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촌에 가면 빈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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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문을 연 수원시 평생학습관은 희망제작소가 위탁 운영하는 공공교육기관입니다. ‘서로 배우며 함께 성장하는 정다운 우리 학교’를 지향하는 수원시 평생학습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여러분께 그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이번 평생학습초점에서는 창의적 커뮤니티의 다양한 사례를 만나보고자 합니다. 학습이나 문화예술, 공간, 일 등의 다양한 매개체를 통해 만들어지는 커뮤니티와 그 안에서 각양각색 모습으로 발현되는 학습의 절묘한 만남을 기대합니다.

[평생학습 초점] 창의적 커뮤니티 만들기 (2) 해방촌에 가면 빈집이 있다
 
빈집의 시작, 빈집들이

2008년 2월, 해방촌 게스트하우스 ‘빈집’은 아주 단순한 설정으로 시작됐다.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상업적인 게스트하우스(guesthouse)가 아니라 손님들이 주인이 되는 손님들의 게스트하우스(guests’ house)가 바로 그것이다. 세 명의 백수들이 방 세 개짜리 평범한 가정집을 임대해서 살면서 문을 열어 놓은 것이 시작이었다. 빈집의 문을 열고 아직 이삿짐을 나르지 않아서 정말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정말로 빈집에서 파티를 열었다. 보통의 집들이처럼 집주인이 집을 꾸며 놓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과는 달리, 이 파티는 비어 있는 집에서 누가 이 집의 주인으로 살 것인가를 얘기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빈집들이라 했다. 파티는 열심히 놀 작정을 하고 온 친구들 덕분에 2박3일 동안 시끌벅적하게 진행됐고 20~30여 명이 잠을 자고 갔다. 여기서 빈집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이때의 에너지와 관계들이 기반이 되어서, 친구들과 친구들의 친구들에게 소문이 퍼져서 장기 투숙객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빈집은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운 주인들을 들이는 집으로 여전히 빈집들이 중이다.

빈집에 장기 투숙객들이 살면서 단기 투숙객들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방 세 개를 여자방, 남자방, 손님방 이렇게 정했다. 장기 투숙객들이 여자방 남자방에 나눠 살고, 처음 오는 사람이나 단기로 머무는 손님의 경우를 배려해서 손님방에 머물 수 있도록 했다. 손님방은 단기 투숙객들이 없을 때는 장기 투숙객들이 혼자, 커플끼리, 모임끼리 같이 쓰는 다목적 방으로 활용했다.

장기 투숙객들이 모두 백수들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소비를 줄이자는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거의 모든 밥을 채식 위주로 만들어 먹고, 전기와 물을 아끼고 재사용하고, 쓰레기더미 속에서 쓸 만한 물건들을 찾고, 이동은 자전거로 하고, 집과 동네와 뒷산에서 놀 수 있는 궁리를 하면서 지냈다. 채소를 살 돈을 아끼려고 옥상텃밭 농사를 시작했고, 술값을 아끼려고 막걸리와 맥주를 만들어 먹었다. 물을 아끼고, 거름을 얻고자 옥상 직립 변기를 만들었다.

소비를 줄이면서도 풍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직접 생산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스스로 배우고 익혀서 생산할 수 있는 것들을 늘려가는 과정은 그것만으로도 삶의 큰 즐거움이었다. 집 짓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친구가 선생님이 되어 목공수업을 했다. 자투리 나무로 집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작은 가구들을 만들었다. 면생리대를 만들어 사용하던 친구가 선생님이 되어 쿠션 커버를 같이 만들고, 천들을 붙여서 커튼을 만들었다. 여럿이 어울려  놀다 보니 술을 마실 일이 잦았다. 그런데 술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술 빚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을 20권 정도 도서관에서 빌려와 함께 읽고 실습하며 맛있는 막걸리를 만들었다. 맥주를 만들 줄 아는 단기 투숙객이 머무르게 되면서 드디어 하우스 맥주의 세계도 열렸다. 된장, 간장을 만들고 태양열 조리기를 만들어 보는 등 살림과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함께 습득하는 과정은 모두에게 학습의 장이자 즐거운 놀이였다.

[##_1C|1243241002.jpg|width=”500″ height=”330″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_##]                        ▲<닷닷닷> 빈집에서 보름과 그믐날 밤에 하던 캔들 나이트 모습                                                      
                            에너지에 대해 생각해 보며,
시와 음악 조용한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


[##_1C|1333092312.jpg|width=”500″ height=”332″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_##]                         ▲<옥상텃밭> 허브들과 잎채소, 가지와 호박 등을 키워서 함께 먹는다.

 [##_1C|1200990750.jpg|width=”500″ height=”375″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_##]                         ▲장 담그던 날, 첫 간장을 만들던 날(좌)


[##_1C|1368203387.jpg|width=”500″ height=”375″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_##]                         ▲ 명절에 방문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두를 빚어 먹었다.


