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참석한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World Young Leaders Forum’에서 겪은 일입니다. 3박 4일 일정 내내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를 모두 서서 먹었습니다. 짜장면과 와인을 양손에 든 채, 먹고 마시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라는 주최 측의 배려 덕분이었습니다.
10여 분 대화를 나누고 나면, 특별한 공통점이 없는 한 옆으로 옮겨 다른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게 예의였습니다. 물론 짜장면 그릇과 와인잔은 열심히 챙겨 다녔습니다. 덕분에 주고받은 영문 명함이 두툼하게 쌓였습니다.
이 포럼은 독일 BMW재단의 주최로 전 세계를 무대로 개최되는 네트워크 행사입니다. 300명이 넘는 젊은 리더들이 세계 각국에서 참석했습니다. 스탠딩 파티 형식으로 진행된 식사시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협업의 실마리를 찾는 비즈니스 네트워크 파티의 전형이었습니다.
얼마 뒤, ‘inspired@jeju’라는 콘퍼런스에 참석했습니다. 사흘간 진행된 이 콘퍼런스에 100명의 전문가들이 참석했습니다. 이 전문가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어 보였습니다. 사진가, 건축가, 행정가, 언론인, 미술치료사, 여행가, 놀이문화 전문가에 저 같은 경제평론가까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게다가 주제도 없이 만나서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이 섹션을 만들어 발표하게 했습니다. 놀랍게도 사흘째가 되자 사람들은 시간이 모자라 아쉬워했습니다. 너무 많은 생산적인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느슨한 연대’를 형성하는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한국 자본주의는 회식자본주의라고 합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하죠. 질펀하게 몇 시간 동안 앉아 맞은편 상대와 부딪치는 술잔이 거래와 승진과 업무 협의의 마무리가 되고, 삼겹살을 몇만 번 뒤집어야 과장이 된다느니, 폭탄주를 몇 잔 만들어야 임원이 된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여기서 나오곤 합니다. 술을 섞고 술잔을 섞고 노래를 섞는 가운데 역사가 이뤄지는 셈입니다.
베이징과 제주에서 벌어진 일은 파티입니다. 의자가 없는 넓은 홀에서 와인잔 하나를 들고 돌아다니며 나눈 눈인사가 협업의 시작이 되는 구조입니다. 집도 절도 다른 이들이 만나, 짧은 시간에 서로 다른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가운데 역사가 이뤄집니다.
그리고 나서, 헌신적인 한 명이 주춧돌이 되고 힘센 한 명이 대들보가 되며 시간은 많이 못 내지만 그래도 작은 힘을 보태는 기왓장들이 붙어 집을 짓습니다. 이 집은 돈을 버는 비즈니스가 되기도 하고 사회를 바꾸는 혁신적 프로젝트가 되기도 합니다.
회식의 경쟁력은 낮아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을 통해 얻을 게 줄어들었습니다. 일은 복잡하고 다양해졌습니다. 우리 부서, 우리 회사 사람들 잘 안다고, 우리 고향 사람들 더 깊이 안다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많아졌습니다. 오히려 다른 분야, 다른 지역 사람들과 많이 만나야 창의적 해결책이 나옵니다. ‘인맥’의 성격도 바뀌고 있습니다. 동문이나 고향 같은 폐쇄적이고 바꿀 수 없는 인맥은 여전히 힘을 발휘하지만, 그 중요성은 전보다 현저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대신 우연히 만나서 공통점을 발견한 사람들 사이의 모임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결정적 순간에 취업이든 이직이든 거래든, 과거 고향 친구나 학교 선배가 하던 역할을 해주는 일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동호회에서 만난 이들, 페이스북에서 만난 이들 사이의 연결이 많아지고 중요해졌습니다. 가벼운 만남의 중요성, 즉 ‘느슨한 연대의 힘’(Strength of Weak Tie)이 종종 목격됩니다.
민간 싱크탱크 희망제작소는 올해 ‘새로운 세대의 제안’을 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아홉 돌을 맞는 젊은 싱크탱크답게 과거가 아닌 미래 패러다임의 사회 문제 해결책을 과감하게 제안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동시에 조직개편을 진행하면서, 프로젝트 중심 운영체계를 전면 도입했습니다.
이제 희망제작소의 사업은 연구, 정책, 시민사업의 세 가지 영역으로만 나누어져 진행됩니다. 그동안 희망제작소의 사업은 일곱 개의 센터에서 나누어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센터를 모두 통합하고, 주제 영역을 넘나드는 융합적 정책연구와 시민사업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팀이 구성되고, 프로젝트가 끝나면 팀이 해체되는 시스템으로 조직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로젝트 매니저가 내용에 대해 권한을 갖고 책임을 지는 방식입니다. 희망제작소만의 ‘파티’를 시작한 셈입니다.
물론 조직 혁신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분명한 사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희망제작소는 성장일변도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한국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려는 싱크탱크입니다. 한국사회가 이루어낸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선, 새로운 의제를 제안하려 합니다. 사회 전체를 한 단계 전진시킬 의제들을 정부가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으로, 시민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작고 즐거운 사업으로 만들어 확산하려 합니다. 이런 일을 더 잘 하기 위해 조직체계를 파티장처럼 꾸몄습니다.
파티는 세 가지 점에서 회식과 다릅니다. 첫째, 내가 먼저 다가가야 남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어갈 화제를 갖지 못하면 내 자리도 없습니다. 둘째, 맞으면 만나고 아니면 헤어지는 구조입니다. 회식처럼 끝까지 지켜야 되는 자리가 없습니다. 셋째, 숨거나 떠나기도 쉽습니다. 더 마시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끝까지 남으라고 붙잡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물론 파티든 회식이든 중요한 것은 결국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느냐입니다. 제품을 만드는 기업에서도 그렇지만, 가치와 사명을 중시하는 싱크탱크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파티는 회식을 이길 수 있을까요? 모릅니다. 아직은 파티를 여는 분들이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자유롭지만 실력 있는 싱크탱크, 묵직하지만 혁신적인 싱크탱크, 안정적이고 유연한 싱크탱크가 되기 위해 조직혁신으로부터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막 첫 걸음을 뗀 희망제작소의 조직혁신 실험이 한국사회 혁신이라는 긴 마라톤의 출발점이 될 수 있도록 관심과 조언 그리고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글_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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