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없이 점프하는 자와 아이들이 자라는 나무

그는 뛰어내리는 사람입니다. 울산 울주군 상북면 소호리 소호분교에서 500년 된 느티나무를 본 2004년 1월, 김미진(53) 울산마을교육공동체거점센터 땡땡(oo)마을 운영실장은 도시에서 ‘뛰어내렸습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습니다. “이런 나무 그늘 아래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겠다 싶었어요.” 울산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보름 만에 폐가를 수리해 산골 소호마을로 이사 왔습니다.

6년 뒤엔 초등학교 교사라는 정규직에서도 뛰어내렸습니다. “뭣 모르고 하는 짓, 저는 그게 답인 거 같아요. 알면 못해.” (이렇게 멋진 사람이 기다리는데 중년에 접어든 몽덕 대장이 가을을 타는지 자꾸 태업하네요. 이번엔 꼬리명주나비 애벌레(활동명 꼬애)를 울산 지부장으로 선발해 일을 떠넘기고 가을 햇살이 내려앉은 베란다에 누워 일어날 생각을 안 합니다.)

▲경남 울주군 상북면 소호리 소호분교에 있는 500년 된 느티나무 앞에 선 김미진 울산마을교육공동체거점센터 땡땡센터 운영실장.

500년 된 느티나무 보고 소호마을로 ‘점프’

느티나무로 점프하고 18년 뒤, 2021년 11월 11일 그는 따뜻한 가래떡을 쥐고 있습니다. 아이들, 교육감, 주민 모두 빙 둘러 두 ‘다라이’ 길이 긴 가래떡을 함께 들었습니다. 코로나 탓에 개관식을 치르지 못한 땡땡마을의 첫 돌이었습니다. “보통 대표들만 가위로 리본을 자르잖아요. 둥글게 선 가래떡 커팅식에선 모두가 평등해요. 따뜻하고 바로 먹을 수 있고 쓰레기도 안 나와요.” 가래떡을 만들 쌀은 동네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았습니다.

▲2022년 11월 11일 땡땡마을 첫돌 기념 가래떡 커팅식

2016년 폐교한 궁근정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 연 땡땡마을은 이런 곳입니다. 운동장엔 각자 자기 뜻대로 가꾼 손바닥 정원이 모여 큰 정원을 이룹니다. 누구나 선생님이자 학생이 될 수 있습니다. 몸놀이터(요가), 흙놀이터(도예), 나무놀이터(목공), 요리놀이터 등이 평일엔 밤 9시까지 문을 엽니다. 아이들은 공짜, 어른은 재료비만 내면 돼요. 23살부터 73살까지 마을교사 33명 가운데 절반은 상북면 주민입니다.

지난달 26일 오전 ‘옛날옛적애(愛)교실’, 체크무늬 벙거지모자를 쓴 ‘할배쌤’ 성낙모 마을교사는 붓글씨를 연습했던 화선지를 재활용해 아이들과 제기를 만들었습니다. 아이들 재밌으라고 이 모자는 꼭 쓰고 옵니다. 가지산 쌀바위 전설 같은 얘기도 들려줍니다. “어느 날, 할배쌤 수업을 봤는데 뭉클한 거예요. ‘너는 이름이 뭐고?’ ‘그래 그 뜻이 뭐고?’ ‘진짜 좋은 이름이구나. 우주의 참 좋은 기운으로 네가 이렇게 왔구나. 그 기운이 네 이름에 다 담겨 있구나.’ 아이 한 명, 한 명 모두에게요.”

같은 시각 ‘할매쌤’ 이미해 마을교사는 아이들 대여섯 명과 깍두기를 버무렸습니다. 처음에 ‘할매쌤’은 “김치 담그는 걸로 어떻게 선생님이 되냐”며 안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아무한테나 하자고 안 합니다. 제가 지켜봤습니다.” ‘할매쌤’ ‘할배쌤’ 모두 김 실장이 꼬셨습니다. “다양한 세대가 마주치고 서로 묻고 가르쳐 주는 그 자체가 교육이죠.” 마을교사는 매년 1월에 뽑혀 2월에 기본 교육을 받습니다. 강사비는 시간당 4만원입니다. “큰 돈은 아니지만 시골에서 이 정도 고정 수입을 낼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든다는 게 귀했어요.”

▲울산마을교육공동체거점센터 땡땡마을 ‘할매쌤’ 이미해 마을교사가 아이들과 김치를 담그고 있다.

