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재단은 지역주민이 기부한 돈으로 기금을 조성해 지역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 사용되도록 배분하는 곳입니다. 복지 외에도 지역사회에 필요한 다양한 영역을 지원하며, 기금을 개인에게 직접 배분하기보다 필요한 단체나 사업에 배분함으로써 ‘물고기를 잡아 주기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지역재단은 1914년 미국에서 설립된 클리브랜드 지역재단입니다. 2010년 통계에 따르면 1천6백여 개의 지역재단이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민간 지역재단으로 2006년 천안풀뿌리희망재단이 설립된 이후 부천희망재단, 성남이로운재단, 안산희망재단, 인천남동이행복한재단이 설립되었습니다.
기부문화가 척박한 한국에서 민간 지역재단들의 자생적인 활동은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직 걸음마 단계이지만, 조금씩 활동 범위를 넓혀가며 지역의 공익활동 생태계를 풍부하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지역재단을 소개합니다.
안산을 치유하는 보이지 않는 손
– 안산희망재단
2012년 5월 설립된 안산희망재단은 상근자가 두 명인 작은 신생 지역재단입니다. 활동 기반을 닦기 시작할 무렵 세월호라는 큰 사고를 만났습니다. 충격과 혼란 속에서 이 작은 지역재단은 안산의 시민사회를 도우며 침착하게 움직였습니다. 세월호 사고 공식 모금기관으로 등록을 하고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유가족 대책위와 사고수습단의 활동, 시민기록단과 추모 활동 등에 필요한 크고 작은 비용을 지원했습니다. 유가족분들이 성금을 직접 받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유가족분들의 활동과 그들을 돕는 이들을 지원하는 방안을 지역사회와 논의하여 섬세하게 찾았습니다. 지역사회가 해야 하는 일을 찾기 위해 지역주민들과 원탁토론을 여는 등, 유가족분들의 지역사회 복귀와 관계 회복을 위해 필요한 일들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지역사회에서 필요한 일을 발굴하고, 도움이 필요한 일에 기민하고 유연하게 대처했던 안산희망재단의 행보에서 지역재단이 필요한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10일 희망제작소 연구원들이 안산희망재단 이진경 사무총장과 오현주 간사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희망제작소(이하‘희망’) : 안산희망재단 설립 과정을 소개해 주세요.
이진경(안산희망재단 이진경 사무총장 이하 ‘이진경’) : 희망: 안산희망재단 설립 과정을 간단하게 소개해 주세요.
이진경 : 2012년 5월 29일에 창립을 했는데요. 안산이 다른 지역과 다르게 영세한 공단지역이라 저소득층이나 다문화 계층이 많아요. 그런데도 안산시 재정이 갈수록 악화돼서 재정자립도가 47% 수준으로 낮아졌어요. 그래서 이를 보완할 별도의 민간재단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특히 안산시가 반월시화공단 배후 도시이기 때문에 15,000개의 기업들이 사회공헌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다면, 굉장히 좋은 성과와 모델이 될 것이라는 기대와 꿈을 가지기도 했고요.
다행히 안산의제21 내 기업시민협력분과에 기업인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같이 참여해서 논의하는 과정에서 공단 기업인과 시민단체, 공공기관이 함께 협력해 지역재단을 창립하자는데 공감이 형성됐고, 그렇게 지역재단을 추진하게 됐어요.
출범 준비부터 함께할 것으로 기대 했던 반월시화공단 경영인협의회가 자체 재단을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기업과 공단이 사실상 빠진 상태에서 NGO 중심의 지역재단이 창립하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초기부터 재정 및 운영적 어려움이 사실상 심각했죠. 특히 모금운동을 처음 해보는 거라 모금프로젝트 개발이나 기부자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출범 1년 정도 지나자 추진동력이 약화됐어요. 지역재단을 접어야 하나 고민하는 상황까지 됐죠. 그러나 재역재단에 공감해 도와준 많은 시민들과 지역인사들의 마음과 기대를 생각하면 그냥 접을 수는 없었고요. 그래서 재창립 수준으로 힘을 모아보자고 해서 기부전략도 새로 짜고, 이사 조직도 새롭게 정비해 2013년 10월 모금 출범식을 했고, 그걸 계기로 하면서 지금의 희망재단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고려인 모금사업, 2014년 세월호 모금사업이 희망재단 주도로 이루어지면서 희망재단이 지역사회에서 필요성을 인정받게 된 것 같아요.
희망 :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기 전 안산희망재단은 어떤 일을 했나요?
