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울주군 소호마을의 유영순 씨
소나무가 뻗은 산길을 걷습니다. 지난달 21일, 울산 울주군 소호리 뒷산, 유영순(56) 씨와 박현이(58) 씨를 15명이 뒤따릅니다. 말없이. 인시눠소호공정여행에 온 사람들입니다. 영순과 현이 씨가 매일 새벽 6시 강아지 독도, 한라, 만보랑 오르는 길입니다.(이 삼견조가 소호지부장들입니다. 태업하는 몽덕 대장은 파면 위기) 7년 전 영순 씨는 괴로워서 이 길을 걸었습니다. 왜 관계는 기쁨이자 고통일까? 연대의 가치를 좇아 살았는데, 결실을 이뤘는데, 우리는 왜 서로를 찌를까? 그는 “당시 방향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울 정도”로.
1998년 영순 씨가 처음 이 마을에 정착했을 때 울주군 소호리에 100여 가구가 살았습니다. 지금은 세 배로 늘었어요. 울산이 고향인 그는 노동운동을 하며 나일론공장에서 5년간 일하고, 이후 진보정당에서 시민 글쓰기, 공부 모임 등을 이끌었습니다. “좋았어요. 가치와 제 삶이 일치했거든요.” 그러다 둘째 아이를 가졌습니다. “아이가 까다로워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었어요. 저는 아이 키우는 게 진짜 힘들었어요. 어느 날 소호마을 암자에 있는 선배를 만나러 왔다 그 앞뜰에서 쑥을 캤는데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4살, 2살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뛰어노는 거야.”
산촌유학, 야생초협동조합 다 성공했는데…
2010년 전교생 8명인 소호분교가 폐교 위기에 처하자 영순 씨와 남편 김수환 씨, 친구들이 산촌유학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애 키우는 게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도시 아이들 보니 너무 참혹하게 사는 거예요. 제가 이것보다는 잘 키울 수 있겠다 싶었어요.” 첫해 도시 아이 셋이 왔습니다. 마을에 아이들이 들어오고 학교가 살고 수입도 느는데 누가 반대할까 싶지만, 반대합니다.
먼저 마을 사람들. “소문이 많았어요. 정부 지원금을 자기들끼리 받아 간다거나 학원이라거나.” 이런 오해를 풀려고 아이들을 맡을 농가를 개발하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제기차기, 짚신 꼬기 등 마을이 함께 하는 프로그램들을 만들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고개 끄덕여 한숨 돌리나 싶으면 이제 학부모 차례입니다. 영순 씨의 교육 원칙은 확실했습니다. 자기 이익만 챙기는 “싸가지 없는 행동”만 혼냈고 나머진 자유입니다. 선생님한테 혼나는 거 스스로 감당할 수 있으면 숙제 안 해도 되지만 밥상은 같이 치워야 합니다. “공부를 더 시켜달라는 학부모 요구도 있었어요. 많이 싸웠어요.”
학부모가 끄덕이니 이제 선생님이 문제입니다. “3년마다 학교 선생님들이 바뀌어요. 첫해엔 환영했는데 이후엔 지역 아이들이 아닌 유학생은 인정 못하겠다는 선생님도 있었어요. 외부적 조건을 만드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설득, 할 수 없어요. 그냥 꾸준히 자기 일 하며 지역과 함께 할 고리를 만들어야 해요. 산촌유학 기반이 잡히는 데 4년이 걸렸어요.”
산촌유학은 성공했습니다. 소호분교 학생수는 이후 30명대를 유지합니다. 아이들을 따라 귀촌한 인구도 늘었습니다. 그를 ‘이모’라 불렀던 아이들은 어른이 돼 찾아옵니다. “‘이모’는 우리를 어른으로 대해줬어요.” 정부 지원을 받는 체험마을 사업을 시작하며 갈등은 다시 불거졌지만, 회의 체계를 세우면서 적어도 ‘공식적인 싸움’이 됐습니다. “서로 설명할 수 있는 공유 통로가 생긴 거죠.”