‘누구나 oo교실’을 열고 싶으면 그냥 손들면 됩니다. 한 초등학교 4학년과 6학년 여자 아이가 ‘음악 줄넘기 교실’을 열고 싶다고 했습니다. 단, 수강생이 자기보다 어렸으면 좋겠다는 조건을 달았어요. 수강생이 셋 이하면 폐강인데 1학년 2명, 3학년 2명 등 4명이 모였습니다. 진지했습니다. 이 수업은 시작하자마 실전입니다. 바로 줄넘기를 돌렸습니다.

“선생님의 자세가 돼 있더라고요. 둘이 옷도 맞춰 입고 준비를 많이 해왔더라고요. 잘하는 애한테 사탕도 탁 하나 주시고. 감동 받았어요.” 사실, 김 실장은 쉽게 감동합니다. 뜨개질 교실을 연 동네 언니가 코 하나 하나 손으로 그려 지도안을 만든 걸 보고 뭉클해 합니다. “감동이야. 감동.”

▲울산마을교육공동체거점센터 땡땡마을 ‘할배쌤’ 성낙모 마을교사가 아이들과 제기를 만들고 있다.

누구나 선생님이자 학생…반딧불이생태교실도

이곳엔 반딧불이, 꼬리명주나비가 살고 귀제비가 찾아옵니다. 창고를 개조한 반딧불이생태교실, 지난달 25일 오후, 김강수 마을교사(별빛반딧불이복원연구회 회장)가 대여섯개 수조에 사는 애반딧불이 애벌레를 보여줬습니다. “8000마리 있어요.” 작은 코딱지같은데 노란 티셔츠를 입은 그는 잘도 찾아냅니다.

6월 초여름 밤, 깜박깜박 빛을 내는 애반딧불이는 이제 자연 상태에선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애반딧불이 애벌레는 냇가 촉촉한 땅에 땅콩 모양 집을 짓고 그 안에서 변태하는데 그런 땅을 찾기 힘듭니다. 물길은 직선화되고 제방이 섰습니다. 애벌레는 다슬기를 독침으로 쏴 녹여 먹어요. 아기 애벌레는 작은 다슬기를 찾아야 합니다. 자연 상태에선 문제 없지만 이곳에선 김 마을교사가 일일이 다슬기를 쪼개 줍니다. 그러면 물이 쉽게 오염되니 수조 물을 계속 갈아줘야 해요.

이 생태교실에서 아이들은 애반딧불이의 생애를 관찰합니다. 애벌레를 채집해 땡땡마을 뒤 냇가로 돌려보내는데, 생존율은 3%대예요. 그러면서 태화강 상류 생태도 배워요. “6월에 애반딧불이 빛을 보고 아이들이 와~하죠.” 아이들은 봄에 쥐방울덩굴도 심습니다. 꼬리명주나비는 이 식물만 먹는데 이 덩굴도 사라져가고 있어요. 이 나비들은 식욕이 대단합니다. 토실토실한 꼬리명주나비 애벌레들(몽덕희망원정대 울산지부장)은 봄이 오면 호랑무늬 나비로 날아갈 겁니다.

“곤충 한 마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반딧불이가 얼마나 예쁜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끼면 함부로 대하지 못해요.”(김강수 마을교사)

땡땡마을은 인기가 있어요. 울산 여러 학교에서 찾아옵니다. 마을 사람들은 수시로 들르고요. 지난해 누적 방문객은 3만 명, 올해엔 9월 말까지 3만2000여명이에요. 2021년 국무조정실이 주관한 ‘생활 SOC 공모전’에서 대상도 받았습니다. 김 실장은 한 아이 말에 감동받았어요. “여기 오면 숨통이 트여요.”

2016년 궁근정초등학교가 85년 긴 역사를 끝내며 마지막 졸업식을 하던 날, 김미진 실장은 졸업식장 뒤쪽에서 울었습니다. “여기 졸업생이세요?” 아닙니다. “아이가 졸업하나요?” 아닙니다. 그는 이 초등학교와 아무 관계가 없지만, 또 관계가 있습니다. 상북면 주민이니까요. 상북면 3개 초등학교가 통폐합되는 데 그는 반대했습니다. “옛날엔 학교가 마을의 구심점이었거든요. 학교가 없으면 젊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로 오겠어요? 살던 사람들도 나가지요.” 궁근정초등학교는 폐교 뒤 2년간 다담은갤러리로 운영됐지만 마을과는 분리된 섬이었어요.

