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 마을 어귀 정자에 그가 앉아 있습니다.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지리산둘레길을 관리하는 (사)숲길 상임이사이자 경남 하동 매계마을 이장인 이상윤(60)씨 곁을 몽덕희망원정대 하동 지부장 ‘칸이’가 어슬렁거렸습니다. (몽덕 대장은 간식 찾기, 낮잠, 반려인 괴롭히기 등 바쁜 일정으로 오지 못했습니다. 대신 칸이 지부장에게 이장님이 인터뷰하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지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습니다. 2023년 8월 29일, 그날 저녁 희망원정 대원인 제가 이 동네 사람들과 토끼춤을 출지 말입니다.
관광지는 피하고 작은 마을 도는 순례길
2007년 첫 구간을 연 지리산둘레길은 처음부터 순례길이었습니다. 5개 시·군, 20개 읍·면, 마을 110개를 품은 21개 코스는 295㎞에 이르는데, 각 구간엔 숫자가 붙지 않습니다. 인월~금계, 금계~하동처럼 마을 이름만 표시해요. 유명 관광지는 다 피해 작은 마을들로 향합니다. 지리산국립공원으로 한 발짝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둘레길은 지리산을 지키는 에코밸트”(이상윤)입니다. 2004년 전쟁에 반대하는 ‘생명평화 탁발순례단’(도법 스님, 수경 스님, 이원규 시인, 박남준 시인)이 순례길을 제안했습니다. 이 이장도 하동 구간을 함께 걸었습니다. 녹색연합 녹색사회연구소, 지리산생명연대가 3년 동안 옛 지도를 살피고 마을 어르신들에게 물어 옛길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2007년 (사)숲길이 설립되면서 순례길이 트였어요.
“(탁발순례하며) 걸어보니 사람 다닐 길이 없는 거예요. 다 자동차 중심으로 바뀌었더라고요. 풍요로워졌는데 늘 불안한 이유는 뭘까? 왜 이편저편 갈려 분노할까? 이런 상황을 돌아볼 시간이 우리에겐 없었어요. 돌아보는 방법이 두 발로 걷는 거예요.” 그도 경험했습니다. “혼자 걷다 보면 잡념이 올라와요. 그러다 조용해져요. 침묵. 그 순간 희열이 다가와요. 오롯이 자기를 만나는 시간이죠. 그러다 우주를 만나는 느낌이 들어요.” ‘지리산 한 바퀴를 순례하는 15박16일 평화순례단’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사)숲길은 10년째 예술 프로젝트도 벌입니다. “지리산은 평화예요. 갈 곳 없는 사람들, 힘든 사람들을 품어온 산이에요. 지리산은 새 기운을 만들어내요. ‘시대 정신의 맹아’를 틔우는 산이라고들 하잖아요.” 예술은 그 메타포를 살리고 알립니다. 사라져가는 마을의 이야기를 사람들 기억 속에 심습니다. 그는 2024년 10월에 열릴 아시아트레일콘퍼런스에 맞춰 지리산비엔날레를 제안하려 합니다.
이상윤 이장의 고향은 경북 상주예요. 지리산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시작됐습니다.
“소설 <수호지>를 읽었는데 의로운 사람들이 양산박 산채에 모여 못된 관리를 혼내주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게 멋있는 거예요. 도서관 사서 누나한테 우리나라에서 양산박을 이루려면 어디가 좋겠냐고 물었더니 그래요. ‘그거야 지리산이지!’”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기자로 7~8년 일했습니다.
“제 영혼을 갉아먹는 짓이었어요. 정치인, 기업인 인터뷰해주고 광고 따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사꾼으로 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촌놈이잖아요. 막 딴 고추의 맛을 알거든요.” 20년 전 부인의 고향인 하동으로 왔습니다. “지리산에 불려온 거죠.”
북카페, 나눔식당, 사랑방….마을 요양원도 계획
그가 하동으로 온 2003년 섬진강을 따라 19번 국도 확장 계획이 발표됐습니다. 벚나무를 뽑아내는 계획에 맞서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이 꾸려졌습니다. 그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자연에 어울리는 삶을 생각했어요. 전기는 도시에서 소비하는데 원자력발전소는 지역에 지어요. 지역은 착취 대상인 거죠. 생산기지 정도로 치부돼요. 그때 그런 각성을 했어요.”
이때까지만 해도 인터뷰는 진지했습니다. 복병이 나타났습니다. 마을회관에 노래방기기가 재설치되는 날입니다. 이 이장은 마을에 방송해야 한다고 일어섰습니다. “예~ 노래 부르고 싶은 분들, 마을회관으로 오세요.” 방송은 나갔는데 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노래 부르느라 정신이 팔렸습니다. (하동 지부장 ‘칸이’는 퇴사각인가요?)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 인터뷰는 아직 망하지 않았습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강훈채(66) 전 이장이 이어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그날 밤 대나무 막대를 나팔처럼 불며 춤출지 몰랐습니다. 이 노래방기기로 말할 거 같으면, 2016년 농림축산식품부 주최 ‘행복마을콘테스트’ 경관 환경 분야에서 매계마을이 금상을 타며 받은 상금으로 마련했습니다. 2014년부터 9년 동안 이장이던 강훈채 씨가 이 마을에 들여온 건 노래방기기만이 아닙니다. 인구 95명인 이 마을에는 북카페, 수요일마다 공짜 밥을 주는 식당 ‘나눔밥상’, 동아리 모임이나 강의가 열리는 사랑방이 있습니다. 거저 얻은 공간들이 아닙니다.
