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미국인 양부모

김흥숙의 낮은 목소리

단어는 세상을 반영합니다. ‘성실’은 한때 위대함에 이르는 덕목으로 추앙받았지만 지금은 착하나 우둔한 사람을 묘사할 때 더 자주 쓰입니다.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는 육신과 영혼을 뜻하던 ‘자유’가 계산 밝은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단어로 쓰이게 된 건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입양’은 슬픈 단어입니다. 내 아이를 내가 키울 수 없어 남의 아이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입양’은 또 사랑의 다른 말입니다. 남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를 내 아이로 만드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머지않아 이 단어가 너무나 ‘영리한’ 부모들 덕에 슬픔이나 사랑 대신 영악함이나 사기를 연상시키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지난 주말 코리아 타임스는 “미군영내학교 입학을 위한 입양의 남용”을 1면 톱기사로 보도했습니다. 용산에 있는 미국 군인과 국방부 직원 가족을 위한 서울 아메리칸 하이스쿨 (SAHS)에 미국부모에게 입양된 한국 학생들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는 겁니다. 656명의 재학생중 30퍼센트에 이르는 195명이 아시아계이며 아시아계 대부분은 한국계라고 합니다.

“요즘 이 학교엔 입양된 한국학생들의 수가 크게 늘었어요. 한국 사람들은 매우 영리해서 아이들 교육을 위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하거든요.” 이 학교에 두 아이를 보내고 있는 어머니의 말입니다. SAHS의 부교장인 버나드 히플위드씨도 시인합니다. “우리 학교엔 입양된 한국 학생들이 꽤 많이 다니고 있어요. 그 학생들로 인한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없지요.” SAHS와 같은 학교 8개가 서울, 대구, 오산, 평택, 진해 등지에 운영 중인데 서울 이외 지역의 학교들도 비슷한 사정일 거라고 합니다.

교육열에 불타는 한국인 부모와 미국인들을 엮어주는 일은 주로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이민업무대행업체들이 한다고 합니다. 1974년부터 이민업무를 해온 사업가는 요즘 자신을 찾아오는 고객의 90퍼센트 이상이 아이들을 영어로 교육하는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는 부모들이며, 한 달에 3건 내지 9건을 처리한다고 말합니다. 건당 수수료는 200만 원선이지만 아이를 입양할 미국인에 따라 액수가 크게 달라진다고 합니다.

한 달 전 영국의 유력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경제협력기구(OECD)가 전 세계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학력평가(PISA: Program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 결과를 비교하며, 한국과 일본의 학생들의 성적이 좋은 건 두 나라의 교육시스템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여서 그런 것 같다고 분석했습니다. 영국이나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비해 다양한 민족들의 어울림에서 얻게 되는 장점이 많다며 PISA 성적은 나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하고 물었습니다.

[##_1C|1239887636.jpg|width=”500″ height=”333″ alt=”?”|슬픈 역사를 지닌 해외입양을 ‘사기’에 이용하는 ‘교육열’ 넘치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_##]

그 기사는 또 한국의 사립학교 학생들은 PISA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데도 부모들이 성적이 더 나쁜 미국이나 뉴질랜드 등지로 유학을 보내는 게 재미있다고 꼬집으며, 일본의 부모들도 한국 부모들처럼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학원에 보내지만 유학을 보내지 않는 건 일본의 기업들이 유학생보다 국내 유수 학교 졸업생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파이낸셜 타임스가 한국 교육의 문제를 지적한 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 8월엔 “한국인들은 좋은 학교에 들어가야 하고, 좋은 직업과 배우자를 찾아야 한다는 심한 사회적 압박에 시달린다. 그로 인해 12세 어린이가 자정까지 학원에서 공부하고 부모들이 세 살짜리 자녀의 적성검사 결과를 놓고 대학 전공 선택을 고민한다. 그러나 세계경제포럼(WEF) 평가에서 한국 교육의 질은 세계 60위, 노동 생산성은 미국의 40퍼센트 수준이었다”라는 요지의 기사도 실었습니다. 당시 기사를 썼던 특파원은 한국에는 “전속력(full throttle)”만이 존재한다며 “속도를 조금 줄이면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조언했습니다.

전속력으로 달리며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각 없이 사는 나날이 길어지다 보니 이제 우리 주변엔 무엇이 중요한지, 가족이란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린 사람이 많습니다. 영리한 친부모 덕에 미국 부모에게 입양되어 미군부대 안의 학교에 다니게 되면 영어를 배우는 덴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나 배우는 게 어찌 영어뿐이겠습니까? 어쩜 그 아이들은 영어보다 먼저 세상을 상대로 사기 치는 법을 배우고 목적을 위해서는 부모도 바꿀 수 있다는 걸 배울지 모릅니다.

마침 주한 미군측이 미국 국방부교육처에 코리아타임스 기사를 보냈다고 하니 부디 양국 정부가 공조하여 사기입양을 뿌리뽑아주길 바랍니다. 지난 50여 년간 16만 여명에 이르는 어린이들을 외국의 양부모에게 입양시킨 한국,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입양’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슬픔과 사랑을 이해하는 이 나라에서 이런 식의 ‘입양’ 모독이 허용되어서는 안 되니까요.

* 이 칼럼은 자유칼럼에 함께 게재합니다.

코리아타임스와 연합통신 (현재의 YTN) 국제국 기자로 15년,
주한 미국대사관 문화과 전문위원으로 4년여를 보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글을 쓴다.
현재 코리아타임스, 자유칼럼, 한국일보에 칼럼을 연재중이다.
저서로 “그대를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와 “시선”이 있고, 10여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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