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옻칠 종주국 자리 내줄 순 없지 않나

<박원순의 희망탐사 6>

김성수 관장(72)을 만나기 위해 국내에서 유일한 옻칠전문미술관으로 2006년 10월 개관 4개월째를 맞은 통영옻칠미술관을 찾았다. 백발이 성성한데도 불구하고 30대 청년처럼 활기 넘쳐 보이는 그보다 더욱 눈길을 끈 것은 화려하면서도 기품있게 옻칠을 한 공예품들이었다.

요즘은 보기 귀해졌지만 사실 조상들은 도료가 필요한 모든 재료에 옻칠을 사용했었다. 나무는 물론이고 가죽, 종이, 삼베 모시 등이 모두 옻칠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옻칠이 희귀해지고 여기에 작품성까지 더해지면서 옻칠공예는 ‘예술품’이 됐다. 옻칠은 건조와 칠을 반복하길 여러 차례 해 옷을 입히듯 한 겹, 두 겹 칠을 입히면 어느덧 보석 같은 빛에 중후한 깊이감까지 더해진다.
[##_1L|1399016220.jpg|width=”378″ height=”286″ alt=”?”|▲ 옻칠공예에 대한 열정이 옻칠보다 더 깊은 맛을 더하는 통영옻칠미술관 김성수 관장 .ⓒ희망제작소 _##]그러한 공예품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지난 해 6월 문을 연 국내 유일의 통영옻칠미술관이다. 제 1전시실에는 다양한 옻칠공예 현대미술작품 125종 153점을 전시하고 있으며 제 2전시실에는 옻칠장신구와 액세서리. 식탁용기 등 현대생활 예술작품 등이 있다. 옻칠로 표현한 회화작품 전시회와 옻칠을 주재료로 한 기획전 및 특별전은 제 3전시실에서 열린다. 화려함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옻칠이지만 옻칠의 매력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자연친화적인 천연도료로 인체에 무해하고 무공해의 장식성과 조각미까지 더 한다.

흔한 듯하나 귀하고, 화려한 듯하나 중후한 옻칠의 매력은 허연 백발에도 젊음이 여기저기 묻어났으며, 서글서글한 얼굴이지만 눈빛은 살아 있는 김성수 관장을 닮았다. 김 관장은 옻칠과 나전칠기 등 전통공예의 고장인 통영에서 나고 자랐다. 통영은 통제영 12공방이 있던 곳으로 통영갓, 통영소목, 통영나전칠기, 통영미선 등의 제작지였으며 근세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공예명품 산지로 입지를 굳혀 온 곳. 시집 갈 때 혼수로 통영소목이나 나전칠기 장롱 등을 장만하느냐, 마느냐가 부의 척도가 됐을 만큼 통영은 도시이름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전통공예 브랜드였다.

김 관장, 전통공예에 빠지다[##_1L|1197666008.jpg|width=”287″ height=”391″ alt=”?”|▲ 통영옻칠미술관에 전시된 옻칠공예품들. ⓒ희망제작소 _##]그런 통영에서 김 관장은 그의 나이 열여섯이던 6ㆍ25전쟁기에 처음으로 ‘칠기’를 접했다. 사람 목숨 오가는 전쟁통이었지만 오히려 전쟁 시기였기에 피난 나온 유명한 칠기 전문 교수들이 세운 학교에서 옻칠기와 나전칠기 등의 전통공예를 배울 수 있었다.

“여기서 나고 자랐으니 어려서부터 전통공예를 쉽게 접할 수 있었지요. 6.25 당시 이승만 정부가 부산에 피난 와 있을 때 통영에 경남도립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가 들어섰어요. 통영에 칠기양성소가 세워진 배경은 전쟁으로 정치·경제·문화가 마비되면서 전통문화라도 보존하자는 예술가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 양성소에 입학해 피난 온 유명한 교수들로부터 기술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졸업 후인 1956년부터 62년까지는 그곳에서 나전기법과 옻칠기법 등을 가르쳤다. 그 후 체계적인 공부를 위해 상경했는데 상경 첫해인 1963년 처음으로 제 12회 국전에 참가해 참가 첫 해에 바로 최고상을 수상했다. 당시로서는 문교부장관상이었는데 사람들은 당시 수상자가 누구인지도 모를 만큼 그는 무명이었다. 스스로도 어리둥절했다. 당시 수상 작품은 옻칠미술관에 전시되어 여전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그 후 연 4회 내리 특선을 했는데 그 덕에 홍익대와 숙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창작활동도 계속할 수 있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그는 우리의 전통공예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도 도맡아 했다. 1973~75년에는 튀니지에서 칠공예를 전수했으며 프랑스로 넘어가 창작활동을 계속했다. 1990년에는 옻칠을 주재료로 하는 칠공예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옻칠조형예술가 모임인 한국칠예가회를 창립, 초대 회장을 맡았다. 1998년에는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큰딸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옻칠화(Ott Painting) 연구에 전념했다. 옻칠화는 그가 만들어낸 명칭으로, 한미(韓美)간의 문화차이로 옻은 곧 래커(Lacquer)로 불렸다. 하지만 천연도료인 옻과 합성도료인 래커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옻의 격하를 의미한 일이었기에 그는 옻칠화를 널리 알리며 지난 2002~2003년에는 LA 등에서 한국현대옻칠화전을 열기도 했다.

