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는 꼭 ‘가족’이어야 할까?
퇴근길에 슬쩍 쳐다본 우편함에 뭔가가 삐죽 나와 있었다.
“귀하는 국가건강검진 대상자입니다.”
건강검진 언제 받으러 가냐고 묻던 대표님의 얼굴이 스쳤다. 질병 예방 차원에서 검진이 필요하고 국가가 지원해주니 수검자의 부담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안내문을 만지작거리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1인가구가 된 지 올해로 3년. 혼자 사는 것에는 만족한다. 가족과 갈등으로 분노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고 내 취향과 필요로 채워진 안전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척 기쁜 일이다. 내가 먹는 것, 내가 입는 것, 나를 위해 쓰는 것들을 내가 마련하기에 나에게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퀘스트를 끝내며 조금씩 성장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런데 가끔씩 그런 나를 무척 작아지게 만드는 일이 생긴다. 보호자를 찾을 때가 그렇다.
독립하기 직전(사실은 독립을 마음먹게 한 가장 결정적인 시점), 갑작스런 질병으로 수술을 해야 했다. 4인 가족이었지만 저마다 바쁘다며 그 누구도 보호자로 동행해주지 않아 혼자서 입원을 해야 했고 수술 날만 직계가족이 찾아와 동의서에 서명을 해주었다. 퇴원 때도 마찬가지로 혼자였다.
2년 전에는 근무하던 회사의 근로자 복지 지원으로 개인 비용을 일부 내고 수면내시경을 했었다. 사전 안내문에는 수면마취는 검사 종료 후에도 어지러움, 방향감각 상실 등의 일시적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으니 운전은 금물이며 가급적 보호자와 동행하라고 적혀있었다. 검진에 동행할 보호자가 없던 나는 버스를 타고 가 내시경을 마친 뒤 비틀거리며 병원 밖으로 나섰다. 택시정류장까지 걸어가는 잠깐 사이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고 빙빙 도는 아스팔트를 지나 집으로 들어왔다.
두 번의 경험이 쌓이며 나에게는 ‘보호자’라는 단어가 무척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위급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불안감이 생겼고, 질병 그 자체보다 입원과 수술이 필요할 때 내 권리를 대신해줄 사람이 없다는 걱정이 더 커진 것이다.
건강검진 안내문을 받아들고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은 ‘검사 결과가 안 좋거나 이전 질병이 재발해서 수술을 해야 하면 누구한테 와달라고 해야 하지?’였다. 전신마취를 하면 의사 불능 상황에 놓이기에 수술 중 위급 상황이 발생하거나 의학적 소견에 따른 치료를 선택해야 할 때 수술동의서에 서명한 보호자(가족)가 그 선택권한을 위임받아 결정하게 된다. 결혼 계획 없이 1인가구로 살아가고자 하는 나에게는 권한을 넘겨야 하는 가족이 필요한 순간 무척 난감하다.
코로나 격리 기간 생필품 전달해준 협동조합
수술보다 상대적으로 덜 위중한 상황에서도 보호자가 없는 1인가구는 애로사항이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코로나19 격리 아닐까?
코로나19에 감염되었을 때는 확진 판정과 동시에 격리의무가 발생하기에 끼니를 배달음식 또는 인스턴트로 해결해야 했고 비대면 진료를 받은 후 처방약을 수령할 때도 주변 지인에게 부탁해 문고리에 걸어놓고 간 약봉투를 챙겨 들어오고는 했다.
내가 살고 있는 관악구는 1인가구 거주비율이 60%에 달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지역에 있는 관악정다운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는 배달종사자 협동조합 라이더유니온과 협업해 격리된 1인가구 조합원(과 조합원 가족)에게 긴급 생필품 꾸러미를 전달했다. 덕분에 격리기간 중에도 신선한 과일을 먹을 수 있었고 조합 의원을 통해 비대면 진료도 받았다.
1인가구의 삶은 혼자여서 자유롭지만 혼자이기에 위태한 순간의 연속이다. 서울시에서는 1인가구 병원동행 지원 사업을 시행하고 있지만 공공정책의 특성상 아직까지 당사자의 손에 바로 잡히는 느낌은 아니다. 보호자의 역할이 꼭 ‘가족’에 국한되어야 하는지, 시민의 실제 삶과 더 가까운 사회서비스가 고민되길 바란다.
글을 마치는 지금도 건강검진을 언제 받을 지는 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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