그사이 그를 비롯한 주민, 교사 등이 ‘상북마을교육공동체 판’을 꾸렸습니다. 상북중학교를 살리려고 모인 사람들이에요. 사립이었던 상북중은 당시 기피 학교였습니다. “농촌 교육은 보통 중학교부터 무너져요. ‘상북중 보내면 아 똥통 된다’고들 했어요. 여기 남는 아이들은 ‘루저’가 되는 건가요? 아이들 자존감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는 초등학교 6학년 학부모들을 만나 어떻게 하면 상북중에 보내겠냐고 물었어요. 토론회도 열었습니다. “좋은 학교 찾아가지 말고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더 좋은 학교 만들자고 의기투합한 거죠.” 2020년 상북중은 공립 혁신중학교가 됐어요. 아이들이 다시 늘었습니다.

▲반딧불이생태교실을 운영하는 김강수 마을교사.

폐교를 마을교육공동체 거점공간으로

‘폐교된 궁근정초등학교를 마을교육공동체 거점 공간으로 만들자.’ 고 노옥희 전 울산교육감과 ‘마을교육공동체 판’ 등 상북면 풀뿌리 활동의 뜻이 맞았습니다. 교육청이 추진 티에프(TF)를 꾸렸고 그가 팀장을 맡았습니다. 민과 관이 뭉쳐도 실현은 쉽지 않았어요. 시의회가 반대했습니다. “주민도 별로 없는 시골에 왜 이런 돈을 투자하냐는 거예요. 예산 낭비라고요.”

김 실장은 마을 사람들 서명을 끌어모아 의원실 문을 하나씩 두드렸습니다. “사람 없으니 투자 안 하고 투자 안 하니 사람 더 빠져나가고 악순환인데 그 고리를 끊어야죠. 안 그러면 시골은 골로 가요. 그 사람들 다 도시로 갈 텐데 거긴 또 사람이 너무 많아 문제잖아요.” 예산은 살아남았습니다. 개관준비추진단엔 청소년, 교사, 교육청, 주민 등이 들어왔습니다. “추진단에 들어온 아이들이 센터 이름에 ‘학교’가 안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별칭이 땡땡마을이 됐어요.”

땡땡마을이 문을 열기 10년 전인 2010년 그는 교직을 떠났습니다. “월급쟁이로 살지 않으면 굶어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소호마을에서 살다 보니 ‘어떻게든 살아지겠구나’ 싶었어요. 저는 행복한 선생님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행복한 교실을 이끌어갈 거라고. 그런데 학교 교육의 핵심 목표는 체제 순응형 인간을 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숨이 막히더라고요. 그냥 뛰어내린 거예요. 대책 없이.” 그해 그는 난생 첫 농사를 지었습니다. “사람 땀구멍에서 그렇게 땀을 흘릴 수 있다는 걸 보고 정말 놀랐어요.” 가지, 오이, 토마토, 고추를 심었는데 그 농사로 번 수익은 1만원입니다.

도시아이들의 ‘산촌 이모’

오이는 잘 못 길렀던 그는 아이는 잘 길렀습니다. 이듬해 도시 아이들의 ‘이모’가 됐어요. 소호마을 산촌유학프로그램에 참여해 도시 아이들 두세 명을 맡아 함께 살았습니다. “첫해엔 안 한다고 했어요. 교사는 오후 5시까지만 아이들 가르쳐도 힘든데 어떻게 같이 사냐고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저게 교육이구나 싶은 거예요. 사람과 사람, 삶과 삶이 만나더라고요. ‘사회적 가족’이 되는 거예요. ‘이모’를 도와 농사도 짓고 친구랑 여행도 가고.”

산촌유학을 시작할 때만 해도 뒷말이 많았습니다. 토박이 주민들은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고요. “지금은 ‘느그들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알겠다’고 하세요.” 소호분교는 폐교 위기를 면했고 소호마을 인구가 늘었습니다. 이제 그는 산촌유학 ‘이모’는 아니지만 한 장면은 잊지 못합니다. “한여름이었어요, 도시 집으로 돌아갔던 아이들이 기차, 버스 타고 산골마을까지 저희들끼리 왔어요. 시장에서 산 복숭아를 검은 비닐봉지에 들고 ‘이모~’ 하면서요.” 산촌유학 ‘이모’로 주민들을 모아 아이들과 프로그램도 짜면서 마을공동체에 대한 관심도 커졌습니다.

