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온 후 꼬박꼬박 챙겨보고 있는 9시뉴스는 희망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가슴 아픈 소식들로 가득하다. 이렇듯 절망만이 난무할 뿐,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씨앗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보도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주어진 몫인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자꾸만 민주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상실케 한다. 허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희망의 싹은 우리의 맞잡은 손에서 자라난다는 것이다. 모두의 노력이 모여 도처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소식이 안방에 전해지는 그 날을…….
[##_1C|1046007319.jpg|width=”542″ height=”356″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 짧은 서울생활을 마치고 돌아간 간디학교에서. 뒤에 보이는 건물이 도서관이랍니다._##]
나는 희망제작소로 가겠다
4월 어느 날 ‘삶과 철학’ 수업 시간. 금요일에 있을 초청특강을 앞두고 ‘소셜디자이너 박원순’ 그리고 ‘희망제작소’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저 분을 만나야겠다. 그리고 나는 희망제작소로 가겠다.’ 그 날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원했기에 망설임 없이 두드렸고, 그렇게 주어진 10일의 시간을 보낸 뒤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 것인가.’
긴 시간 동안 나의 화두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박복한 사회는 대안을 필요로 한다. 나 또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그렇다면 나는 살아가면서 과연 어떤 가치의 대안을 창출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되묻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희망제작소에서 갖게 될 소중한 시간들이 내 삶의 방향을 조금 더 구체화 시켜줄 것이라 믿었다.
첫 출근. 내게도 책상 한 자리가 주어졌다. 완전한 ‘자율’ 또한 함께. 업무를 지시 받기보다는 내가 만들어가는 업무가 훨씬 많았다. 그래서 퇴근 후에도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매일 밤 그 날 모은 자료 속에 파묻혀 다음 날을 준비했다. 더 큰 배움을 얻기 위해 더 큰 노력을 해야 했다. 그 노력들은 희망제작소의 가치를 스스로 해석할 수 있게 했고, 사회의 단면에만 머물렀던 내 시야를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박원순 상임이사님과의 동행일정, 그리고 상임이사님을 포함한 희망제작소의 모든 부서를 인터뷰 했던 것이 희망제작소를 이해하는데 굉장한 도움이 됐다. 씽크 앤 두 탱크(Think&Do tank). 희망제작소는 대안창출의 보고이며 더 넒은 의미에선 희망의 현실화를 위한 중간지원조직, 즉 소통의 매개체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시민이 주체가 되어 그들의 희망을 싹틔울 수 있도록 희망제작소는 그들의 탄탄한 다리가 되어주고 있다.
그들의 기반은 어디에?
그러나 그런 희망제작소에게도 탄탄한 기반이 마련되어 있는 것일까. 이는 희망제작소 뿐 아니라 대개의 비영리기구(NPO)가 가지는 취약점이기도 하다. 가장 역동적이고 실험적인 조직이지만, 그 기반은 가장 약한 조직이기도 한 것이다.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게 일하는 것이 당연해진 우리 사회이지만, 이것이 그들을 언제나 소수자로 머물게 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그 영역에 뛰어들어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도 좋지만, 그들이 더 나은 조건과 환경 속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밖에서 돕는 우리들의 노력 또한 중요할 것이다.
또, 희망제작소는 풀뿌리가 되는 지역사회에 가장 큰 기반을 두고 있다. 뿌리에서부터의 시작이 더 탄탄함을 알지만, 정작 그 중요성을 몸소 체험할 기회가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시흥에서 열린 ‘커뮤니티 비즈니스 포럼’은 내게 뚜렷한 사고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지역사회의 발전이 더 큰 어젠다로 나아가는 밑바탕을 구축해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상임이사님과의 인터뷰 중에 나는 지역차원의 문제에 무게를 싣다보면 국가차원의 문제가 간과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표한 적이 있다. 그 때 내게 돌아온 답변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 또한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그 쪽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일하고 있지 않느냐, 우리는 사람들의 관심이 덜한, 구석지고 잘 안 되는 곳으로 가서 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내가 앞으로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한 또 다른 고민으로 이어졌다.
‘나는 과연 세상의 어떤 빈틈을 메우고자 했는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고민이 정말 깊이 이루어졌던 것일까. 내가 그린 삶의 얼개에서 진정한 대안을 찾을 수 있는가.’
[##_1C|1385950372.jpg|width=”289″ height=”328″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2009년 여름날 희망제작소에서의 즐거운 한 때._##]
자, 김유진 어떻게 살 것인가
약자들이 당당하게 디딜 수 있는 땅을 만들고 싶었다. 인권변호사를 꿈꾸게 된 이유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다만, 내가 많은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 내 시야가 한 없이 좁았음을 깊이 성찰한다.
‘그 속에서 변화를 구축해 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것인가.’
인턴십을 마친 지금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이처럼 많은 고민을 안고 돌아왔지만, 오히려 더 확고해진 부분도 있다. 바로 ‘연대’에 대한 신념이다. 지속가능한 사회는 ‘상생의 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상임이사님은 이를 순치관계라 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가 세상의 한 조각임을 알고, 공공의 가치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연대이자 상생의 길이지 않을까.
우리 세대는 여러 가지 의미로 박복한 현실 가운데 놓여있다. 허나 이러한 사회는 역설적으로 개개인에게 심지가 곧은 소신 있는 삶의 자세를 요구한다. 이것이 내겐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 변호사 시절의 가장 큰 보람을 “역사의 한 가운데 제가 있는 것만으로도” 라고 표현한 상임이사님 말씀에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나 또한 이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사는 한 사람이길 바란다. 그러려면 많은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나의 뿌리를 지금보다 더 깊고 단단하게 내릴 수 있도록 하자.
나의 아름다운 희망을 지지합니다!
글 / 김유진 (간디학교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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