그래서 모두 행복했나? ‘설득’ 또는 ‘싸움’의 무한루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후배가 유방암에 걸려 소호마을로 요양 왔습니다. 그 친구에게 영순 씨는 “나랑 2년만 산으로 들로 다니자”고 했습니다. 야생꽃차 사업의 시작입니다. 야생쑥, 산뽕잎, 목련꽃, 생강나무꽃… 판로를 뚫었습니다. 꽤 돈을 벌었어요. 2013년 그를 포함한 8명이 야생꽃차협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다져놓은 노하우, 브랜드와 판로, 하다못해 포장지까지 있으니 곧장 행정안전부가 선정한 마을기업이 됐습니다. 공동체의 경제적 기반이 잡힌 거죠. 2015년엔 우수마을기업으로 뽑혔죠. 소호리는 마을 공동체의 성공 사례로 꼽혔습니다. “의미 있는 일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좀 먹고 살만 했으면, 좀 행복하고 서로 의지하며 사는 게 제 바람이었어요. 사는 얘기도 하고 자식도 같이 키우고 함께 늙어가는 따뜻한 친구가 되길 바랐어요. 마을 공동체 문화가 살아있는 모델을 보여주려고 시스템을 구축한 거예요. 그리고 어느 날 보니, 가능하지 않겠구나 싶은 거예요. 그게 저의 절망이었습니다.”
외부의 갈등이 잠잠해질 즈음 내부의 갈등이 터져 나왔습니다.
“저는 일을 벌여요. 사업비를 따면 협동조합 이익으로만 남기지 않고 마을 사업으로 넓혀요. 파이를 키우기 전에 탄탄하게 만들어가자는 쪽은 불만이죠. 분배의 문제가 터져요. 저는 ‘시골에서 도시처럼 살 수는 없다’고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자는 쪽이라면 ‘노력한 만큼 벌어야 한다, 이렇게는 아이 대학 보낼 수 없다’는 주장도 있죠. 그때는 반대 친구들이 ‘틀렸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보면, 장단점이 있는데 말이에요. 가치 지향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섬세하게 작은 걸 잘 다지지 못하는데, 반대 친구들은 또 그걸 잘하거든요. 산촌유학도 저 때랑 다른 방향으로 갔어요. 저는 ‘학부모가 소비자가 됐네’ 싶은데 부모님들 만족도는 더 높아졌죠.” 마을 규모가 커지면서 귀촌한 사람들끼리 반목이 생겼습니다. 마을의 시스템을 만든 1세대와 이후 들어온 2세대는 교육관도 달랐습니다. “1세대가 힘들게 만든 것들을 2세대는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죠. 세대 갈등인 셈이에요.”
왜 행복하지 않을까?.. 방황
어느 날, 그는 함께 해온 활동가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요.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의미 있는 삶을 이야기하는데 그런 삶은 대체 뭐지?” 그는 10년간 일궈온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마을을 떠났습니다. 마음과 함께 몸도 내려앉았습니다. 허리, 목 디스크가 왔어요. “길을 잃은 거죠. 어디로 가야 할지.” 2003년부터 그와 정토회 활동을 함께해온 현이 씨가 다짜고짜 따지지 않고 명상 프로그램을 신청해 보내줬습니다.
2017년 말부터 1년 그는 서울에서 보냈습니다. 명상, 불교 공부를 더 해보기로 했습니다. “소호에선 마음을 쉴 수가 없었어요. 가치 추구와 개인의 만족이 분리된 586의 삶은 끝장을 봤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뭐지?” 명상 공부하며 만난 선생님과 청년들이 협동조합을 만들고 싶다며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들과 1년 함께 살며 “재미있었다.” “평화롭고 자비롭게 천천히 가는 마음이 필요하겠구나, 그 마음이 없으면 자기도 남도 파괴하겠구나, 그랬죠.” 명상협동조합을 꾸려 모든 게 해결됐다면 그가 이후 소호마을 뒷산을 그리 매일 올랐겠습니까?
