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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종의 사막을 건너는 법

송래형씨는 공익재단에 기부하는 선행으로 꽤 알려진 사람이다. 30년을 근무한 직장에서 퇴직하면서 받게 된 국민연금 중 절반을 아름다운재단에 매월 기부하기 시작했다. 연금수령액 중 절반은 회사가 보조해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사회에 환원하는 게 옳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이렇게 기부하는 삶의 보람을 깨닫게 돼서 지금은 국민연금 수령액 전액을 내놓고 있다. 올해 예순 여섯인 그가 내놓은 기부금은 홀로 사는 노인을 돕는 데 전액 쓰인다. 얼마 전 송씨의 주름진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를 본 적이 있는데, 그의 여유로운 미소를 보면서 랄프 에머슨의 ‘성공이란 무엇인가’란 시를 떠올렸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이라도 숨쉬기 편해지게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사전에 나온 기부의 뜻은 ‘공익 또는 자선사업을 도우려고 재물을 내놓는 행위’이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사회적 기여


크든 작든 기부를 하는 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숨쉬기 편한 세상으로 만드는 데 가장 효과적으로 기여하는 일이 될 것이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회적 기여도 찾기 어렵다.



”?”

연말이 되면서 ‘기부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오르내린다. 어느 여자 배우의 익명 기부가 알려지면서 나도는 논쟁, 대통령의 재산기부 약속을 둘러싼 논란, 미국의 기부문화와 빌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에 대한 칭송, 우리나라 재력가들의 기부행태 등등.

이런 기부문화 논란을 보면서 그래도 우리나라가 기부를 사회적 이슈로 거론하는 세상이 됐으니 이것도 선진국으로 가는 진통이 아닌가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 남에게 베풀 것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잠재력이 있는 사회가 아닌가.

평범한 사람이든 재력가든 재물을 아끼는 것은 인간적 본능에 가깝다. 재물과 관련해서 르네상스 시대 이태리의 정치 사상가 리콜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 쓴 구절이 강렬히 인상에 남는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는 잊는 경우가 있지만,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을 빼앗아간 자는 용서해줄 수가 없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마키아벨리즘을 대변하는 말 같이 들린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통해 재산문제에 얽힌 송사나 스캔들을 보고 있노라면 군주론의 이 구절은 인간성의 한 측면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고로 인간에게 재산이 어떤 존재인지를 웅변하는 말이다.

이런 속성을 가진 재물을 내놓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죽으면 유산이 영구차를 따라올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집착하나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지만 죽는 날까지 재물욕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부나 자선을 말할 때 흔히 존 록펠러의 일화를 많이 인용한다. 록펠러는 55세에 불치병으로 오래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에 씌어 있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구절이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

그 때 병원 로비에서 여인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병에 걸린 어린 딸을 입원시켜 달라는 어머니의 호소였다. 록펠러는 자기 비서를 시켜 누가 돈을 냈는지 모르게 병원비를 지불해줬다.

록펠러는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한 모습을 보았을 때의 감회를 자서전에서 술회했다.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다.”
이후 록펠러는 재단을 만들어 공익사업과 자선사업을 펼치며 나눔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겼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다.”

당시 기업윤리 측면에서 보면 석유재벌로서 록펠러는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의 스탠다드 오일은 정유소를 지은 게 아니라 무자비한 자본의 논리로 인수합병을 통해 독점적 지위를 누리며 부를 축적했다.


기부문화 확산, 불안 녹일 훈풍


그러나 그의 인생 후반기는 그렇게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그의 회고대로 마음의 행복을 얻을 수 있었고, 미국 부자들의 활발한 기부문화를 키우는 데 초석을 쌓았다고 할 수 있다.

록펠러 재단의 기부 전통이 있었기에 ‘창조적 자본주의’를 외치며 기부문화의 국제화를 실천하는 ‘빌&메린다 게이츠 재단’이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사회가 전환기적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신뢰와 희망을 주는 훈훈한 바람이다. 기부문화의 확산이야말로 불안을 녹일 훈풍이 될 것이다.

* 이 칼럼은 내일신문에 함께 게재합니다.

올챙이 기자로 시작해서 주필로 퇴직할 때까지 한국일보 밥을 먹었다.혈기 왕성한 시절의 대부분을 일선 기자로 살면서 세계를 돌아 다녔고 다양한 이슈를 글로 옮겼지만 요즘은 환경과 지방문제, NGO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이제는 글 쓰는 것이 너무 지겹다’고 말하면서도, 지난 100년 동안 지구 평균 기온이 0.6도 올랐다는 사실이 인류의 미래에 끼칠 영향을 엄중히 경고하기 위해서 사막을 다녀온 후 책을 쓰고, 매주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현장에 있고 천상 글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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