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벌 비법, 나누니까 행복하쥬”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카메라를 들이대는 연신 눈앞의 벌들이 신경 쓰인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백 마리의 벌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벌이 주위에 있기만 해도 온몸이 얼어붙는 나로서는 종군 기자의 마음과 다를 바 없을 정도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광경이 내 앞에 펼쳐져 있다.

벌통을 한 손에 쥐고 서있는 청년. 그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벌에 둘러 쌓여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듯 그는 담담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다. 그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 역시 무덤덤한 표정은 마찬가지. 조용한 산 속의 새소리가 적막감을 더한다. 그러기를 잠시, 벌통을 쥔 청년이 입을 열자 사람들의 눈빛이 진지해진다.
[##_1C|1262595344.jpg|width=”570″ height=”380″ alt=”?”|김대립 청토청꿀 대표. _##]30대 청년의 토종벌 교육

이곳은 충청북도 청원의 한 야산. 청토청꿀 김대립 대표(35)의 토종벌 교육 현장이다. 토종벌을 키우고 있거나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이 그의 토종벌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였다. 올해 들어 4번째 열린 이날 교육에도 100여명의 사람들이 운집했다.

“토종벌 키우는 사람들이 전보다 많이 늘었어요. 하지만 아직 양봉처럼 체계화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토종벌 키우는 사람끼리 서로서로 노하우를 공유해야 되는데, 아직 폐쇄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립씨는 이들과는 생각이 달라요. 대립씨가 기술에 있어 국내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나누고 있습니다.”

귀농을 준비하고 있는 반종대씨가 김 대표 칭찬에 아낌이 없다. 하지만 토종벌 양봉업계에 대한 안타까움을 내비친다. 서양벌 양봉처럼 토종벌을 체계화하기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도 모자를 판에 서로 견제만 하니 답답하다는 것. 그래도 김 대표 같은 이들이 토종벌 농가 육성에 힘쓰니 고마울 따름이다.

실제 토종벌은 서양벌 양봉에 비해 한참 뒤쳐졌다. 토종벌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거의 없는 등 학문으로 체계화되지 못했고, 성분 분석조차 제대로 된 것이 없다. 또 공식적으로 토종꿀이란 표현을 쓸 수 없다. 식품의약품안전청 기준에 토종꿀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토종꿀이 서양벌이 모은 꿀과 똑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모인 이들 모두 토종꿀과 서양벌꿀은 엄연히 다르다는 데 한 목소리를 낸다. 토종꿀의 가격이 서양벌 양봉꿀에 비해 10배 가까이 비싼 것이 이를 반증한다는 것. 이는 서양벌에 비해 꿀이 나오는 양이 적기 때문인데, 비단 희소성만으로 이런 가격이 형성됐다고 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에 대해 김대표는 시루떡 같은 토종꿀의 힘이라고 해석한다.

“토종벌이 서양벌과 다른 점은 꿀의 성분에 있쥬. 서양벌은 대부분 하나의 꽃에서 꿀을 물어오는데, 토종벌은 달라유. 서양벌 보다 몸집은 쪼그만해도 멀리 날 수 있어서 다양한 꽃에서 꿀을 물어오는 거쥬. 그런데 나중에 채밀할 때가 되면, 그게 마치 시루떡처럼 층이 생겨유. 1년 동안 계절을 바꿔가며 산과 들을 넘어 다양한 꽃에서 꿀을 물어왔기 때문이에유”

[##_1C|1328716759.jpg|width=”570″ height=”380″ alt=”?”|토종벌 박사 김대립 대표. 그에게 토종벌은 친구이자 애인과 다름 없는 존재이다. _##]토종벌, 너는 내 운명

토종벌 얘기가 나오자 두 눈이 반짝이는 김 대표. 토종벌에 대한 애정이 가득 묻어 나온다. 그의 토종벌 사랑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토종벌을 자주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가 토종벌을 키웠고, 할아버지가 토종벌을 키웠다. 자연스레 토종벌에 익숙한 환경에서 자랐고, 지금의 김 대표를 만들어 준 밑거름이 됐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은 속리산 줄기를 타고 이어진 오봉산 자락에 있다. 깊은 산 속 이기에 인적이 뜸했고, 그의 가족 외에는 사람 구경하기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가 만난 첫 손님이 토종벌이었고, 함께 놀아준 유일한 동무가 토종벌이었다. 학교에 들어가서야 자기 또래의 친구를 만날 수 있었을 정도니, 이런 표현이 지나치니 않을 정도다.

토종벌을 친구처럼 여긴 김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토종벌을 키웠다. 아들이 토종벌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안 아버지가 그에게 벌통 하나를 내어준 것. 뛸 듯이 기뻤던 김 대표. 그에게는 마치 또래 아이들이 애완동물 키우는 것과 다름 없이 느껴졌다. 이때부터 토종벌과 김 대표의 길고 긴 인연이 시작된다.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시작된 토종벌 사육은 학창 시절 내내 계속됐다. 일어나서 벌의 안부를 묻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벌통 관리하는 게 일상이었다. 이렇게 9년이 지나고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엔 토종벌 키우는 실력이 제법 늘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아예 학교 옥상에 벌통을 가져다 놓고 토종벌을 키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김 대표가 키우는 벌통에서 상당한 양의 꿀이 모였다. 이를 어찌 처리할까 고민하다 그는 판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를 위해 사업자 등록을 내고 신문에 광고까지 냈다. 세상 물정 모르는 20살 청년의 치기 어린 행동으로 보였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품질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기 때문에 확신이 있었다.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여기저기서 주문이 쇄도했고, 1년 후에는 자동차 한대를 마련할 정도로 돈을 벌었다. 대학 입학까지 미루고 토종꿀 사업에 매달린 성과다. ‘석꿀’이란 브랜드로 내놓은 그의 토종꿀 인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청원군 지역특산품에 선정돼 ‘청꿀’로 이름을 바꿨고, 양봉장의 규모가 확대돼 벌통이 1천여 개로 늘어날 정도가 됐다.

