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적 지역경제 모델을 찾아서-목민관클럽 연수 후일담 ①
5월 4일에 있을 영국 지방선거를 앞두고 막바지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지난 4월 28일, 프레스턴 시의회의 매튜 브라운 의장은 꼬박 하루를 내어 한국의 방문객들에게 ‘프레스턴 모델’을 소개했습니다. 이날의 마지막 방문지는 ‘레이튼 스트리트’였는데, 캠핑카와 조립식 주택들 사이로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가득한 이곳은 지난 10년간 프레스턴이 무얼 하고자 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프레스턴 시의회는 지난해 쫓겨날 위기에 처한 무허가주택 주민들을 위해 이곳 부지를 매입하고 협동조합을 설립해 주민들 스스로 관리·운영해 나가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지역 자산을 공동체가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관리하며 협동조합을 장려함으로써 모두를 위한 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브라운 의장이 10년 전 ‘프레스턴 모델’을 처음 제안하며 꿈꾸던 일입니다. 그가 선거운동을 뒤로한 채 자랑하고 싶을 만큼 진전된 성과인 셈이죠.
빈곤과 실업, 절망의 도시였던 프레스턴
영국 잉글랜드 북서부 랭커셔주의 주도인 프레스턴은 영국의 제조업이 무너지던 1960년대부터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잇따른 공장폐쇄와 대량해고는 실업과 빈곤, 불평등 심화로 이어졌지요. 불과 2012년까지만 해도, 프레스턴은 영국에서 경제적으로 낙후한 도시 하위 20%에 들고 아동빈곤율과 자살률이 가장 높은 도시군에 속했습니다.
처음엔 다른 도시들과 같은 처방을 썼습니다. 대규모 외부자본을 유치하는 것이죠. 1990년대 초 글로벌 개발업체 두 곳이 1조 원대의 투자금을 모아 복합쇼핑센터를 짓는 ‘타이드반 프로젝트’가 구명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투자자들이 발을 빼면서 휘청거렸고, 2011년 프레스턴 시의회는 프로젝트의 중단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당시 시의원이었던 브라운 의장은 “온 도시가 좌절과 절망에 휩싸였다”고 회고합니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일부 시의원과 관료 등을 중심으로 ‘더 이상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의 자원과 역량을 활용해 우리 스스로를 구하자‘는 생각이 굳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프레스턴 모델의 시작입니다.
프레스턴 방문 첫날인 4월 27일, 목민관클럽과 센트럴랭커셔대학은 ’프레스턴 모델‘을 주제로 현지에서 공동으로 국제컨퍼런스를 열었습니다. 이날 발표에 나선 필립 B. 와이먼 센트럴랭커셔대 경제학과 교수는 재미있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물이 가득한 욕조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것인데요, 답은 ”욕조 안에 물을 꾸준히 투입하면서 누수되는 물의 양을 최대한 줄이는 것“입니다. 와이먼 교수는 이것이 ’공동체 자산 구축(Community Wealth Building)‘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프레스턴을 물이 가득한 욕조로 만드는 방법
프레스턴 모델은 프레스턴을 물이 가득한 욕조로 만들기 위해 지방정부(시의회) 주도로 지난 10년간 진행된 일련의 프로젝트입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욕조에서 얼마만큼의 물이 새어나가는지를 정확히 알아보는 일이었는데요. 2013년 시의회의 의뢰를 받은 CLES 지역 주요 앵커기관(지역에서 고용과 구매 규모가 큰 공적 조직)의 지출을 분석한 결과, 당시 앵커기관들이 프레스턴 내에서 필요한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조달)한 비율은 전체의 5%(3,830만 파운드, 약 650억 원)였고, 랭커셔주로 범위를 넓혀도 39%(2억8천만 파운드, 약 4,500억 원)에 그쳤습니다. 나머지는 지역을 빠져나가 다국적기업과 대기업으로 흘러든 것이죠. 매튜 브라운 의장은 “우리는 기관들의 지역(랭커셔주) 내 구매력이 연간 10억 파운드(1조6천억 원)가량 될 것으로 보고, 시의회를 비롯한 앵커기관의 지역 내 구매를 확대하기 위한 ‘진보적 조달’ 전략을 세웠다”고 말했습니다.
진보적 조달은 가격보다는 사회·환경·윤리적 가치를 기준으로 삼는 새로운 조달 방식으로, 프레스턴 의회는 2013년 영국 중앙정부가 제정한 ‘사회적 가치법’과 2014년 개정된 EU 조달법을 근거 삼아 이를 추진했습니다. 프레스턴시 조달 매니저인 앤디 리디할은 “진보적 조달 원칙에 따라 프레스턴 시의회에 상품과 서비스를 공급하거나 시의회가 시행하는 사업에 입찰하려는 기업들은 지역 주민을 고용하고 생활임금을 지급하며 기술훈련 계획을 마련하는 등의 고용·임금 조건과 함께 환경과 지속가능성, 평등과 다양성 등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면서 “이를 통해 이윤추구 중심의 대기업보다는 지역에서 신뢰받는 중소기업이나 협동조합, 비영리단체 등의 입찰 참여가 활발해졌다”고 말했습니다. 프레스턴 시는 또한 대규모 조달을 작게 쪼개고 복잡한 입찰 방식을 간소화해서 지역의 소규모 농가와 더 작은 기업들이 입찰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현재 시의회를 비롯해서 ‘진보적 조달’에 참여하는 프레스턴의 앵커기관은 랭커셔교육병원, 랭커셔주경찰정, 게이트웨이주택협회, 센트럴랭커셔대학, 프레스턴대학, 카디널뉴먼대학, 랭커셔주의회 등 8곳에 이릅니다. 이러한 참여에 힘입어, 첫 지출분석 이후 5년 만인 2017년 CLES가 실시한 앵커기관의 프레스턴 내 구매 비중은 이전의 5%에서 18.2%로, 랭커셔주 내 구매는 무려 79.2%까지 확대됐지요. 욕조에 머무는 물의 양이 훨씬 많아진 겁니다.
