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2011년 1월, 공감만세의 필리핀 공정여행에 참가한 동화작가 이선희님의 여행 에세이 ‘편견을 넘어’를 1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공감만세는 공정여행을 진행하고 있는 청년 사회적기업으로 희망제작소의 청년 소셜벤처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희망별동대 1기를 수료했습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조금 더 많은 분께 공정여행을 알리고, 또 다른 여행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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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넘어 (8) 탐아완 예술인 마을, 그리고 바나나 

야간버스를 타고 얼마만큼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내 몸이 자고 있는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비몽사몽 상태에서 신기한 풍경을 보았다. 까만 하늘에 노란 별들이 수도 없이 박혀 빛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버스가 하늘을 달리는 것도 아니고. 눈을 비벼 다시 보니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산 위에, 집에 켜놓은 것인지 도로 위에 켜놓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전등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꿈결처럼 아름답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사용자
바기오(Baguio)는 그 첫 이미지부터 아름다운 곳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바기오에서 머무를 곳은 탐아완 예술인 마을(Tam-awan Village). 어떤 예술가들과 어떤 예술작품을 만나게 될지 자못 기대가 됐다. 새벽에 도착했기 때문에 예술인 마을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관리인이 나올 때까지 문 앞에 쓰여 있는 글귀를 아주 아주 오랫동안 곱씹을 수 있었다. 다음은 탐아완 예술인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쓰여 있는 글의 전문이다.

Take nothing,
but pictures.
Leave nothing,
but footprints.
Kill nothing,
but time.
Bring nothing,
but memories.

아무것도 찍지 마세요, 사진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마세요, 발자국 외에는.
아무것도 죽이지 마세요, 시간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세요, 추억 외에는.

한 친구는 사진도 찍지 말고, 발자국도 남기지 말고, 기억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말인 줄 알고 되게 야박한 곳이라고 생각했단다! 예술인 마을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졌다. 잠든 관리인을 깨워 마을로 입성했다. 숙소는 모두 전통가옥 발루이(Baluy)였다. 1층에는 화장실과 샤워실이 딸려 있고 2층은 침대방이었다. 발루이에서 맛보는 꿀맛 같이 단 잠이란.

아침에 눈을 떠 탐아완 예술인 마을을 둘러보았다. 입구 쪽에는 당일 관람객을 위한 갤러리와 예술인의 작업 공간인 공방, 공예품을 살 수 있는 숍,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 등이 있었다. 숲에 난 산책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다보면 곳곳에 숙소로 사용되는 발루이가 보이고,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바기오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바기오는 아시아라기보다는 유럽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지금까지 본 필리핀의 거친 느낌이 거의 없이 부드럽고 깔끔하게 정돈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탐아완은 코르디예라 사람들의 예술과 문화를 보존하고 교육하기 위해 조성된 마을이다. 차눔 재단의 후원을 받아 예술가들은 이곳에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다. 그들은 개인 창작활동 외에도 관람객을 위한 워크숍을 진행하거나 자화상을 그려주기도 한다.


예술가들이 진행하는 워크숍에 우리도 참여해보았다. 베레모와 흰 수염이 마치 피노키오를 만든 제페토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주었던 예술가 아저씨와 능숙한 한국어 실력과 재치 있는 입담을 가진 예술가 제드, 그리고 조용하지만 친절하고 따뜻한 예술가 청년이 우리를 지도해주었다.

흰 종이와 크레파스가 주어졌다. 나는 그림을 못 그린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릴 수 있느냐 그릴 수 없느냐의 문제랄까? 그림 그리라고 연필을 쥐어주면 손이 굳어버린다. 자랑은 아니지만 초등학교 때 방학숙제로 그림을 그려오라고 하면 나는 그림 잘 그리는 아빠에게 죄다 넘겨버리곤 했다. 이십 대 중반에는 용기를 갖고 미술 강좌를 듣기도 했다. 매일 작품을 하나씩 그려야 했으므로 나는 억지로라도 그림을 그렸는데 10주의 강좌가 끝나고 10개의 작품을 함께 훑어보던 선생님이 “초반에는 거침없이 표현하더니 갈수록 소심해지네” 라고 말한 뒤로는 억지로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림을 못 그리면서도 정말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면 화가로 태어나는 것이 나의 꿈일 정도로.

