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희망소기업’은 희망제작소 소기업발전소가 지원하는 작은 기업들로, 지역과 함께 고민하고  성장하며 대안적 가치를 생산하는 건강한 기업들입니다. 이 연재가 작은 기업들의 풀씨 같은 희망을 찾아 많은 이들에게 알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희망소기업 열 일곱 번째 이야기는 전통소금 자염을 복원한 ‘소금굽는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랜만에 고국 나들이에 나선 세계적인 천재 요리사 ‘장은’. 그녀는 최고의 소금을 얻기 위해 태안 바닷가를 찾았다. 트럭에 식자재를 싣고 전국을 떠도는 또 다른 천재 요리사 ‘성찬’과의 맞대결을 위한 것. ‘장은’은 이제는 잊혀진 우리 전통 방식의 ‘자염(煮鹽)’을 만들기 위해 태안 갯벌에서 소금을 캤다. 그 소금으로 만든 김치는 어떤 맛이었을까?

바로 영화 ‘식객: 김치전쟁’에 나온 태안의 소금밭 이야기이다. 갯벌 흙을 바닷물에 거른 뒤 이를 다시 불을 지펴 소금을 얻는 것이 영화 속 ‘자염’이다. 자염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먹던 소금이다. 이제는 값싼 천일염에 밀려 그동안 우리 주변에서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만, 10여년 전 태안 바닷가에서 역사 속의 이 소금이 되살아났다.

자염, 50년만의 귀향

“2001년 봄이었지 아마? 마을 노인 몇 분을 모시고 갯벌로 갔어요. 그 노인들이 자염 만드는 법을 얘기하시더라고. 줄자를 가지고 이만큼 땅을 파고, 가마솥을 어디에 두고. 뭐 그런 식으로 알려주셨어요. 저희야 그리 하라는 대로 했죠. 그리고 며칠 후, 갯벌에서 퍼다 말린 흙에 바닷물을 넣고 내려 끓였는데, 소금이 나오더라고. 하얀 소금이.”

영농조합법인 소금굽는사람들(대표 신세철)의 정낙추 이사가 이 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태안문화원 이사로 활동하던 정 이사는 태안의 잊혀진 유산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주변 지인들과 의기투합했고, 태안의 대표적 명물이었던 자염을 복원하기로 했다. 자염에 관한 문헌을 찾고, 자염을 직접 만드셨던 어르신들을 만나 복원 과정을 배웠다. 그리고 바로 이날 한국전쟁을 전후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자염’이 복원된 것이다.

”사용자
자염은 염분과 각종 미네랄을 머금은 갯벌 흙으로 만든 소금을 말한다. 갯벌 흙을 해풍으로 말린 뒤, 바닷물을 다시 부어 함수를 만들고, 이를 다시 가마솥에 부어 장작불로 끓이는 등 지난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제조 과정이 까다로워 많은 양의 소금을 생산하기가 어렵다. 3톤의 갯벌 흙을 가지고 채 80㎏의 자염을 생산하기 힘들 정도다.

비록 영화이긴 하지만 태안자염의 소금밭에서 진행된 ‘식객: 김치전쟁’ 촬영에서 배우 김정은의 자염 만들기 촬영 신은 고생스러웠다고 한다. 갯벌에 뛰어든 김정은은 갯벌에 몸을 맡긴 채 자염 만드는 연기를 펼쳤다. 그녀는 영화 홍보차 출연한 한 공중파 뉴스 프로그램에서 자염 만들기의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영화 속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직접 자염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전통방식의 소금을 만들기 위해 소 괭이질에 삽질까지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렇게 정성 들여 만든 소금이 들어간 김치가 우리나라 대표 음식이라는 것이 새삼 자랑스러웠습니다.”

