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세코 홈스테이가 남긴 것

2011년 1월, 공감만세의 필리핀 공정여행에 참가한 동화작가 이선희님의 여행 에세이 ‘편견을 넘어’를 1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공감만세는 공정여행을 진행하고 있는 청년 사회적기업으로 희망제작소의 청년 소셜벤처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희망별동대 1기를 수료했습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조금 더 많은 분께 공정여행을 알리고, 또 다른 여행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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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넘어 (10) 바세코 홈스테이가 남긴 것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공정여행 코디네이터가 500페소 (약 만 5,000원) 정도의 돈을 주며 홈스테이 가족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사라고 했는데 막상 무엇을 얼마만큼 사야할지 어리둥절할뿐더러, 다니는 자꾸만 우리에게 무엇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다니의 가족에게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했지만, 다니의 입장에서는 손님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마음은 서로 그러할진대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함만 커져갔다. 결국 입에서 나오는 대로 “Rice, Egg, Chicken, Banana….” 영어 기초 단어들을 나열했다. 다니는 우리가 말하는 건 무조건 “ok!” 했다.

그런데 다니의 입에서 알 수 없는 말이 자꾸 튀어나왔다.
“꼭”
분명 다니는 “꼭”이라고 했다.
“꼭?”
쌀을 사러 가는데 “꼭” 그래서 꼭이 쌀인가 했더니, 달걀을 사러 갈 때도 “꼭”, 치킨을 사러 갈 때도 “꼭”이라는 것이다. 친구와 나는 도대체 “꼭”이 무엇인지 내내 의문이었으나 물어도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 돌아왔고 그래서 우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꼭”에 대한 의문을 묻어두기로 했다.

[##_Gallery|1034925401.jpg|바세코에서 만난 얼굴들|1133708644.jpg|바세코에서 만난 얼굴들|1295064139.jpg|바세코에서 만난 얼굴들|width=”400″ height=”300″_##]
장 본 것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니의 여동생인 나야는 아직 퇴근 전이었다. 집에는 나야의 아들, 딸인 크리스티앙과 엔젤이 있었다. 우리는 텔레비전이 있는 구멍가게의 식탁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나야가 없는 것이 문제인 듯 했다. 다니와 크리스티앙과 엔젤이 달걀을 두고 한참 의논을 하더니 어디선가 커다란 프라이팬을 구해와 우리에게 줄 달걀 두 알을 부치기 시작한 것이다. 간신히 식탁이 차려졌다.

다니와 가족들이 크리스마스에 즐겨 먹는다는 치킨 한 마리와 달걀 프라이로 푸짐한 저녁을 먹었다. 우리가 밥을 먹는 동안 나야가 돌아왔다. 환한 미소 때문일까. 나야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전혀 낯설지가 않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야가 우리를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구멍가게 맞은편에 살림집이 있었다. 우리가 묵을 방은 2층에 있는 큰 딸 방이라고 했다.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가지런히 펼쳐 놓은 이불 위에 모기장까지 펼쳐놓은 상태였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집에 찾아 온 손님을 정성스럽게 대접하려는 다니와 나야의 따뜻한 마음이 물씬 느껴졌다.

원래는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한국 드라마를 함께 보려고 했다. ‘제빵왕 김탁구’가 ‘Bakery King’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그날 저녁에 한다며 함께 보자고 했는데 알고 보니 다니가 방영시간을 잘못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자기는 서운하여 2층 방에 모여 함께 놀기로 했다. 나야의 큰 딸 제인과 둘째 크리스티앙, 셋째 엔젤과 둘러앉았다.
 
[##_1C|1360389253.jpg|width=”500″ height=”338″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가게를 지키고 있는 나야의 셋째 딸 엔젤_##]제인과 엔젤은 한국 가수들에 대해 흥미가 많았다. 2NE1,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얘기를 하다가 어느새 한국어 공부를 하게 되었다. 끼앙안에서 만났던 드웨인도 그랬지만 바세코에서 만난 어린 친구들도 한국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국어를 배우는 자세가 무척 진지했다. 자음과 모음이 만나 하나의 글자가 되고 하나의 소리를 내는 복잡한 과정을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이 무척 대견했다. 특히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첫째 제인은 끝까지 그 과정을 배우려 애썼다. 크리스티앙과 엔젤은 어렵다며 간단한 인사말을 단순 암기하는 과정으로 옮겨갔다.

때 아니게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데 나야가 과자며 음료수를 잔뜩 들고 올라왔다. 선물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사먹던 불량식품과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었다. 노란 옥수수 알갱이 과자와 달달한 오렌지 맛 주스. 맛도 비슷했다.

