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시민 아이디어’의 힘

희망제작소는 2012년 한 해 동안 월간 도시문제(행정공제회 발행)와 함께 도시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다양한 정책 아이디어로 제시해보려고 합니다. 희망제작소 각 부서 연구원들이 매월 자신의 담당 분야와 관련된 다양한 아이디어를 풀어놓습니다.

풀뿌리자치의 근간은 시민 참여이다. 시민들이 자발적인 연대와 참여를 통해 지역을 스스로 일구어 나간다는 정신은 민주정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요건이다. 지방자치 20년을 거치면서 시민의식 또한 꾸준히 성장하면서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에 대한 관점이 분명한 성숙한 시민들이 시민사회를 채워나가고 있다. 소셜미디어의 등장과 발전은 ‘새로운 시민’들의 입장과 의견이 정확하고 빠르면서도, 광범위하게 공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서 시민의 연대와 참여를 강화시켜 나가고 있다. 민선5기 지방정부의 기조가 소통과 참여인 것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방자치의 영역은 이상이 아닌 현실이며, 담론이 아닌 생활과 직결되어 있다. 성숙한 시민주체의 등장과 민의를 읽고 이를 충실히 반영하려는 지방정부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의 발전이 가시화되었다거나 체감할 수 있는 상황이 적거나 더딘 것은 이 때문이다. 요컨대 참여와 소통이라는 명제를 실질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제도와 프로그램이 여전히 빈약하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연구와 투자가 보다 활발히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민의 작은 아이디어를 현실로

시민들이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길어 올린 작은 생각이나 아이디어들이 제안되어 숙성과정을 거쳐 정책으로 반영되거나 실현되는 일련의 프로세스가 ‘사회창안’ 이다. 희망제작소는 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는 사회창안운동을 벤치마킹하여 누구나 자신의 아이디어나 제도적 개선방안, 대안을 제시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창안프로세스를 우리사회에 도입했다. 유럽에서의 사회창안은 아이디어의 제안과 토론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지만 희망제작소의 사회창안프로세스는 아이디어를 정책화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프로세스를 설계하였다. 사회창안프로세스가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새로운 유형의 거버넌스를 만들어 내어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시민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전문가들에 의해 숙성되면 행정이나 입법, 관련 기업, 단체 등에서 이를 제도화 하거나 실행하는 협력 모델이다. 이 과정에서 언론 등은 해당 이슈를 캠페인화하여 여론을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까지 약 3천 6백 개의 시민 아이디어가 사회창안플랫폼에 의해 논의되었고 이중 130여 개의 아이디어들이 정책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아이디어가 현실화되거나 정책으로 이어진 것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지하철 손잡이 높낮이를 다양화’ 한 것이 있다. 성인 남성의 평균 키를 기준으로 손잡이 높이가 고정되어 있어 키가 그보다 작은 사람들이나, 어린 아이들, 노약자의 경우 위험하거나 불편한 상황이 초래되는 것을 방지하는 취지로 제안되었는데, 서울시와 서울메트로, 서울 지하철공사에서 개선안을 받아들여 지금은 서울의 어느 지하철을 타도 손잡이 높이가 다양화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지방정부의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현실화된 사례가 꽤 많다. 성인 여성의 경우 생리 주기 등으로 인해 수영장 이용을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요금을 다 내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서울과 울산의 경우 조례 개정 등을 통해 수영장 탄력적 이용 요금제 시행을 이끌어냈다. 그 밖에도 대중교통 버스를 탈 때, 빈 좌석이 없음을 알려주는 서비스를 해 달라는 제안도 수원시에서 시행 중에 있다. 행정상 주민등록번호 등록 오류를 수정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문제가 제기되어 일괄적으로 수정이 가능하도록 조치한 노원구의 사례와 식품 등의 유통기한표시를 눈에 잘 띄는 곳에 글씨를 키워서 표기하자는 제안도 관련 고시의 개정이 이루어진 사례이다. 이 밖에도 기업, 공공기관 등 함께 진행하여 현실화된 아이디어로는 ATM수수료 사전 고지, 이주민 여성을 위한 분유통에 다국어 설명 표기, 자동응답 ARS 서비스 개선 등의 사례가 있다.

이 사례들은 모두 시민들이 생활 속 경험을 통해 도출된 불만을 쌓아두거나 지나쳐버리지 않고, 시민사회를 위한 공익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아이디어로 전환되었고 그것이 현실화되어 구체적이고 친생활적인 정책으로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이렇게 현실화된 아이디어를 제안하거나 현실화되지는 못했지만, 현실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에 함께 참여한 제안자의 경우, 시민평가단이나 아이디어 프로모터로 활동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시민 역량을 길러나가는데도 일조를 하는 일종의 학습적 효과까지 거둘 수 있었다.