이진경 : 안산에 이주민노동자가 많은데 특히 고려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어요. 어느 날 고려인 한 분이 외롭게 돌아가셨는데 장례를 치르는 일을 저희와 안산 시민사회가 같이 하게 되었어요. 이 일을 겪으면서 안산에 고려인이 정말 많고, 그분들의 삶이나 복지, 자녀 교육 문제 등에 도움이 필요하단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역사회와 같이 원탁회의를 꾸려서 지역의 문제로 드러냈고, 모금활동 등을 진행했어요. 이 과정에서 안산희망재단이 어떤 역할을 할 건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지역에도 알려졌죠.
작년에 세월호 공식 모금기관으로 등록을 하면서 모금을 하게 됐어요. 안산에서 세월호 관련 모금을 모으는 통로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안산희망재단 두 군데였어요. 모금 규모는 저희 쪽이 훨씬 작지만, 지역사회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유가족분들에게 적절하게 쓰일 수 있도록 할 수 있었고, 필요 이상의 절차도 걷어낼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지역재단으로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뿐만 아니라 지역 내외부 네트워크도 많이 만들어졌어요. 다른 지역에 계신 분들이 “유가족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 싶은데 어디에 문의하면 되나요?” 라고 물으면 “안산희망재단에 연락해 보세요.”라고 이야기해 주는 분들도 생겼어요. 저희가 세월호 유가족분들의 활동에 결합하고, 행정에서도 관련 부서와 소통하면서 필요한 부분을 지원할 수 있었어요.
희망 :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 어떻게 움직이기 시작하셨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이진경 : 세월호 사고 후 토론회를 두 번 진행했어요. 그리고 1000인 원탁 토론회를 준비했어요. 1000인 원탁 토론회는 굉장히 오래 준비했어요. 84개 기관이 함께 추진했고요. 자칫 ‘시민단체에서 하는 사업’만으로 보이지 않도록 천 명의 시민을 조직할 때 다양한 층이 두루두루 참여하도록 애썼어요.
그 사이에 외부 지역 사람들을 통해서 안산 시민들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실제로 그런 부분이 표출되기도 했고요. 천 명을 모아서 토론을 해보니 안산 시민들이 굉장히 분노에 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토론회를 하기 전에 이천 명 정도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어요. 세월호 이후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할 수 있는 게 뭐 없다는 무력감’과 ‘정부에 대한 불신’, ‘미흡한 대책으로 인한 불안감과 우울감’을 굉장히 많이 꼽으셨어요.
토론회를 하면서 그 내면에 한 발 더 들어가니까 아주 깊은 곳에는 사고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가 강하다는 게 드러났죠. 그 표현방식이 무기력이나 우울감으로 나타난 거였어요. 이 분노를 우리가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고민이 되었어요. 진상이 밝혀지지 않아서 이웃과의 관계도 어려워지고, 가족에게 미안함도 있는 거고, 장사가 안 되는데 세월호 사건 탓이 아닌 줄 알면서도 분위기가 바뀌면 좀 나아질까 갈등하게 되고요.
시민들이 겪고 있는 갈등과 힘겨움의 원인이 진상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확인하게 되었죠. 그런데 진실을 밝히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좀 위축되기도 했어요. 이제 1년이 되어 가는데 토론 결과를 많은 사람들과 더 공유하고 나서 1주기를 준비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어요.
희망 : 토론회 분위기는 어땠나요?
이진경 : 토론회에 세월호 유가족분들에게 우호적인 사람만 참석한 것은 아니었어요. 서로 상처받는 일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도 했어요. 공식적으로 유가족대책위와 같이 주최하진 않았지만 개별적으로 참여한 유가족분들이 있었거든요. 전국적인 간담회 같은 곳은 대부분 우호적인 분들만 초대하니까 같이 걱정해 주는 분위기였는데, 정작 안산 시민들을 만났는데 모두 우호적인 분위기가 아니니까 상처를 받은 부분도 있었을 거예요. 토론회에서 안산 시민들의 마음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표출되긴 했지만 ‘아픔을 같이 하고 있구나’를 확인할 수 있었어요.
안산 시민들은 많이 답답하고 힘든데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어요. 어느 시점이 지나면서 가족한테 이야기기하기 어렵고, 친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는데, 아예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자리였던 것 같아요.
희망 : 세월호 관련 배분사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이진경 : 유가족분들에게 직접 지원되길 바라는 성금이 많아요. 그런데 유가족분들은 성금을 안 받으시잖아요. 대신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지원하고 있어요. 아름다운재단에서 진행하는 기록사업이라든지, 복지관 네트워크 등 안산에 있는 지원기관을 통해서 유가족분들께 필요한 지원을 해 드리는 거죠. 물론 배분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서요. 최근까지 긴급하게 필요한 일상적인 지원들을 해 드렸어요. 유가족분들이 도보행진을 했을 때 공식적으로 어디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저희가 지원해 드렸어요.