2013년 가을, 마을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이 마을 식수원이 난개발로 오염되게 생겼습니다. 그 땅은 외지인 소유였어요. 강훈채 전 이장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주민들이 뭉쳐 그 땅을 장기 임대했습니다. 그는 교장실에 끌려온 학생처럼 다소곳이 앉아 마을의 도전을 설명했습니다. ‘연대의 맛’을 본 주민들은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을 비롯해 여러 공모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마을의 ‘하드웨어’ 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0년 안엔 마을 요양원도 지을 계획입니다.
“어르신들 고생 많이 했는데 주민이 돌봐야죠. 평생 친구들하고 놀면서 세상 떠날 수 있도록 해드리자는 거예요.”(강훈채)
강 전 이장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가 기억하는 고향은 “가난과 섬진강의 은빛 모래”입니다. “지금은 모래가 누렇지만, 그때는 하얗게 반짝였어요. 그 물을 그냥 마셨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엔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부산에서 신발 밑창을 생산해 수출하는 사업을 하다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마을 토박이인 그도 마을 사람들 마음을 모으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울고 싶은 날도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힘든 이장을 왜 했냐 물으니 머뭇거렸습니다. “아, 어, 마을을, 행복하게, 변화시키고 싶…” 그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마을을 사랑합니다. “나눔밥상을 하니 모임에들 참석하더라고요. 실적이 쌓이고 마을이 달라지는 걸 경험한 뒤엔 자발적으로들 참여했어요.”
<단장의 미아리 고개>에 맞춰 탬버린을
결국, 우리는 마을회관에서 같이 노래했습니다. 한 할머니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골랐습니다.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맨발로 절며 절며~.” 이 노랫말에 탬버린을 치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상윤 이장과 강훈채 전 이장은 부둥켜안고 춤을 춥니다.
이날 밤, 저는 강훈채 전 이장 집 2층에서 잤습니다. 이 집은 ‘매계호텔’ 네 집 중 하나입니다. 매계마을은 사회적협동조합 ‘놀루와’와 협업해 일정 수준을 맞춘, 쾌적한 민박 네트워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연말까지 체험프로그램도 꾸립니다. 이 마을 화가 두 명의 작업실을 매계갤러리로 연계해 투어도 벌일 예정입니다. “주민 소득도 높이고 방문객과 소통하는 창구도 만들려고요.” 아침밥으로 미역국을 함께 먹으며 강 전 이장이 말했습니다.
시골이 한가하다고 누가 그럽니까. 오전부터 마을 교육프로그램이 돌아갑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쑥뜸을 배웠습니다. 수요일 점심은 나눔밥상에서 누구나 공짜로 먹습니다. 밥 먹고 나니 사랑방에서 ‘관계 형성 서클 활동’이 벌어졌습니다. 15명이 둘러앉아 어린 시절 즐겨 했던 놀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강훈채 전 이장은 수박·복숭아를 서리하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이상윤 이장은 짚단에 불을 붙여서 던지고 놀다 맞았답니다. 삶의 고비에서 듣고 싶었던 말을 적어 서로에게 속삭여줬어요. “수고했어, 사랑해.”
이런 동아리 활동 외에 이 마을은 인문학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석 달째 지리산의 의미와 가치를 배우고 있어요. 그들은 “관계가 괜찮은 마을”을 그립니다. “마음이 통하고 배려하는 마을을 만들어가려고 해요. ‘생각은 다양하구나’ 그걸 아는 것만 해도 크죠.”(이상윤)
태양광발전, 리필스테이션 계획
이 마을은 자연과 거기 기댄 인간 사이 “괜찮은 관계”도 꿈꿉니다. 2021년 하동군에서 ‘탄소 없는 마을’로 선정했습니다. 매계마을은 2023년 일회용품을 줄이려고 리필스테이션을 만들 계획입니다. 8월 25일 시범 삼아 세제를 대용량으로 들여와 마을 사람들이 각자 용기에 필요한 만큼 담아갔습니다. 반응이 좋았습니다. 물품을 늘려 가려 합니다. 연말까지 맷골사랑방(세미나실) 지붕에 30㎾ 태양광발전을 설치해 마을 운영비를 해결하고 2024년에 20㎾를 추가해 마을 복지 기금에 보탤 계획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마을”이야말로, 어떤 목표보다 야심 찬 것일지 모릅니다. 60대 이장을 “울고 싶게” 할 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갈등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에너지가 되기도, 극한 대립으로 나아가기도 하죠. 함께 논의하고 과정을 되짚어보는 게 좋아요. 갈등의 원인이 뭔지 정확히 진단해야죠. 너무 빨리 해결하려니 싸움이 나요. 잠복한 문제를 드러내는 논의 구조가 있어야 해요. 우리 마을은 그걸 잘해요. 한국에선 정부고 정당이고 전임자가 했던 걸 까부숴버리죠. 뭔가 계획하고 사업을 진행할 때 모두가 동의할 때까지 천천히 가도 되지 않을까요.”(이상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났다
2003년 이상윤 이장의 ‘각성’을 불렀던 19번 국도는 결국 4차선으로 확장됐습니다. 그래서 이에 맞섰던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은 실패했을까요? 매계마을 열혈 사무국장 양은주(53)씨는 이상윤 이장과 그때 함께 활동했습니다. 사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20일 17년 만에, 마을 사람 모두 기다리던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 글: 김소민 시민이음본부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