 우연히 대구 비영리단체 ‘별을 만드는 사람들’의 심규보 대표님을 만났는데 심 대표님도 뇌전증 약을 드시고 계셨어요. 그분이 뇌전증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자조 모임도 만드시더라고요. 제가 ‘따뜻한 시선’이라는 모임을 꾸려 같이 활동하게 됐죠.

뇌전증 발작은 종류도 정도도 다양하거든요. 자주 발작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이 병이 제 삶을 크게 흔들진 않았어요. 고3 전에는 으레 뇌전증하면 떠올리는 대발작을 일 년에 한 번 정도 했어요. 다행히 친구, 가족들이 그냥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해줬는데 저한텐 큰 힘이 됐어요. 초등학교 때 집에 가다 쓰러진 적이 있는데 친구들이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나중에 커서 물어보니 제가 숨기고 싶어하는 거 같아서 그랬다더라고요.

저는 복 받은 경우라고 생각해요.그런데도 스트레스가 있었어요. 언제 어떻게 발작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불안했어요. ‘내가 발작하는 모습을 누가 보면 어떻게 하지?’ 친구들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간질’이 아니라 ‘뇌전증’이라 불린 것도 2014년이에요. 어머니는 굳이 주변에 알리려 하지 않았어요. 본인 탓이라는 걱정도 좀 하셨던 것 같아요. 제가 특수교육이랑 사회복지로 유명한 대구대학교를 졸업했는데 학교에서 <특수교육학 개론>을 무조건 들어야 했어요. 학교에 장애인도 많고요. 한 수업 시간에 제가 뇌전증 약을 먹고 있다고 말했는데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얘기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뇌전증이 있건 없건 ‘따뜻한 시선’ 모임

-‘따뜻한 시선’은 어떤 활동을 했나요?

보통 환우모임은 약이나 병원 정보 정도 공유하는 친목모임이었어요. 뇌전증 환자가 37만~40만 명인데 드러내고 모이질 않아요. 드러내서 좋을 게 없거든요. 저희 모임에 나온 청년 한 분은 직장에서 발작을 일으켰는데 다음 날 바로 해고됐다고 해요. 뇌전증을 알렸다가 파혼 당한 경우도 있고요.

‘따뜻한 시선’으로 50여 차례 환우모임을 했는데 한 번에 5~6명씩 참여했어요. 2019년 4월에는 대구에서 제일 번화가인 동성로에서 캠페인을 벌였어요. 뇌전증 환자가 이 거리를 걸으면 어떤 느낌일지 보여주는 영상을 틀었거든요. 한 시민이 “내 친구가 발작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대처할지 몰랐다”면서 “이렇게 알게 돼 다행”이라고 하더라고요. 뇌전증 환자 인터뷰로 우화를 만들어 전시도 하고 동화책도 함께 만들었어요. 뇌전증에 대한 인식도 개선하면서 환자들끼리 이 병 있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서로 증명하는 거예요. 양방향 활동이죠.

저희 모임엔 환자, 가족 이외에 뇌전증이 없는 청년 등 다양한 사람들이 와요. 하루는 그림책 만들기 하다가 한 청년이 자기 가정사를 털어놓으며 울음을 터트렸어요. 환자분들이 위로하고요. 보통 환자는 피동적으로 위로받는 상황에 놓이는데 이 모임에서는 그렇지 않은 거예요.

사실 환자들이 이런 모임에 나오는 게 쉽지 않은데 광주, 서울, 부산에서 대구까지 오시더라고요. 저희가 차비를 지원해 드리는 것도 아닌데요. 이런 모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안이 줄어든다고 하셨어요. 뇌전증이 있다는 걸 밝혀도 되는 장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용기를 주죠. 특히 뇌전증을 앓는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은 같이 고민하고 소통할 수 있어 힘을 받는다고 해요. 저는 되레 그 어머니들한테 힘을 많이 받았어요. ‘퍼플라이저’ 활동을 왕성하게 열심히 하시거든요.

-퍼플라이저는 뭔가요?

‘따뜻한 시선’ 모임을 하다 보니 여러 지역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 지역에도 모임 만들어달라고요. 그래서 뇌전증을 깊이 이해하고 인식 개선 활동 역량을 갖춘 ‘퍼플라이저’를 각 지역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면 어떨까 생각한 거죠. 세계적으로 뇌전증 인식 개선의 날인 3월 26일을 ‘퍼플데이’라고 부르거든요. 2008년 캐나다에서 한 소녀가 보라색 옷을 입고 시작했다고 해요. 그 ‘퍼플’에 지치지 말자는 뜻으로 ‘에너자이저’를 합친 거죠.

지난해 12월 기획단을 만들었어요. KB국민은행 ESG 임팩트 사업으로 선정돼 2023년 2월부터 4월까지 양성 과정을 운영했고 10명이 교육을 받았어요. 뇌전증 환자나 가족뿐 아니라 예술 치료, 공동체 활동을 통한 치유에 관심 있는 사람 등도 참여했어요. 뇌전증에 대한 이해, 캠페인 기획 사례 등을 배우고 각 지역에서 두 차례 실제로 모임을 만들어 봐요. 2기는 제약회사 한국에자이 기업혁신 프로젝트에 선정돼 올해 4월부터 12월까지 했어요. 광주, 창원, 부산, 서울, 수원 등에서 10여명 퍼플라이저들이 뇌전증 인식 개선 활동을 시작했어요.

