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적 지역경제 모델을 찾아서-목민관클럽 연수 후일담 ②
이탈리아는 관광으로 유명하지만 2021년 총 수출액이 6,886억 달러로 한국(6,450억 달러)과 비슷한 제조업 국가이기도 합니다. 부존자원이 빈약하고 국내시장 규모가 협소해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구조가 한국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산업구조는 상당히 다릅니다. 한국은 10대 수출품목이 82.9%를 차지하는데, 이탈리아는 50.96%를 차지합니다. 이탈리아 전체 기업의 99.9%가 중소기업입니다. 약 430만개에 달하며, 전체 고용의 80%를 차지합니다. 즉, 소규모 기업들이 다양한 제조업 분야에서 경쟁력을 가지며, 수출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목민관클럽이 볼로냐에 주목한 까닭입니다. 작은 기업들이 협동조합과 산업클러스터를 통해 생존하는 비결을 확인하려고 이탈리아 중북부 에밀리아-로마냐주로 향했습니다.
협동조합 서점 한 켠에 식당이 있는 까닭은
에밀리아-로마냐주도 볼로냐시 중심가 마조래 광장에 자리잡은 협동조합 서점 암바시아토리, 옛 극장 건물을 리모델링한 3층 짜리 서점인데 특이하게 2층과 3층 한 켠에 와인 진열장과 식당이 자리했습니다. 3층엔 30여명 정도 참여할 수 있는 세미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협동조합 서점인 암바시아토리는 알리안차3.0(Coop Alleanza3.0) 협동조합이 2008년 이탈리아 전통 농식품 회사 이틀리(Eataly)와 협력해서 문을 열었다. 알리안차3.0협동조합은 2006년부터 이탈리아 전역에 도서문화 증진을 목적으로 서점협동조합(Librerie.coop)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볼로냐시는 특이한 서점 허가조건을 걸었어요. 음식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라는 것이었죠. 책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통음식도 중요한 문화자원으로 본 것이죠. 그래서 알리안차3.0협동조합이 전통식품 및 전통 조리방법을 표방하는 Eataly와 협력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알리안차3.0은 기존에 협동조합이 없는 영역으로 사업을 확대하면서 서점과 음식이라는 이종간의 결합도 주저하지 않는 전략으로 새로운 비즈니스 영역을 개척해 왔습니다. 특히 서점협동조합(Librerie.coop)은 알리안차3.0 협동조합의 200만명에 달하는 조합원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기 때문에 10여년 만에 이탈리아 전역에 서점 31개를 만들 수 있었어요. 우리도 100만여 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한살림과 아이쿱 같은 생협이 기존 인프라를 활용해 새로운 협동경제를 확산한다면 어떨까요? 상상해 봅니다.
세계 최대 규모 농식품 테마파크, 피코 이탈리 월드
두 번째 방문지는 2017년 11월 문을 연 세계 최대 농식품 테마파크 피코 이탈리 월드(FICO Eataly World)입니다. 이탈리아 최대 소비자협동조합인 알리안차3.0(Coop Alleanza3.0)과 이탈리아 최대 농식품도매시장인 볼로냐 농식품시장(CAAB), 식품건강 관련 사회보장기금(Enpam), 국립 수의학복지지원기관(Enpav), 지역 대학 등이 손잡고 이탈리아 농업과 농식품 산업의 부흥을 목표로 개장했습니다. 10만 제곱미터 면적에 육류·치즈·파스타·와인·맥주·아이스크림 등 농식품 가공공장과 레스토랑, 농식품마켓, 동물 사육장과 식물 재배지가 있습니다. 농식품 관련 체험 30여 가지와 50여 개 교육 과정을 운영합니다. 재밌는 것은 이러한 공간의 토지 소유권이 볼로냐시에 있으며, 운영사는 임대료를 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피코 이탈리 월드 입구에 들어서니 건초더미 위에서 한가롭게 되새김질을 하는 양과 당나귀가 눈에 띄었습니다. 먹이주기 체험으로 당근과 건초를 받아먹는 우리나라 체험농장의 동물들이 떠올랐습니다. 이런 곳에서 동물복지를 떠올릴 줄이야.
내부는 파스타와 와인, 치즈, 발사믹식초, 젤라토 등 에밀리아-로마냐 주를 대표하는 식재료들로 꾸몄습니다. 생산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공장도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전시장 곳곳에 치즈동굴탐험, 파스타 회전그네 등 식재료를 테마로 한 놀이시설을 들여놔 아이를 동반한 부모들에게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볼로냐시는 어떻게 이렇게 대규모 농식품테마파크를 열 수 있었을까요? 에밀리아-로마냐주 차원에서 발사믹 식초나 파마산 치즈 등 지역 특산물을 제도적으로 보호하고 품질 관리도 철저히 해 수출에 힘써왔습니다. 지역 농식품은 가공 설비, 물류, 포장 등 연관산업 발전의 핵심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협동과 산업클러스터를 지원하는 조직
통일 이전 도시국가들의 각축장이었던 이탈리아는 도시별로 자급자족을 해야 했기 때문에 소상공업이 발달했습니다. 500만 명의 중소기업인들이 고용인 10명 미만의 작업 기업을 운영합니다. 이들 소기업들은 상당수가 아르티잔이라고 하는 수공예 장인들이 공영하는 공방형 기업들인데, 기술력이 좋아 세계적으로 수출도 많이 합니다. 다만, 규모가 영세하기 때문에 회사를 꾸려가는 데 필요한 세무나 회계 등을 지원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1945년 중소기업인 세 명이 합심해 출발한 것이 CNA입니다. 우리로 치면 중소기업인연합회 같은 조직이라고 할까요.