김정은이 우리 김치에서 자랑스러움을 느꼈다면, 정 이사는 태안의 전통을 복원했다는 그 사실에서 자부심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 역시 그랬다. 언론과 학계에서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 다음날인가, 자염 복원 소식이 방송과 신문에 나왔어요. 그랬더니 각 대학 역사학과 교수님들한테 전화가 온 거에요. 지자체 공무원들에게도 연락이 오고. 아무튼 문의전화가 참으로 많이 왔어요. 하지만 저야 농사를 짓고 있었고, 다른 분들도 다 직업이 있으니 각자의 길로 돌아갔죠. 그런데 몇몇 분들이 저희를 가만두질 않았습니다.”


”사용자
사실 정 이사와 지인들은 자염을 복원하겠다는 열망만 있었지, 그 이후에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농사를 짓고, 수목원을 운영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복원 그 자체 보다는 그 이후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복원 행사에 그치지 말고 자염 사업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었다.

“이걸 여러분들이 안 하면, 누가 하겠어요? 서울에서 누가 내려와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어요. 이름만 자염으로 붙이고, 전통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 문화가 사라지는 것 아닙니까? 그동안 여러분들이 주머니 돈 털어서 태안의 생활문화를 복원하겠다는 그 의미가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충북대학교 김의환 교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등을 떠밀었다. 이미 복원한 자염 제조 기술을 가지고 사업에 나설 것을 재촉한 것이다. 그래야 자염 복원이 제 길을 갈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한번도 이러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사업과는 거리가 멀었고, 두려움도 앞섰다. ‘지금 같은 시기에 어디서 일꾼을 얻으며, 어디에 자염을 팔겠어?’ 처음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 교수의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복원을 넘어 사업으로

사실 자염 복원을 지켜본 사람들은 누구나 눈이 휘둥그래진다. 거무튀튀한 갯벌 흙이 하얀 소금으로 변하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그것이 단지 전통 복원의 의미만을 가진다면 일회성 이벤트로만 끝날 수밖에 없다. 의미에 가치가 더해져야 복원된 전통은 그 뿌리를 이어나갈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자염은 분명 지속될 만한 가치를 가졌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정 이사였다.

자염은 제조 방법의 독특한 만큼이나 소금의 성분도 천일염 등 다른 소금과는 다르다. 한 대학 연구소에 의뢰한 결과 자염의 칼슘 성분이 천일염의 그것에 비해 12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칼슘이 높고 마그네슘이 낮으면 허혈성 심장질환이 우려되어 권장 섭취비율이 1:0.5이다. 하지만 자염은 1:1.3으로 매우 이상적인 비율을 보였다.

음식의 깊은 맛을 내는 능력도 탁월한 것으로 나타났다. 구수한 맛과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인 아스파르트산과 글루탐산은 천일염에 비해 2배 이상 높은 것으로 조사된 것. 또 은근한 불로 함수를 끓이는 동안 불순물과 중금속 침전물을 분리하여 쓴맛과 떫은맛을 제거해 뒷맛이 깔끔한 저염도(83~85%)의 약알칼리성(PH 7.5~8) 칼슘소금이다.


”사용자
자염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빛. 자염의 탁월한 성분.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설득과 성원. 여러 장면들이 그의 머리 속을 지나갔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사업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모았다.

“그래서 다시 모였어요. 자염 사업 여부에 대해 모인 사람들과 논의했죠. 다 함께 하지는 못했고, 몇 사람만 남았어요. 그들과 함께 ‘한번 해보자’라며 의기투합 한 거죠. 당장 가진 돈이 없으니 3천만원의 빚을 모았어요.”


자염은 무엇보다 갯벌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자염 생산에 최적의 갯벌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사라진 지 오래다. 새만금에서 알 수 있듯이 개발 논리가 자연의 힘을 압도했다. 다행히 이번 자염 복원에서 발견한 곳이 있었다. 그러나 땅 주인은 마을 사람이 아니었다. 수소문 끝에 땅주인이 서울에 사는 어떤 교수란 사실을 알았다.

절실하게 무언가를 원하면 이를 악용하는 사람이 꼭 있다. 혹시 그런 사람이 아닐까 겁이 덜컥 들었지만 진정성은 통하리란 믿음을 가지고 서울로 상경을 했다. 정 이사는 그 교수에게 자염 논문을 보여주고 자염 복원 사업을 위해 사용하겠다며 그를 설득했다. 다행히 그 교수는 그러한 우려를 현실로 만들지는 않았다. 자염 복원에 사용하라며 땅을 판 것이다.