불안에 예방책은 느슨한 연대

-왜 커뮤니티 케어라고 했나요?

‘따뜻한 시선’에 여러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불안이 비단 뇌전증 환자만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뇌전증 환자들이 특히 심하다뿐이지 청년들이 기본적으로 불안, 우울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너무 아는 게 많아서 아무 것도 못하는 불안이라고 할까요. ‘내가 이걸 하면 이렇게 될테니까 안 되겠다’ 이런 식으로요. 시도를 못 하니 자책은 더 커지고요. 최소의 인풋으로 최대한의 아웃풋을 내야 살아남는 세상이잖아요. 실패하면 기댈 데가 없고요. 사실 ‘커뮤니티 케어’는 중복이에요. 커뮤니티 안에 ‘서로 책임지고 선물을 준다’는 뜻이 들어있다고 해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모임, 문턱이 낮고 느슨한 공동체가 불안을 줄여주죠.

(참고: 심재신 대표가 쓴 동화 <안개를 걷는 아이> 이야기입니다. 이 마을은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어요. 어느 날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병이 있는 아이가 햇살을 찾아 나섭니다. 안개 속에서 출근하다 길을 잃은 청년이 아이의 어깨에 두 손을 얹습니다. 그 청년의 어깨에 딸을 잃어 불안한 아주머니가 두 손을 얹습니다. 이들은 함께 안개를 헤쳐갑니다. 아이는 햇살이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돼요. 심재신 대표는 그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어줄 사람들을 연결해 가고 있습니다.)

-올해 ‘뇌전증 환우모임 따뜻한 시선’에서 ‘내마음은콩밭 협동조합’으로 옮기신 이유는요?

‘퍼플라이저’의 규모와 범위를 더 넓히고 싶었어요. ‘퍼플라이저’ 커리큘럼을 체계화하고 장기적으로 자격증까지 발급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활동가를 지원하고요. 뇌전증을 정확히 이해하는 그룹을 늘려가는 거죠. 커뮤니티를 만들고 운영하려면 돈이 들어요. 지속가능하려면 비즈니스로 연결해야 하는데 지역에선 좀 어려워요. 불안은 점점 커지고 예방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느는 것 같은데 지역 커뮤니티 활성화 관련 정부 지원은 계속 줄고 있어요.

기업 등 여러 창구를 두드리며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야 해요. 뇌전증 환우모임 따뜻한 시선의 모단체인 비영리민간단체 ‘별을 만드는 사람들’은 위기 청소년 지원이 핵심 사업이라 뇌전증 인식 개선 활동에 방점을 두긴 어려웠어요. ‘내마음은콩밭’은 2014년부터 경북대 서문 골목 축제를 기획하는 등 커뮤니티 디자인 사업을 해왔는데, 뇌전증 인식 개선 활동의 ‘커뮤니티 케어’ 성격을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뇌전증 환자 당사자가 그리는 ‘뇌전증 리빙랩’

-퍼플라이저 이외에 계획은요?

‘뇌전증 생활실험실(리빙랩)’도 구상 중이에요. 뇌전증 환자들이 겪는 문제는 당사자들이 가장 잘 알죠. 그런 점에서 생활전문가라고 볼 수 있어요. 그분들이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여러 사람들을 연결해 함께 푸는 실험이에요. 예를 들어 당사자와 설문조사 전문가, 앱 개발자 등이 모이는 거죠. 기업 매뉴얼도 필요해요. 뇌전증 환자들은 취업이 어렵거든요. 생계 유지가 힘들고 고립되기 쉬워요. 많은 뇌전증 환자들이 뇌전증이 아니라 자살로 숨지는 이유에요. 발작이 일어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뇌전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등을 담은 매뉴얼을 만들고 기업에 인식 개선 교육을 하는 게 필요해요. 확실히 알면 안 무섭거든요.

사실 인식 개선에 제일 효과적인 건 콘텐츠에요. 저희가 우화 전시회, 유튜브 콘텐츠 같은 걸 계속 만들어온 이유에요. 뇌전증 인식 개선 교육할 때 제일 많이 보여주는 영상이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에요. 드라마 속 뇌전증을 앓는 반장이 발작을 하는데 주인공 덕선이가 잘 대처하거든요. 저희는 ‘3S’라고 불러요. ‘Side, Stay, Safe’죠. 고개 돌리고 주변에 위험한 거 치우고 곁에 있어 주는 거예요. 2~3분 넘게 발작이 지속되면 구급차 부르고요. 의식 잃었다고 심폐소생술(CPR)하면 안돼요. 이번 사회적 가치 투자(SIR) 대회에서 뇌전증 인식 개선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요.

– 인터뷰 및 정리: 김소민 시민이음본부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