여행이 주는 자유로움이 나의 손에도 자유를 주지 않을까? 흰 종이와 크레파스와 함께 바나나가 주어졌다. 예술가들이 우리에게 준 첫 번째 과제는 바나나 그리기였다. 바나나? 노란색만 칠하면 되는 것 아냐? 이렇게 생각하면 오산이다. 바나나는 어찌나 오묘한 굴곡과 다채로운 색깔을 지녔는지 눈 앞에 있는 바나나를 표현하는 것은 바나나 껍질을 까서 먹는 것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바나나를 앞에 두고 쩔쩔 매고 있으려니 조용하지만 따뜻하고 친절한 예술가 청년이 나를 도와주었다. 그는 내 그림에 손을 대는 대신 자신이 직접 바나나를 그려보였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바나나가 종이 위에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아하, 감 잡았어. 내 종이에는 거울에 비친 것만큼은 아니어도 물결에 비친 것만큼은 될지도 모르는 바나나 엇비슷한 것이 생겨났다.


바나나 그리기 다음으로는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그리기, 앞 사람 얼굴 그리기, 자화상 그리기가 이어졌다. 나는 우중충한 갈색으로 바타드에서 보았던 장작을 패는 노인을 그렸고, 앞에 앉은 중학생을 실물과 똑같이 그렸으며, 내 얼굴은 실물보다 더 낫게 그려보았다. 예술인 마을에 눌러앉아 주야장천 그림을 그린다면 나는 다음 생애의 꿈을 이 생에서 이룰 수도 있을텐데!

우리가 그림을 그리는 사이 예술가 제드도 그림을 그렸다. 그는 우리 여행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그려주고 있었다. 열일곱 명의 얼굴을 모두 그릴 때까지 그는 결코 그림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 모습도 예술가다웠다. 제드는 우리 얼굴 사이사이에 바나나를 그렸다. 우뚝 선 바나나는 “Standing Banana”, 반쯤 껍질을 깐 바나나는 “Naked Banana”라고 말하는 제드. 그는 코디네이터 고(성이 고씨다)를 마지막에 그린 뒤 “우습다‘고’, 귀엽다‘고’”라며 농담까지 할 정도로 한국말에 능숙했다.


제드는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고 한다. 미술 교육도 받은 적이 없다고 하는데 그런 그가 어떻게 화가가 되었을까? 그러다 문득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맞닥뜨렸다. ‘예술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꼭 교육을 받아야만 예술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돈 주고 배우는 것, 학교에서 배우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사실 배움은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인데.

탐아완의 숲을 산책하다가 커다란 거미줄을 만났다. 진짜 거미줄은 아니고 꼭 거미줄 같이 생긴, 드림캐처(Dreamcatcher)라는 원주민 부적이라고 한다. 이 커다란 거미줄에는 어떤 꿈이 잡힐까? 우리는 어떤 꿈을 잡을 수 있을까? 열심히 공부하면, 열심히 일을 하면 우리는 우리의 꿈을 잡을 수 있을까?

”사용자

글ㆍ사진_이선희
가늘고 오래 공부한 끝에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다방면에서 부족함을 절감, 불꽃 튀는 경험을 원하던 중 공정여행에 반해 청년 소셜벤처 공감만세의 일원이 되었다.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북촌을 여행하며 아이들이 스스로 동화를 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월간 토마토에서 어른이 읽는 동화를 연재중이다. 
● E-mail: sunheemarch@gmail.co?m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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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만세는
‘자유롭게 고민하고 상상하며 길 위에서 배우는 청년들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 라는 구호 아래, 대전충남 지역에서 ‘최초’로 법인을 설립을 한 청년 사회적기업이다. 현재 필리핀, 태국, 제주도, 북촌, 공주 등지에서 공정여행을 진행하고 있으며 공정한 여행이 필요한, 공정한 여행을 실현할 수 있는 지역을 넓혀갈 생각이다. 공정함에 감동한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보자.  ● 홈페이지:
fairtravelkorea.com  ● 카페: cafe.naver.com/riceterrace


● 연재 목록
1.
나는 왜 공정여행을 떠났는가    
2.
필리핀 ‘골목길 미소’에 반하다  
3. 여자 여섯 명, 수다로 지새운 필리핀의 밤  
4. 끼앙안, 천국보다 평화로운    
5. 이푸가오의 독수리   
6. ‘천상의 녹색계단’ 앞에 말을 잃다
7. 계단식 논은 왜 무너져내릴까
8. 탐아완 예술인 마을, 그리고 바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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