고향에 살어리랏다

튀지니와 프랑스에서 옻칠공예를 전수하고 미국에서 창작활동을 펼쳐나가던 그는 2004년 귀국해 고향인 통영으로 왔다. 당시 잠시 귀국해 예술의전당에서 옻칠전시회를 펼쳤는데 통영시장이 고향에 돌아와서 살지 않겠냐 물었다. 마음이 움직였다.

김 관장은 “통영에서는 지역축제로 한산대첩 축제를 하고 있는데 부대행사였던 나전칠기 전시회가 부실해 없어졌다는 말이 계속 신경 쓰이더군요. 전통공예의 본산지였고 하나의 브랜드였던 통영의 전통공예의 맥이 끊기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됐어요. 그래서 내가 통영에 가면 좀 자극이 되지 않을까 계속 고민하게 됐습니다”라고 당시를 설명했다.

통영이 다시 전통공예의 고장이 되는 데 힘을 보태고자 귀향을 결정한 그가 고향에서 전통공예의 꽃을 피우기 위한 고민에 들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정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털어 옻칠전통미술관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장 어떻게 나전칠기 고장인 통영의 미래를 밝힐 수 있을지 앞이 캄캄하더군요. 사회교육 차원에서 가장 좋은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감상할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가르칠 수 있고 살 수 있는 곳, 바로 미술관이었습니다. 국가가 공인하는 미술관이 되는 곳을 만들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국가가 공인하는 미술관이 되기 위해서는 100점 이상의 작품을 미술관에 소장해야 한다. 기준을 넘는 작품들을 소장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작품을 소장하기 위해 최소한의 터를 잡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 등에 당연히 봉착했다. 김 관장은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교직생활에서 얻은 퇴직금, 가진 모든 자산을 모두 모아 딸 소유의 땅에 일부를 더 샀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지원은 없었다. 진입도로를 만드는 일에 통영시가 힘을 보탰을 뿐이다.

김 관장은 “미술관을 짓기 위해 여러 곳에 실사를 다녔죠. 그런데 너무 정부의존도가 높더군요. 그게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아무데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귀향을 독려했던 시청에도 알리지 않고 시작했지요”라고 말했다.

실사를 다니는 과정에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지어놓고서는 엉터리 작품으로 전시관을 채우거나 영리적인 목적을 가지고 다른 부대시설을 짓는 등의 경우를 목격했다. 지목을 변경해 땅값을 올리는 경우도 있었기에 그는 더더욱 제대로 된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미술관, 사회교육에 주력하다

“미술관은 일반인들이 더욱 많이 작품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게 목적이지요. 하지만 통영옻칠미술관은 여기에 더해 사람들을 가르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전칠기와 옻칠의 본고장이면서도 정작 통영에 작업 작가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두다가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김성수 관장은 그래서 더욱 후배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한 사람이 만드는 작품을 가지고 어떻게 상품화하며 창작활동을 할 수 있겠는가. 외국에서 사들여 판다면 그건 더 이상 전통공예가 아닌 것이다.

“통영사람들 중에 애착을 가지고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통영에서 배워서 대학교수까지 되었으니 여기서 다시 제 모든 것을 쏟아 넣으려 합니다.”

미술관이 전시와 더불어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지금으로서는 학생들을 가르칠 공간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형편이다.

