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할머니집 ‘화인당’을 출산했습니다”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

그는 자신을 껴안으려 강원도 고성에 왔습니다. 희망원정대 몽덕 대장과 유일한 대원은 그를 알고 싶어 고성으로 달려왔습니다.
호수 송지호에서 500m쯤 가면 나오는 왕곡마을엔 150여 년 된 전통가옥 50여 가구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북방식 전통가옥이 모인 곳이에요. 이 중 마당에 접시꽃 흐드러진 방 두 개짜리 한옥이 ‘화인당’ 게스트하우스입니다. ‘곡식을 나눠 먹는 사이 좋은 인연으로 가득한 곳.’ 김다인(40) 씨가 외할머니 집에 붙인 이름입니다. 이 한옥마을로 들어서자온갖 꽃향기에 혼미했는지 몽덕 대장 분홍 혀가 쏙 빠졌습니다. 이 마당, 저 마당 다 들여다보며 온 동네를 휘졌고 다닙니다. 그런데 뭐라는 사람이 하나 없네요. 마당에 누워있던 고양이들만 등을 산처럼 부풀리고 몽덕 대장을 경계하더니 도망갑니다.

할머니집을 혼자 리모델링해 게스트하우스를 연 김다인씨

“접시꽃에 벌이 들어가면 할머니가 꽃잎을 딱 모아 묶어요. 제가 그걸 빙빙 돌리며 놀았어요. 벌이 앵앵거리다 약간 기절하면 놔주고요. 그렇게 재밌었는데 지금 보니 곤충 학대네요.” 설탕에 재워놓은 딸기의 맛, 고향의 전설을 들려주던 할머니 목소리, 떠나는 다인 씨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할머니 얼굴…. 농사일로 부모님은 바빴습니다. 이 작은 한옥에 다인씨의 그 모든 어린 시절 기억이 스몄습니다. 1999년 할머니가 숨지고 이 집도 허물어져갔어요. 이제 할머니가 좋아하던 접시꽃은 다인 씨 정성에 다시 만발합니다.

다인 씨와 부모님 모두 이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작은상나말집’ 둘째 딸과 ‘큰백촌집’ 둘째 아들이 결혼해 딸 넷을 낳았어요. 막내인 그를 동네 사람들은 ‘갓난아기’의 방언인 ‘햇아’라 불렀습니다. 고등학교는 속초에서 자취하며 다닌 ‘햇아’는 더 멀리 떠나고 싶었습니다. “시골이, 한국이, 억압적인 분위기가 싫었어요. 외국에서 살고 싶었어요.” 서울에서 항공사 오퍼레이터, 영업, 마케팅 등을 맡아 10여 년 직장을 다닌 뒤 그는 외국계 기업에 취직해 그 꿈을 이뤘습니다. 체코 오스트라바에서 2년 살며 화물영업을 담당했어요. “유일한 한국인이었고 동유럽 5개 나라를 맡았어요. 한 달에 보름 이상 출장을 다녔어요. 치열하게 살았어요. 한국을 떠나면 좋을 줄 알았는데 현타가 오더라고요. 여기 회사에도 이권 다툼, 정치적 알력이 소용돌이쳤어요.”

그때 그는 할머니 집 마당이 그리웠습니다. 본질적인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왜 그렇게 떠나고 싶었나.’ “인정 욕구, 애정 결핍으로 점철된 인생이더라고요. 그 결핍을 채우려고 ‘안 되는 건 되게 하라’는 신념으로 저랑 안 맞는 직장에 꾸역꾸역 다녔고, 이민 가서 살고 싶다고 했던 거더라고요. 사회적 인정으로 저를 채우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던 거 같아요. 저 자신과 화해부터 시작해야 했어요. 저를 만들어준 곳, 제 어린 시절 힐링 공간으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저를 지탱하는 힘의 원천으로요.”