2010년 학교를 떠난 건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들도 학교를 떠났어요. “‘학교를 꼭 안 가도 되면 나는 안 가도 될 거 같아’ 그래요. 그러라고 했죠. 욕 많이 먹었어요. 부모는 대학 나와놓고 아이들한테는 기회 안 준다고요. 그런데 저는 자신 있었어요. 제 기준은 ‘얘가 제 앞가림을 하겠냐’는 거였어요. 하겠더라고요.” 아들은 4년 동안 홈스쿨링이 아니라 “마을뒹굴링”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마을에서 뒹굴었어요. 소호마을에서 학교 안 간 친구 5명과 배추 농사를 지어 팔고 록밴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대안학교에 가겠다고 했어요. “대안학교 다니면서 책, 영화 보고 뭘 막 쓰더라고요. 그 글 보고 놀랐어요. 얘가 학교 안 다닌 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괜찮은 글이었어요.”

첫째와 달리 둘째 딸은 학교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오빠 보니, 학교 안 가고 농사짓는 게 더 힘든 거 같다더라고요.” 중학교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 고등학교 때 자퇴했습니다. 딸은 양산 여행학교에 들어갔어요. 학비는 당시 제주도에서 일하던 오빠가 댔습니다. “딸은 어린 시절 ‘도시에서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거든요. 진짜 작사 작곡까지 해서 불렀어요. 거지꼴을 하고 세계 반대편까지 가보더니 시골에서 소박하게 사는 게 중요한 가치라는 걸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이제 27살인 아들은 소호마을에서 공방을 하고 제빵을 배운 딸은 산청 공동체 마을 ‘큰들’로 갔습니다.

“아이들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요. 학교 안 간 거 후회한 적 없냐고 아들한테 물으니 그런 생각 안 해봤데요. 경쟁하지 않고 자란 아이들은 두려움, 불안이 없어요. 당연히 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물어요. 당신 아이들은 학교를 안 다녀 행복하냐고요. 저는 그게 폭력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학교에 다녀도 안 다녀도 나름의 어려움과 행복이 있잖아요. 그런데 학교 안 다닌 사람한테는 꼭 그렇게 묻더라고요.”

▲ 땡땡마을 흙놀이터에서 한 아이가 빚은 ‘쉬는 사람’

그의 대책없는 점프는 계속된다

땡땡마을은 학교 건물인데도 가래떡처럼 포근한 공기가 있습니다. 한 귀퉁이엔 흙놀이터에서 한 아이가 만든 누워 있는 사람이 있어요. 한쪽 다리를 꼬고 싱긋 웃고 있습니다. 다른 귀퉁이엔 상북면 어린이들이 보낸 감사 편지가 있어요. 주민들이 상북면 어린이 333명 모두에게, 한 명씩 다 다른 이야기를 써서 다육이와 함께 선물하고 받은 편지입니다.

내년 2월 그는 이곳에서 ‘뛰어내리려’ 합니다. 운영실장을 그만두려 합니다. “제 역량이 다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이 새롭게 꾸려갈 수 있는 기회를 줘야죠. 그래야 여기가 더 풍성해져요. 저는 다시 0부터 시작하면 돼요. 마을교사들이 깊이 그리고 넓게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마을교사 정체성을 쭉 이어갈 수 있는 분들도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도 열리길 바라요. 모순처럼 보이지만 마을이라면 풀 수 있어요. 교육감이나 의회가 바뀌더라도, 어떤 태풍이 와도 마을교사들이 땡땡마을을 지탱할 수 있는 근력이 됐으면 좋겠어요. 저는 변방에 희망이 있다고 믿어요. 새로운 바람, 어떤 힘이 나와요. 변방 사람들은 절실하니까요.”

인디언수니의 노래 ‘나무의 꿈’은 그의 ‘최애곡’입니다. 그는 언젠가 한 사람이 한 소절씩 이어 불러 합창해보고 싶답니다. “나무 한 그루 되고 싶었지/아름드리 어엿한 나무가/만개한 꽃처럼 날개처럼/너를 품고 너희들 품고/여우비 그치고 눈썹달 뜬 밤/가지 끝 열어 어린 새에게/ 밤하늘을 보여주고/북두칠성 고래별 자리/나무 끝에 쉬어 가곤 했지.” 그는 땡땡마을이 그 나무라고 했고요, 저는 그가 그 나무 같았습니다.

▲ 차기 지부장 훈련 중인 몽덕이. 몽덕이는 다음 편에서 만나요.

– 글: 김소민 시민이음본부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