기존의 지역 기업들만으로는 공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프레스턴 시의회는 지역에 다양한 노동자협동조합을 만들고자 센트럴랭커셔대학에 노동자협동조합 연구기금을 지원했습니다. 센트럴랭커셔대학은 이 기금을 연구뿐 아니라 초기 노동자협동조합 설립과 교육에 투자했고, 이를 씨앗으로 현재 프레스턴엔 케이터링협동조합, 요가웰빙협동조합, 디지털협동조합, 주택개량협동조합 등 10여 곳의 노동자협동조합이 설립돼 운영 중입니다.
연수단은 가장 최근에 생긴 요가·웰빙협동조합 ‘만다라’를 방문했는데요, 이곳에선 조합원과 지역 주민을 위한 다양한 요가 프로그램과 심리상담을 제공하는 한편, 노숙자와 저소득층 주민 등 120여 명의 취약계층을 위한 무료 강좌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만다라 협동조합의 설립에는 2017년에 출범한 프레스턴협동조합개발네트워크(PCDN)의 도움이 컸는데요, PCDN은 현재 운영 중인 낙후된 지역을 포함해 주민들의 삶을 개선할 다양한 협동조합을 개발하고 성장을 돕는 협동조합입니다.
최근에는 협동조합 교육기관인 프레스턴협동조합교육센터(PCEC)도 문을 열었습니다. PCEC 설립을 주도한 줄리언 맨리 센트럴랭커셔대 교수는 이 교육센터가 “지역 주민들이 모여 협동조합의 철학과 가치, 의미와 발전 방향을 논의하는 장이 될 것”이라면서 “프레스턴 모델의 가치는 경제를 넘어 공동체의 문화를 바꾸는 데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프레스턴 모델은 경제가 아니라 문화를 바꾸는 것”
지난 10년간 프레스턴의 시도는 지역 주민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벤 바 리버풀대학 응용공중보건학과 교수는 프레스턴과 영국 내 비슷한 규모 도시와의 비교연구를 통해, 프레스턴의 모델이 고용이나 소득과 같은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주민들의 정신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특히 주민들의 삶의 만족도는 2015년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 꾸준히 높아져, 2019년까지 9%p나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아래 그림 참조).
프레스턴 모델의 추진 주체인 시의회에 대한 주민들의 지지도 높습니다. 2018년 총 48개 의석 가운데 전통적인 보수당 우세지역 두 곳을 포함한 30개 의석을 매튜 브라운 의원이 이끄는 노동당에 몰아주며 힘을 실어준 프레스턴 주민들은 지난 5월 4일 선거에서 무려 31석의 압도적 승리를 노동당에 선사했습니다. 덕분에 팬데믹 이후 시의회가 제시한 ‘프레스턴 모델 2.0’ 계획이 한층 탄력을 받을 전망입니다. 브라운 의장은 “저소득층 주민들의 금융 접근성을 높이고 지역 협동조합들의 설립과 성장을 안정적으로 견인할 공동체 은행(북서부공동체협동조합상호은행) 설립과 사회주택 건설, 시가 직영하는 복합문화공간 건립 등 팬데믹 이전부터 준비해온 일들을 진행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프레스턴 모델, 국내에 적용 가능할까?
프레스턴 모델이 국내에서 보기 드문 획기적인 시도는 아닙니다. 함께 프레스턴을 방문한 류경기 서울 중랑구청장은 “상당수가 지역순환경제나 사회적경제 등의 이름으로 국내 지방정부들이 이미 해보았거나 시도 중인 사업들”이라면서도 “사업을 추진하면서 관련 데이터를 축적하고 성과를 측정하고 연구하는 일을 병행해 나가는 점이 인상 깊었다”고 했습니다. 조선업 쇠퇴로 지역경제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프레스턴을 방문한 김종훈 울산 동구청장은 “지역 기업들의 공공조달 참여를 확대하는 방안은 우리 지자체들도 대부분 검토해본 적이 있을 것”이라면서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한계가 있고 상위법이 개정돼야 한다”이라고 말했습니다. 임주환 희망제작소 소장은 프레스턴 모델을 “2000sus을 전후해 나타난 영국 사회혁신 운동의 계보를 잇는 진화 버전”이라고 풀이하면서 “사회혁신이 한국사회에 맞게 변주되며 변화의 물꼬를 텄듯 프레스턴 모델 또한 청년인구 감소와 지방소멸 등의 위기를 맞은 한국사회에 의미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이미경 / 자치분권센터 연구위원 nanazaraza@makehopr.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