이탈리아 산업클러스터 지원기관을 이해하기 위해 들른 볼로냐 CNA는 지역사무소 중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사무소라고 합니다. CNA 전체 회원수는 약 80만명이나 되며, 볼로냐는 1만3천여 명에 달합니다. 이들은 회원 기업들의 회계관리와 세무처리, 급여관리, 자금조달, 기술력을 높이기 위한 대학 및 공공연구기관과의 협력을 지원합니다. 또 해외 시장 조사, 수출입 실질적인 업무를 돕습니다.
CNA가 개별 소기업들을 직접 지원하는 조직이라면, 아르떼르(ART-ER)는 기업의 혁신, 스타트업 촉진, 지역내 인재를 발굴하는 역할을 합니다. 1973년에 설립된 에밀리아로마냐주 산업진흥조직인 에르베트(ERVET)와 1985년에 설립된 혁신담당 조직인 아스테르(ASTER)를 합쳐 2019년에 출범했습니다. 두 조직의 통합으로 아르떼르는 유럽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 직원이 210명이고 2,200만 유로 규모의 자금을 운영합니다. 볼로냐대학을 비롯한 인근 지역 5개 대학, 국립리서치센터와 국립기술센터 등 국가 리서치 기관의 볼로냐 지부와 함께 연구·조사 활동을 합니다. 에밀리아로마냐 지역의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프로모션을 벌이고 고급인력 유출을 막기 위한 제도와 방법을 고안합니다. 생태전환과 혁신활동도 다양하게 추진하고 있는데요, 무엇보다 ‘사람’에 집중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역에 위치한 국립연구소나 대학 등이 지역의 기업을 더 직접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주 차원에서 연구인력을 선발해 각 연구기관에 파견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연구소의 미션이 아니라 지역 기업을 위한 연구에만 집중합니다.
혁신을 촉진하는 프로젝트 ‘인크레디볼!(Incredibol!)’
볼로냐시는 2010년 창조적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볼로냐시가 운영하고 에밀리아-로마냐주가 공동으로 자금을 지원합니다. 사업이나 활동공간을 제공하거나, 1회적으로 1만 유로 규모의 자금을 조건없이 지원합니다. 선정된 사업에 대해 컨설팅도 하면서 스타트업이 규모를 키우도록 돕습니다. 2010년 이래 볼로냐시는 지원서 630개를 받아서 100여 개를 선정했고, 해당 프로그램으로 볼로냐지역에 40개가 넘는 시소유 빈공간을 개조해 젊은 기업가들과 프리랜서들이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으로 젊은 기업가들, 예술가, 소기업들을 도심의 빈공간으로 끌어들여 문화와 도시재생이 결합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목민관클럽은 최근 인크레디볼 프로젝트에서 수상한 기업으로 스테인드 글래스 복원 공방인 감베리니와 섬유공방 에펠리디를 방문했습니다.
감베리니는 카밀라 체볼라니 대표가 설립한 공방으로, 애초 볼로냐시 인근의 오래된 스테인드글래스를 청소·복원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이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스테인드클래스를 보다 현대적으로 해석해 인테리어 소품, 특히 야외용 가구 제작 등에 활용하는 사업기획안을 만들어 수상하였다.
에펠리디는 엘리자 실베스트리 대표가 설립한 직물 공예품 공방으로 2020년부터 에밀fldkfhaksi 지역에 있는 섬유공장에서 나는 자투리 천연섬유와 실을 활용해 직물과 의복을 만들어왔다. 소각되는 자원을 재활용해서 제품을 만들었는데, 인크레디볼 수상으로 자금지원뿐만 아니라 내년도에 생산할 품목 선정 등 전문가 자문도 받을 수 있어 좋았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비결은 연대와 협력
한국과는 역사적 배경과 처한 현실이 다른 이탈리아 사례를 그대로 벤치마킹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원이 부족한 국가에서 초국적 대기업들이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도 작은 소기업들이 생존하는 비결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먼저, 연대와 협력입니다. 이탈리아는 1968년 분산되었던 권역단위 협동조합을 1968년 Coop Italia로 통합했습니다. 그러면서 대규모 산업자본의 독점에 반대하는 다양한 층을 수용했습니다. 소규모 협동조합간 합병으로 규모화를 추구하고, 점포를 현대적으로 바꾸고, 유통혁신을 꾀했습니다.
두 번째, 클러스터를 통한 전문화, 분업화입니다. 비슷한 산업끼리 집적화를 통해 기술력을 높이고, CNA같은 연합조직으로 소기업간 협력을 촉진했습니다. 업무간 분업화로 고도의 기술력을 유지하면서도 시장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왔습니다.
세 번째, 끊임없는 혁신입니다. 암바시아토리 사례처럼 협동조합이 가치를 공유하는 다른 업종과의 연대와 협력을 꾀하거나, 인크레디볼 프로젝트처럼 새로운 혁신 자원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여기엔 개별기업들의 자구 노력과 함께 정부나 연구소, 대학 등의 활발한 민관협력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송정복/자치분권센터 센터장 wolstar@makehop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