빈마을이 생기다

빈집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고, 누구나 주인이기 때문에, 처음 들어올 때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고,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정원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좁아도 들어오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들어와서, 살 수 있을 때까지는 살아본다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렇게 8개월이 지나자 10명이 넘는 장기 투숙객들이 살게 되었다. 손님방은 물론 거실에도 장기 투숙객들이 살게 되면서 단기 투숙객을 받는 일이 어려워졌다. 빈집이 꽉 차버렸다. 빈집이 더 이상 빈집이 아니게 되었다.

더 이상의 손님, 더 이상의 주인을 받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집을 더 늘릴 것인가? 논의 끝에 우리는 2,000만 원을 더 대출받아서 집을 구하기로 했다. 사람이 더 올 수 없으면 빈집이 아니기 때문이고, 먼저 온 주인만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결국 빈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빈집을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살림집을 구하느니 방이 딸린 가게에서 장사하면서 사는 게 낫다는 부동산 주인의 제안으로 아예 가게를 구하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으로 집을 구하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가게에 대한 꿈을 접은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 빈집과 5분 거리에 두 번째 빈집을 계약했다. 보증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전셋집이 아니라 월셋집으로 구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 계약한 집은 방이 더 작고, 더 오래된 집이었지만 월세와 이자를 더 하면 첫 번째 집보다 월 주거비는 더 비쌌다. 독립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그룹이 결합해서 방 하나를 쓰고, 첫 번째 집과 재정을 통합해서 운영하기로 했다. 집이 두 개가 되면서 언덕 아래 첫 번째 집을 아랫집, 두 번째 집을 윗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석 달이 안 돼서, 세 번째 집을 계약했다. 이 집은 빈집에 종종 놀러오던 친구들 세 명이 돈을 모아 빈집 근처에 집을 구하기로 하면서 시작됐다. 커플이 한 방을 쓰기로 결정하고, 나머지 한 명도 곧 애인과 같이 살기로 하면서 두 커플이 두 개의 방을 쓰고, 하나의  큰방을 공부방 또는 작업실로 개방해서 썼다. 아랫집과 윗집 사이에 있어서 옆집이라고 불렀다. 옆집은 전셋집으로 재정적으로도 독립적으로 운영됐고 운영도 독특한 점이 있었다. 옆집이 생긴 것은 빈집과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기 때문에 빈집처럼 운영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인 취지에는 공감하고 또 개인적으로 친한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빈집이라고 스스로 불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연이어 네 번째 빈집이 생겼다. 이 집은 원래 같은 동네의 이주 노동자와 이주 백수들이 살던 아주 오래된 낡은 집이었다. 방이 4개인데도 엄청 싸서 각각 독방을 썼다. 두 명이 돈을 모아서 전세금을 내고, 한두 명이 더 살았는데 아주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분위기여서 어느 정도는 이미 빈집과 같은 집이었다. 주로 영어로 대화하고, 미국, 캐나다, 네팔, 콜롬비아, 스리랑카 등 다양한 이주민들과 내국인들도 거쳐 갔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이사를 가면서 보증금을 돌려받아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쩌면 집을 빼고 흩어져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윗집에 살던 한 친구가 보증금을 빌려줘서, 그 돈을 나가는 친구에게 주고 재계약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빈집 사람들도 자유롭게 오가고 독방을 쓰고 싶은 친구들이 이사가기도 하는 집이 되었다. 집 이름은 원래 계약자의 이름을 따서 닉산재라고 불렸는데, 빈집이 되면서 가파른집으로 바꿨다.

이로써 빈집이 시작된 지 1년 정도 만에 집은 네 채로 늘어났고, 장기 투숙객의 숫자는 20명을 넘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빠른 확장이었다. 그래서 각 집별 회의 외에도, 모두가 모이는 마을회의를 한 달에 한 번씩 열기로 했다. 빈마을의 시작이었다.

빈마을은 한동안 집 4~5개, 장기 투숙객 20~30명 정도의 규모가 유지됐다. 함께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각종 사건과 사고, 놀이와 작업, 모임과 동아리, 우정과 애정, 오해와 갈등은 자연스럽게 많아졌다.

2013년 해방촌에 위치한 빈집의 수는 어느새 7개이다. 장기투숙객 30~40명 정도가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다. 같이 배우고 직접 만들고 함께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들은 여전히 빈집에서 진행 중이다. 모임들은 생겨났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하지만 혼자 할 수 없을 때, 같이 하면 더 쉬울 때, 더 즐거울 때 힘을 보태자고 얘기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을 때는 아침에 함께 책 읽을 사람들을 모으거나 108배를 할 사람을 모아서 몇 달씩 아침 시간을 같이 보냈다. 노래를 하고 싶을 때는 기타와 멜로디온과 북을 들고서 같이 노래를 연주하는 밴드를 구성하고 엉성하지만 친구들에게 공연을 선보이기도 한다. 

다른 지역의 모임들과의 교류도 열심이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만들어 서로를 초대한다. 각자의 어려움들이나 즐거운 경험들을 나누고 따라 해보다 보면 몰랐던 것들을 알고 배우게 된다.