2020년 그는 왕곡마을로 돌아왔습니다. 한옥은 사람을 닮았습니다. 온기가 끊기면 부스러져요. 할머니 집 흙벽은 무너지고 문짝은 휘었습니다. “우리 마을은 특별한 매력이 있는데 살리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어릴 때부터 언니들이랑 할머니 집에서 뭘 해보잔 얘긴 많이 했는데 엄두를 못 냈죠. 경제적 기회가 다 서울에 있으니까요.”

40일 동안 팝업 카페를 열어 수박주스와 옥수수를 팔았습니다. 천장에서 흙가루가 떨어졌지만, 손님 반응은 좋았어요. 그는 혼자 리모델링을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이 반대했어요. 동네에서 말 나온다고. 그래도 밀고 나갔죠. 저는 무모한 사람이니까요.”

1988년 왕곡마을이 전통건조물 보존지구로 선정돼 할머니 집도 1990년대 중반 ‘복원’됐습니다. 날림공사였어요. 구들에 건축폐기물을 쑤셔 넣고 미장해버렸습니다. 연기가 나가는 통로인 고래나 기단 돌을 빼돌렸어요. “전통가옥은 불을 때 습기를 제거해야 하는데 기름보일러로는 안 돼요. 온돌이 집 전체를 보호했던 거예요.” 빼간 기단은 회수하지 못했고 구들은 결국 고칠 수 없었습니다.

“제가 ‘화인당’을 출산했습니다.” 마루에 놓인 키에 작은 풋사과들이 놓여 있어요. 소반 위 화병엔 들꽃이 피었습니다.(몽덕 대장님, 그 들꽃을 먹지 마세요.) 화인당 로고까지 이 공간의 모든 구석구석이 바로 그입니다. 단열재를 넣고 핸디코트를 덧칠했어요. 예닐곱 겹 벽지를 뜯어내니 일제강점기 교과서가 나왔습니다. 외양간을 화장실로 고치고 입식 부엌을 설치하는 덴 강원도창조경제혁신센터 지원을 받았습니다. “천장 단열만 해도 서까래 모양에 따라 하나하나 잘라 붙여야 해요. 공정이 어마어마해요. 리모델링할 업체를 찾을 수 없었어요. 브랜딩 기획, 로고 디자인… 전부 다 제가 했어요. 그만두고 싶었던 적, 없었어요.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게 재밌어요. 제 창의력을 다 쏟아부었어요.”

바람과 햇볕을 들이고 정성을 들여 가꾸면 모든 한옥엔 각자의 표정이 돌아옵니다. 오랜만에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보고 많이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예전엔 다양한 사람들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싫고 좋은 게 분명했죠. 지금은 웬만하면 속상하지 않아요. 자신에게 더 집중하니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아요.” 자기가 만든 화인당 면티에 ‘몸뻬’ 바지를 입고 그는 온종일 바쁩니다. 아직 때때로 일하는 큰언니 아르바이트 임금 주기도 빠듯해요.

“역사를 담은 갤러리형 체험 스테이로 만들고 싶어요. 안방 안쪽 작은방은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공간, 옛날 곡식 창고였던 고방은 미니바로 꾸미고…. 옛 사진들로 이 공간의 변천사를 담고 싶어요. 한 개인, 마을, 지역의 성장소설 같은 공간으로 만들려고요. 외가는 그리움이잖아요. 언제나 날 환영해주는 곳, 어리광을 부리며 자신이어도 되는 뿌리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여기가 외가 같은 곳이 됐으면 좋겠어요. 예술가들은 결국 자기 얘기를 한다죠. 이 공간이 제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 마당에서 자기처럼 아이들이 뛰놀며 ‘작은상나말집’ 이야기를 보태가길 바랍니다. 멀리 돌아온 그의 에스엔에스(SNS) 아이디는 ‘햇아’입니다.


PS: ‘화인당’엔 반려동물도 묵을 수 있습니다. 몽덕 대장님은 이날 밤 늦도록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며 유일한 대원을 괴롭혔습니다.

글·사진 김소민 시민이음본부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