그런데 언제까지 이런 방식으로 지원할 수는 없잖아요. 남은 성금은 유가족분들이 일상에 돌아가서 생활을 할 때 필요한 부분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일차적으로 피해 가족이 많은 지역에서 주민사업이나 이웃들이 함께할 수 있는 사업을 지원하려고 해요.
희망 : 향후 세월호 유가족분들이 지역사회에 융화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텐데요, 재단에서 어떻게 지원하실 계획인가요?
이진경 : 그건 재단이 혼자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지역주민분들과 유가족분들을 만나고 있어요. 유가족분들이 그런 말씀을 하더라고요. “이웃들이 우리가 너무 아플까봐 차마 위로의 말도 건네지 못하고 있는데, 그게 또 힘들다.”고요. 아프고 슬픈 감정을 이웃들과 자연스럽게 나누고 싶은데 서로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활동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사랑방 모임’을 만들었어요. 세월호 유가족분들이 가장 많은 동이 세 동이 있거든요. 그 중 하나인 고잔동에서 먼저 하고 있어요. 기억저장소, 교육공동체 같이 지역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몇 개의 단위들이 있어요. 이렇게 서너 명에서 열 명 남짓 모여서 일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하면서 뭘 하면 좋을지 상상하고 있어요.
뭘 할 지 딱히 잡히진 않았지만, ‘우리 아이들이 화가 날 때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 있는 노래방을 만들까?’, ‘누구나 와서 먹을 수 있는 밥집을 만들까?’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어요. 안산에 관심 가지는 예술가분들이 굉장히 많아서 그분들이 안산에서 무언가 할 수 있는 장을 만들까도 고민하고 있고요. 안산 시민이나 외부 지역 시민들이 분향소를 다녀와서 먹먹한 마음을 갖는데 할 일이 없어요. 그 마음을 가지고 유가족분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도 하고요. 서두르지 않으려고 해요. 어느 순간 누군가가 다 준비한 사업에 재단이 갑자기 나서서 “우리가 성금 이만큼 있으니까 드릴게요.” 하는 게 아니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지역의 일원으로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희망 :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여러 활동에 보이지 않게 많이 참여하고 계시네요.
이진경 : 개인적으로는 세월호 사건이 있었을 때 지역재단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행정이나 중앙재단에서는 지원할 수 없는 영역이 있으니까요. 절차상으로도 좀 더 융통성 있게 접근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요.
희망 : 그게 지역재단의 역할인 것 같아요. 지역의 필요를 적극적으로 발굴하려고 토론회를 개최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네요.
이진경 : 지역에는 굉장히 많은 필요들이 묻혀 있는데, 그것을 찾아내는 방법 중 하나가 토론회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복지 분야와 네트워킹을 계속 하고 있어요. 지역주민들의 필요를 찾아내는 것이 지역재단의 역할인데 쉽지는 않아요.
지역에 계신 소상공인분들이 기부를 많이 하세요. 그분들의 가장 큰 바람은 당신들이 십시일반 기부한 돈이 정말 필요한 곳에 사용되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기존의 큰 단체에 기부하면 어디에 어떤 사람들에게 어떻게 지원되는지 알기가 힘들죠. 이런 부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인 것 같아요.
희망 : 그런 일들을 하려면 품이 많이 드실 텐데요, 두 분이서 그 많은 네트워킹을 다 하시나요?
이진경 : 오현주 간사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안산에 오래 살아서 기본적으로 가진 관계망들이 있어요. 우리가 가진 관계망을 활용하고요. 이사님들이 끌어주시는 자원도 있지요. 이사님들의 기여도와 역할의 힘도 커요. 많은 재단들이 모금 수수료로 운영을 하는데, 저희는 작년까지 모금 이자로 운영비를 충당하지 않았어요. 이사님들이 필요하면 그때그때 주머니를 털어서 목돈을 내주셨죠. 매달 이사회비 10만 원씩을 주시면 그걸 모아서 운영비로 사용하고 있어요.
희망 : 세월호 사고 이후에 안산희망재단의 움직임을 보면서 지역재단의 역할이 이런 거구나, 이런 역할 때문에 지역에 지역재단이 꼭 필요하구나 생각하게 되었어요. 희망제작소도 지역재단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하겠습니다. 긴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인터뷰 및 정리_ 이원혜 시민사업그룹 연구위원 / topcook@makehope.org
우성희 시민사업그룹 연구원 / sunny02@makehop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