해방촌 빈가게

빈집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재능이 모이면서 수많은 일과 놀이들을 벌여 왔다. 이를 통해서 소득수준과 소비수준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풍요로움을 누리곤 했다. 하지만 최소한의 수입을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비롯한 임금노동을 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우리가 집에서 하는 작업들을 마을로 확대하면, 조금의 수입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궁리를 하게 됐다. 그렇게 6명이 의기투합해서 동네에 작은 점포를 구했다. 빈고에서 보증금은 대출받고, 인테리어와 설비에 필요한 비용은 조금씩 출자해서 모았다.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은 조금씩 달랐지만, 동네 작은 1층 가게 공간을 활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자고 덤벼들었다. 기본적으로 낮에는 카페를 저녁엔 술집을 운영하지만, 한편에는 공동구매를 할 수 있는 생협과 재활용 제품 판매 코너를 두었다. 집에서 할 수 없었던 각종 모임과 공연, 장터도 함께 했다. 그렇게 해방촌 빈가게(이하 빈가게)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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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촌 빈가게


마을에서 가게를 시작하면서 집이 아닌 지역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빈집이 있는 해방촌은 서울의 한복판 남산 아래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1945년 해방 이후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과 지역에서 올라온 빈민들이 자생적으로 만든 판자촌이었다. 사실 해방촌은 집값이 싸다는 것 말고는 빈집 사람들에게 큰 의미는 없었다. 그러나 빈가게에서  만나는 마을 사람들로 인해서 해방촌이라는 마을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쇠락한 마을에서 소자본으로  장사를 해서 충분한 수입을 얻는 것은, 장사만을 목적으로 해도 어려운 것이었다. 더군다나 사업 경험이 없는 아마추어들이 그것도 서로 싸우고 조율하면서 잡다하게 만들어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신뢰와 협력도 위협했고, 생활도 어려워진 탓에 하나 둘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첫 번째 가게는 마지막 남은 사람들이 포기하면서 그만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 즈음에 나온 더 크고 더 동네 중심지에 있는 가게가 나왔고, 또다시 몇 사람이 홀린 듯 이전했다. 컨셉은 비슷한 협동조합이지만, 이번에는 좀 더 다수의 조합원을 모으고, 빈마을보다 해방촌 주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여전히 장사는 어렵다. 하지만 지금도 여러 가지 활로를 찾아서 새로운 모색들을 하고 있다.

빈집이 궁금하다면 당신이 직접 살아보기를 권한다. 빈집은 언제나 당신을 환영한다. 국가와 자본과 공동체를 넘어서 우리가 함께 자치, 공유, 환대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지구라는 커다란 집의 한 식구가 아니겠는가?

살구를 통해서 보는 빈집생활

살구는 요즘 영 의욕이 없다. 여름 무더위 때문에 컨디션도 나빠지고 덕분에 일상이 게을러졌다. 모임이나 회의에 나가는 것이 꽤 귀찮아지면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충청도에서 사는 친구 A가 2주 전에 방문했다. ‘은행과 돈을 주제로 공부를 하고 설문지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생각을 묻고 비교해 보는 것을 같이 해보자’라던 약속을 지키라는 닦달을 하러 찾아온 것이다. 같이 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미룬 미안함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고 결국 이번 주 주말에 그 모임은 다시 재개된다. 이 모임은 12월 연말에 설문지 결과를 발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살구와 다른 빈집에 사는 B씨는 밤마다 꾸준히 남산 산책을 한다.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머리를 맑게 하고 몸을 움직이는 산책은 일상생활에서 휴식과 운동으로 좋다는 것을 아는 살구지만 요즘 상태라면 꼼짝하고 싶지 않다. 어느 날 B씨는 산책 가는 길에 살구가 사는 집에 무심한 듯 들른다. 그날 살구는 당연히 따라 나서지 않았다. B가 무심이 들리기를 몇 차례… 어젯밤 남산으로 산책을 나간 사람은 살구를 포함해 3명이 되었다. 남산을 오르는 길에 빈집에 살진 않지만 이웃하는 좋은 친구도 만나고, 셋이서 요즘의 관심사를 이야기 나누며 약간의 땀도 흘린 산책을 마쳤다.

빈집에 단기 투숙객으로 4~5년 드나들던 C는 최근에 장기 투숙을 시작했다. 장기 투숙을 시작하기 한 달 전부터 빈집 게시판에 함께 영어공부를 하거나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 강의를 공부할 사람을 찾는다는 게시물을 올렸다. 빈집에 살거나 해방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고, 오늘 아침 여섯 명이 함께 하는 영어공부 모임이 시작되었다. 영어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던 10대 때부터 뭐 보듯 괴로워했던 살구는 ‘하고 싶지 않다.’와 ‘하겠다고 생각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라는 생각을 동시에 하고 있다. C는 오늘도 살구에게 얘기한다. “어디 여행 가서라도 좀 쓰게 기본문법만 같이 할까??”

글_ 살구 (해방촌 빈연구소)

* [평생학습 초점] 창의적 커뮤니티 만들기

(1) 애물단지 폐교가 장난감 미술관으로
(2) 해방촌에 가면 빈집이 있다

* 해방촌 빈집/빈마을 홈페이지
* 수원시 평생학습관 홈페이지 바로가기
* 평생학습 아카이브 ‘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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