지방자치의 중심이 된 시민

희망제작소는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앞서 소개한 형태의 사회창안프로세스를 운영했다. 3년여의 활동의 결실로 평택, 고양, 익산, 목포 등에서 사회창안만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 설립되었고 국민제안제도에도 영향을 미쳐 서울시의 ‘천만상상오아시스’ 를 비롯하여 중앙이나 지방정부의 시민제안제도를 운영하고 활성화하는데 직간접적인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회창안프로세스는 여전히 ‘시민’을 단순히 아이디어 제공자로만 머물게 한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또한 지역사회에 보다 밀착된 변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정형화된 아이디어가 아닌 그 자체로 활동적이고 확장 가능한 아이디어들을 좀 더 발굴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희망제작소는 변화된 시대적 흐름과 성숙한 시민역량을 기반으로 하여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시민상’ 을 설정하고 이에 적합한 새로운 프로세스를 시작하였다.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특정 지역을 타깃으로 하여 일정기간 동안 지역 커뮤니티의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공모 받고 이 중 몇 개의 아이디어를 선정하여 제안자로 하여금 직접 실천하게 하는 것을 지원하는 것에 중점을 둔 사회창안 2.0 프로세스가 그것이다.

[##_Gallery|1121385060.jpg|수원시민창안대회|1392277343.jpg|부천시민창안대회|width=”350″ height=”300″_##]

새로운 프로세스는 현재까지 수원시와 부천시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의미 있는 성과들이 도출되어 앞으로의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수원지역 대학생들의 지역사회 밀착도를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재능벼룩시장’ 이 제안되고 실행되었는데, 수원지역 대학생들의 재능을 수원지역주민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중개하는 재능기부풀랫폼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기타 연주에 자신이 있는 대학생이 있다면 기타 연주를 배우고 싶어 하는 수원지역주민을 ‘재능벼룩시장’을 통해 연결해 주는 것이다. 재능벼룩시장에서는 시민들의 삶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여러 가지 재능들이 자유롭게 교환되고 기부되면서 지역 공동체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길거리 가림막이나 펜스에 글자를 조합할 수 있는 블록형태의 게시판을 만들어서 오가는 시민들의 대화를 유도하는 ‘알콩달콩메모판프로젝트’ 지역의 스토리를 발굴하고 퍼즐 조각으로 만들어 길을 따라 걸으면서 퍼즐 지도를 완성해 나가는 ‘현재와 과거를 잇는 이야기 지도’ 평범한 지역주민들이 만드는 팟 캐스트 ‘인문학 라디오’, 한 평의 공간을 도시형 퇴비장으로 만들어 환경도 보호하고 아파트 공동체도 활성화하는 ‘한평 퇴비장’ 프로젝트, 응급경증환자를 위한 ‘야간약국’ 프로젝트 등 사회창안 2.0 프로세스를 통해 시민들의 창의적이고 공익적인 제안들이 오가며 직접 실천되고 있다.

청년재능벼룩시장, 알콩달콩메모판프로젝트, 현재와 과거를 잇는 이야기 지도의 경우는 모델을 발전 시켜 최근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했다. 평범한 대학생, 주부, 직장인들이 자발적으로 지역사회의 활동가로 거듭나고 지역사회를 위한 단체를 설립하는 일들이 가능해지고 있는 것이다.

시민참여와 사회창안 그리고 지방자치

시민이 풀뿌리자치의 주역으로 서기 위해서는 시민참여라는 철학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과 지원 프로그램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시민들이 지역사회에 참여하고 주체로서 당당히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와 동기를 부여하고, 비슷한 관심을 가진 시민들을 묶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적절한 자원이 지원될 때 참여와 소통은 비로소 ‘시작’된다. 새로운 시대의 자치는 시민과 정부, 기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주체들이 서로 협력하여 기존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과제들에 대한 해법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통의 문제를 두고 여러 주체들이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협력하여 해법을 실험해 볼 수 있는 공공의 플랫폼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것이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사회창안이 시도되고 있는 이유, 세계 사회혁신의 흐름에서 사회창안이 주목 받고 있는 이유이다.

글_ 곽현지 (사회혁신센터 팀장 trust01@makehope.org

● 연재목록
1. ‘마음껏 걸을 권리’ 되찾으려면
2. 우리가 몰랐던 ‘마을’의 모습
3. 세상을 바꾸는 ‘시민 아이디어’의 힘

*본 글을 월간 도시문제 2012년 3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