어느덧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됐다. 제인에게 방을 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들어와 이불 위에 누웠다. 천장의 서까래가 보였다. 이불이 눅눅했다. 벽에 가운뎃손가락만한 살색 도마뱀이 붙어 있다. 집도 골목도 조용했다. 친구와 나는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우리는 소곤소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공정여행 하는 동안 있었던 일들도 이야기했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이 여행도 끝난다. 14박 15일. 마치 한 달, 일 년을 함께 지내온 것 마냥 서로에게, 그리고 여행에 익숙해진 시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희미하게 “짹짹짹”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밤에 어디서 새가 우나 하는데 서까래 위로 한 마리 쥐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그 소리는 “짹짹짹”이 아니라 “찍찍찍”이었던 것이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친구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계속 쥐가 신경 쓰였다. 쥐가 서까래 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눈으로 계속 쥐를 쫓았다. 친구는 여전히 눈치 채지 못했다. 나는 친구에게 쥐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웅덩이에 발이 빠지는 바람에 그렇잖아도 힘들었을 친구를 쥐 때문에 또 힘들게 하기는 싫으니까. 쥐가 내려오지만 않는다면, 천장 위를 뛰어다니기만 하는 거라면. 제발. 쥐와 도마뱀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와중에도 졸음이 쏟아졌다. 잠이 드는 순간에 깨달은 사실. ‘더러워지면 어떠랴, 무엇이든 부딪혀 보자’ 호기롭던 그 날 낮의 다짐들은 개뿔, 개소리라는 것. 하룻밤도 이렇게 벌벌 떨며 잠이 드니 말이다.

[##_1C|1252094300.jpg|width=”500″ height=”338″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출근 전의 나야_##]다음 날, 나야는 아침부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함께 밥 한 끼 먹지 못한 채 서둘러 출근을 하였다. 식탁 위는 나야가 차린 음식들로 풍성했다. 접시 가득 구운 생선이 있었다. 사실 그 생선은 먹기 좋은 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생선을 굽느라 나야는 그 많은 땀을 흘린 것이다. 나는 생선 한 마리, 그리고 한 마리를 더 먹었다. 물론 내가 생선 두 마리를 먹으면 가족 중 누군가 생선 한 마리를 적게 먹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니와 나야의 대접에 “아주 아주 잘 먹고 갑니다”라는 인사를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다니도 내가 생선 두 마리를 먹자 아주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단 하룻밤의 바세코 홈스테이를 마치고 다시 카발리캇 사무실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나야의 선물이라며 다니가 어젯밤 먹던 과자들을 잔뜩 싸 주었다. 미안하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가는 길에 우리는 다니가 일하고 있는 공부방에 들렀다. 세 평 남짓 작은 교실이 다니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공간이었다.

다니의 입에서 연신 “Mr. Go”, “Korean”, “Thank you”, “I love”라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미스터 고는 필리핀 공정여행을 기획한 공감만세의 고두환 대표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니의 말인즉 공감만세의 도움으로 공부방을 세울 수 있었고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이곳에 나와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너무 고맙다며, 한국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다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힘차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_1C|1127162718.jpg|width=”400″ height=”455″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공부방에서 포즈를 취한 다니 _##]불과 하루 전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했다. 물론 다음 날에도 그의 말을 완벽하게 알아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마음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감사함에 우리도 감사했다. 부디 그가 사는 이 마을이 안전하게 지켜지길 바라며 우리는 서로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카발리캇 사무실 앞에 여행 참가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과연 우리는 살아 돌아왔다. 너무도 잘 살고 돌아왔다. 서까래 위를 뛰어다니던 쥐는 바닥으로 내려오지 않았고, 웅덩이에 빠졌던 발도 멀쩡했다. 생선 두 마리로 채운 배도 든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는 얼굴들을 많이 만나고 돌아왔다.

[##_Gallery|1111622069.jpg|바세코에서 만난 얼굴들|1053429834.jpg|바세코에서 만난 얼굴들|1287901349.jpg|바세코에서 만난 얼굴들|width=”400″ height=”300″_##]

글ㆍ사진_이선희
가늘고 오래 공부한 끝에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다방면에서 부족함을 절감, 불꽃 튀는 경험을 원하던 중 공정여행에 반해 청년 소셜벤처 공감만세의 일원이 되었다.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북촌을 여행하며 아이들이 스스로 동화를 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월간 토마토에서 어른이 읽는 동화를 연재중이다. 
● E-mail: sunheemarch@gmail.co?m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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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만세는
‘자유롭게 고민하고 상상하며 길 위에서 배우는 청년들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 라는 구호 아래, 대전충남 지역에서 ‘최초’로 법인을 설립을 한 청년 사회적기업이다. 현재 필리핀, 태국, 제주도, 북촌, 공주 등지에서 공정여행을 진행하고 있으며 공정한 여행이 필요한, 공정한 여행을 실현할 수 있는 지역을 넓혀갈 생각이다. 공정함에 감동한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보자.  ● 홈페이지:
fairtravelkorea.com  ● 카페: cafe.naver.com/riceterrace


● 연재 목록
1.
나는 왜 공정여행을 떠났는가    
2.
필리핀 ‘골목길 미소’에 반하다  
3. 여자 여섯 명, 수다로 지새운 필리핀의 밤  
4. 끼앙안, 천국보다 평화로운    
5. 이푸가오의 독수리   
6. ‘천상의 녹색계단’ 앞에 말을 잃다
7. 계단식 논은 왜 무너져내릴까
8. 탐아완 예술인 마을, 그리고 바나나
9. 마닐라 빈민지역 바세코의 검은 웅덩이
10. 바세코 홈스테이가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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