“대표가 협동조합 정신을 따르기보다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 하고, 티벳 불교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기복적으로 바뀌는 걸 보고 떠났어요. 도대체 명상이 뭐야, 말하고 행동하고 왜 달라, 분노가 올라오는 거예요. 명상 공부하러 간다고 해놓고 아무것도 얻은 게 없이 소호마을로 돌아왔어요.”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곁엔 현이 씨 등 도반이 있었어요. 도반들과 모여 불교와 명상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그와 현이 씨, 성영희 씨 등 셋이 모여 울산생태문화협동조합을 꾸리고 비폭력대화, 명상 교실 등을 열었습니다. “저는 사람을 알아가는 걸 가장 재미있어 하더라고요. 제가 다른 사람한테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에요. 왜 불편한가가 제 질문이에요. 그걸 탐구하다 지혜를 깨달으면 기쁘더라고요.”
도반과 인시눠소호공정여행 프로그램
그래서 사람을 만납니다. 2년 전부터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지원하는 ‘시골언니’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현이 씨와 함께 ‘소호 언니들’이 됐습니다. 청년 여성들에게 시골 생활을 구체적으로 안내할 ‘아는 언니’를 만들어 주는 프로젝트입니다. 5박6일, 12박13일 프로그램을 열 때마다 꽉 찼습니다. 소호 언니들을 만난 청년 세 명은 마을에 남았습니다. “청년들과 관계도 쉽지 않더라고요. 경쟁 속에서 상처받은 아이들이 많더라고요.” 올해 마을 청년들의 공방인 ‘나무극장’ 등 4개 단체와 함께 인시눠소호공정여행(링크)도 시작했습니다. “한 청년이 지은 이름인데 라틴어로 ‘스며들다’라는 뜻이래요. 마을의 단체들이 협력하며 시너지를 낼 수 있어요. 각자 살아남기는 힘들어요.”
21일, 산책을 마친 여행자들은 소나무 숲에 누워 하늘을 봤습니다. 싱잉볼 소리와 솔향이 감쌌습니다. 한 50대 여자는 엄마와 함께 왔어요. 효녀라 했더니 “엄마 말고는 같이 갈 사람이 없어 그랬다”고 했는데 다음날 캄포도마 만들기 체험에선 도마 위에 ‘엄마와 함께한 행복한 시간’이라고 적었습니다. 70대 엄마는 그날 밤 ‘불멍’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얌전하게 놀아, 나 때는 냄비 뚜껑이 찌그러지도록 두드리고 춤췄다.” 쌍둥이 초등학교 1학년생을 키우는 40대 여자는 ‘겁 없는 페인팅’ 시간에 고요한 소호의 숲을 그렸습니다.
“사람들이 쉬었다 가게 하자, 같이 공부하고 우정을 나누도록 인연을 적극적으로 만들자, 좀 평화롭게 살아보자. 그렇게 이상을 높이 잡아버리니 우리끼리 부딪칠 일이 없어요. 저는 그동안 타인보다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우리 시대는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고요. 타인에 관심을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 해요. 지금은 덜 상처받아요. 나랑 다른 존재들이 무수히 많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상처는 기대에서 오는데 기대는 과거의 경험을 상황이 달라진 지금 그대로 적용하면서 생겨요. 상대도 나도, 우리가 놓인 조건들도 항상 변하는데요. 지금은 저한테도 타인한테도 그래요. ‘그때는 그럴만 했다’라고.”(유영순)
“사는 얘기하고 의지하며 함께 늙어가는 공동체”의 꿈, 이뤘냐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하하, 이뤘죠. 친구가 제일 마음을 치유해줬어요.” 옆에 있던 현이 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친구 한 명만 있으면 세상 다 얻은 거 아니에요? 나는 두 명이나 있는데 뭘 더 바라. 우리는 이제 지친 사람들 받아주는 그룹 할 거야. 갈 데 없으면 여기 와요. 근데 우리가 또 좋은 사람들은 아니야. 하하.”
– 글: 김소민 시민이음본부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