[##_1C|1084069137.jpg|width=”570″ height=”381″ alt=”?”|1년에 딱 한번만 채밀하는 토종꿀, 청토청꿀. 일반 벌꿀에 비해 10배 이상의 가격으로 팔린다._##]인공 분봉 성공으로 토종벌 양봉 현대화

그의 명성은 단순히 돈만 버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토종꿀 양봉업계의 질적 도약을 이끌었다. 업계의 숙원이라 할 수 있는 인공 분봉에 성공한 것.

5~6월이 되면 여왕벌이 벌통 안의 벌들 중 절반 가까이를 데리고 자연으로 도망가는데, 이를 자연 분봉이라 한다. 벌의 수가 줄어들면 벌통에 모이는 꿀도 자연히 줄어들게 되고, 이는 양봉 업자들의 큰 손실로 이어진다. 그런데 김 대표는 누구도 하지 못한 인공 분봉에 성공했다. 그것도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자기의 노하우를 세상과 나누고 있다. 2000년에 언론에 알려진 그의 인공 분봉 비법이 입소문을 타고 여기저기 알려졌다.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는 그들을 뿌리치지 않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전국 방방 곳곳에서 강연을 시작했다. 홈페이지도 만들어서 그의 비법 전부를 공개했다. 2003년부터는 현장 교육을 실시 중이다.

“토종벌 양봉은 아직 무엇 하나 체계적이지 못해유. 그저 저를 통해서 토종벌 양봉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체계적으로 자리 잡게 된다면 그저 기쁠 뿐이쥬. 그리고 이런 활동을 통해 토종벌을 키우는 양봉 업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을텐디… 앞으로 서로서로 자신만의 정보를 공유했으면 더 좋겠시유.”

나누는 삶이 그저 기쁜 토종벌 전도사. 이러한 그의 나눔 실천에 세상이 화답했다. 신지식인농업인상, 신지식인상(행정자치부), 청원군민대상, 충청북도지사 표창, 대한삼락회 표창, 바이오농업대상(충청북도) 등 한마디로 상복이 터진 것.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이 잘 해서 받은 게 아니라며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_1C|1138412418.jpg|width=”570″ height=”380″ alt=”?”|김대립 청토청꿀 대표. 그를 찾아온 이에게 비법을 전수 중이다._##]농가소득 올리는 곱셈농법

성공가도만 달렸을 것 같은 그의 삶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인공 분봉을 성공하기 위해 수도 없이 실패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보온 벌통을 개발하기 위해 벌통 50개를 잃은 적도 있다. 또 아카시아나무에 병충해가 들면서 벌통 2천여 개를 손해 보기도 했다. 벌통 하나에 40만원의 수익을 올리니, 총 8억여 원의 손해를 입은 것.

그래도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힘들고 괴로울 때 그의 오랜 동무인 토종벌만을 생각했고, 그러한 의지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아픔을 딛고 일어선 김 대표는 벌에 대한 관심을 농민들의 삶으로 확장했다. 토종벌 농가만 잘 사는 게 아니라, 주변 농가도 다 같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이를 곱셈농법이라 말한다.

“벌들에게 필요한 건 들판에 가득 핀 꽃이구요, 농민들에게 필요한 건 안정적인 소득이에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한 것이 바로 곱셈농법이쥬. 주위 농민들을 설득해 메밀과 복분자, 해바라기 등을 심었시유. 벌들이 아주 횡재한 거쥬.(웃음)”

그의 말처럼 벌들만 횡재한 것은 아니었다. 최근 몇 년 복분자 값이 크게 오르면서 농민들은 그야 말로 대박을 쳤다. 메밀도 짭짤한 소득을 올렸고, 해바라기도 고부가가치가 기대된다. 물론 무책임한 권유는 아니었다. 애초에 판로 확보를 그가 책임진 것. 해바라기의 경우, 이미 각종 인터넷 쇼핑몰과 홈쇼핑 등 해바라기 상품의 판로를 만들어 놓은 상태다.

욕심 많은 그는 이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려 한다. 김 대표와 뜻을 함께 한 농가들이 늘어나자 곳곳에 조성된 밀원을 체험마을로 조성하려는 것. 끝없이 펼쳐진 꽃의 아름다움과 토종꿀 맛의 즐거움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체험마을이 그가 꿈꾸는 고향의 모습이다. 앞으로 2년. 활짝 핀 해바라기와 메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_1L|1407879590.jpg|width=”85″ height=”85″ alt=”?”|_##]노준형은 전공이 뭐냐고 물어볼 때가 제일 난감하다. 전자공학과 글쓰기의 상관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회로설계(Circuit Design)와 글쓰기의 원리는 동일하다고 종종 주장한다. 몇 차례 취재기자를 꿈꾸며 <코리아포커스>, <아시아경제 브이에스뉴스> 등에서 짧게나마 기자생활도 했으나 불가항력적 상황에 밀려 지금은 언론홍보대행사 커런트코리아에서 홍보AE로 일하고 있다. ‘노대리의 직딩일기’와 같은 자전적 에세이를 쓰고 싶지만, 잦은 야근에 치여 하루하루 꿈을 내일로 미루고 있다. 희망제작소의 소중한 부름을 받게 된 것에 감사하며 사는 소박한 직장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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