아직은 불완전한 미술관
[##_1C|1183611928.jpg|width=”392″ height=”290″ alt=”?”|▲ 붉은 색이 수수한 듯 화려한 옻칠공예품들이 가득한 통영옻칠미술관 전시장. ⓒ희망제작소 _##] 지난 해 6월 문을 열었으니 개관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창창한 통영옻칠미술관이다. 하지만 아직은 두 발로 걷기 힘에 부치다.

“여기에서 어쩌다 작품을 팔더라도 물건 값도 안 나옵니다. 그나마도 운영비 충당도 못하는 수준이에요. 현대미술관과 정부가 몇 점씩 사주어 운영비로 쓰고 있습니다.”

통영옻칠미술관은 증축계획을 세워둔 상태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제대로 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넓은 강당도 만들어야 하고 제작 프로세스를 영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공간도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금이 필요하다.

“당장으로서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술관의 목적은 말씀드렸듯 후학을 양성하는 것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역할을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로또복권기금이 있어 한국박물관미술관협회를 통해 기획전을 지원받기도 하고 도록이나 화집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곳은 아직 개관 1년이 되지 못해서 지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김 관장은 개인전이라도 해서 작품을 팔아 미술관에 투자하려 한다. 올 상반기까지 옻칠이색전 등을 기획하고 있다. 가구는 ‘정이 가는 가구’, ‘따뜻한 가구’ 등의 이름으로 전시회를 기획하고 있다. 여기에 초대전도 준비하고 있다. 계획은 많지만, 혼자하려니 가끔은 힘에 부치기도 하다고 고백하지만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지역의 희망을 본다.

면담장소 – 경남 통영시 용남면 화삼리 658번지 통영옻칠미술관
면담일시 – 2006년 10월 13일 오후 5시
면담인사 – 김성수(관장.칠예가.전 숙명여대 교수)

옻칠예술, 옻칠산업의 미래와 전망
-옻칠과 나전칠기의 현대화와 예술화, 산업화가 필요하다[##_1L|1286276868.jpg|width=”290″ height=”390″ alt=”?”|▲서글서글한 눈매의 김성수 관장은 그러나 옻칠공예에 대해 말할 때는 힘이 넘친다. ⓒ희망제작소 _##] “자개와 옻칠이 결합해 만들어내는 나전칠기의 발원지가 우리나라예요. 특히 지역적으로는 기원전 3세기 경상도인데 이를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럼 답은 훤하지 않습니까. 지역적 특색과 전통, 예술적 가치가 맞물려서 옻칠공예는 통영, 더 나아가 한국을 새롭게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새삼 김 관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옻칠공예에 대한 그의 자부심이 가득 녹아 있다. 김 관장은 전통문화를 지킨다는 차원을 넘어 옻칠공예의 경제적 가치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 관장은 “옻칠공예는 독특한 우리만의 미(美)를 가지고 있어요. 옻칠에는 살균효과가 있으면서도 인체에는 해가 없어 식기나 찻잔 등 생활공예품으로 상품화 가능성이 매우 크지요. 무한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예술적으로는 옻페인팅 작가들을 키우고, 산업적으로는 악세사리를 개발 발전시키고 시장성이 있는 가구 디자인을 개발한다면 옻칠공예 시장의 파이가 커질 것이라는 계산이다. 여기에는 옻칠의 매력이 톡톡히 작용한다. 옻칠은 뛰어난 광채, 장식성, 조각미를 갖추고 있다. 또한 어느 도료보다 광채가 뛰어나며 그 광채는 가공할수록 더한다. 또한 가식기법으로 자개나 옥, 진주를 붙일 수도 있고 채화를 할 수도 있다. 입체적인 조각미에서도 옻칠은 앞선다. 중국왕실에 품위를 더하는 데 큰 몫을 차지한 것도 옻칠공예였다. 서양에서는 옻나무가 없어 옻칠공예가 발전하지 못했으니 해외시장성까지 확보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꽃을 피운 옻칠공예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귀하게 다뤄지고 있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부터 지금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제도적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대학에 입학생이 없어도 폐과를 안 할 정도란다. ‘Japan’이라는 말 자체의 어원이’칠(漆)’라는 설도 있단다. 정부 차원의 관심이 필요한 대목이다.

김 관장은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국가간 문화상품의 경쟁은 품격 싸움이 될 것이며 따라서 우리도 숨겨진 전통문화를 잘 발굴해 부가가치 상품으로 개발하고 글로벌 시대에 대비한 세계화를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라고 주장한다.

칠순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김 관장. 2000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옻칠문화를 꽃피우겠다는 그의 열정이 현실이 되어 만개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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