시제품 출시까지 16개월

사실 자염 복원이 말처럼 쉽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자염 생산에 적당한 갯벌을 찾기 위해서 2년 가까이 발품을 팔며 태안 지역 갯벌을 샅샅이 뒤졌다. 그저 맨눈으로 확인해서 좋은 갯벌인지는 알 수 없었고, 몇 달에 걸쳐 그 갯벌을 지켜봐야 했다. 조금 때 바다를 찾아 어디까지 뻘이 마르는 지 확인하기 위해 대나무를 꽃아 놓고 몇 달 후 다시 찾곤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갯벌을 다녔지만 마땅한 곳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반가운 전화를 한 통 받았다.

“2001년 설날 아침에 전화가 왔어요. 갯벌을 찾은 것 같다는 전화였어요. 자염 복원 모임에 관심을 가졌던 중학교 선생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아이들한테 소금에 대해 말을 했나 봐요. 그랬더니 어떤 애가 손을 들고, ‘우리 할아버지도 그거 했는데, 저쪽 해변에 소금밭이 남아있어요’라고 했대요. 그렇게 해서 운 좋게 갯벌을 찾게 된 거죠.”

설날 아침에 그 마을로 찾아갔다. 정 이사의 눈앞에 펼쳐진 갯벌은 매우 광활했다. 하지만 그때가 마침 사리 때여서, 바닷물이 어디까지 들어오는지 분간이 힘들었다. 그때 바닷가를 지나가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노인을 붙잡고, 옛날에 혹시 여기서 자염을 하던 곳이냐고 물었다. 그 노인은 무덤덤하게 “여기가 통자락이 있던 자리”라고 말했다. 정이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좋은 갯벌이 좋은 소금을 만드는 것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아무도 자염을 직접 만들어 본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우선 마을 노인들에게 자염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부푼 꿈을 안고 전통 방식으로 소금을 만든 첫 날, 아무리 끓여봐도 소금은 보이지 않았다. 전통 방식으로 소금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몇 달에 걸친 노력 끝에 자염 제조를 복원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생산성이 문제였다. 자염을 사업화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산성은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천원을 투자하면 10원을 버는 형국이 될 정도로 생산성은 형편 없었다. 전라남도에서 자염을 만들어봤다는 사람을 영입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날은 갯벌 흙을 끓이는 가마솥이 폭발하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이제는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닐지, 그의 고민은 커져갔다.

”사용자
사업을 시작한 지 6개월이 흘렀다. 어느새 그해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한일 월드컵이 시작됐다. 물론 월드컵을 볼 새도 없었다. 시간이 나면 공장에 들어가 연구를 계속했다. 사업성을 갖춘 자염을 만들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그러나 결과는 매번 마찬가지였다. ‘이만하면 됐겠지? 할 만큼 했어’ 함께 사업을 시작한 동료들의 입에서도 사업을 이쯤에서 접자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가? 결국 이렇게 마무리해야 되는 건가?’ 그 역시 같은 고민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다. 무언가 돌파구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첫 시연 때 확인했던 사람들의 뜨거웠던 반응을 생각하니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란 마음 속 외침이 들려왔다. 그렇게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는 중에 서울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그들은 한 방송국의 제작팀이었는데, 자신들이 비용을 댈 테니 자염을 제대로 만들어보잔 제안을 했다.

정 이사는 다시 방법을 바꿔 여러 개의 샘플을 제작했다. 그리고 이것을 한 대학 연구소에 성분 의뢰를 했다. 정성이 통했는지, 그 중에서 다행히 2개의 샘플이 적합 판정을 받았다. 생산량을 높일 수 있는 제조 노하우도 이때 확보했다. 2002년 9월에 첫 시제품을 생산하게 됐다. 2001년 5월에 첫 시연을 했으니, 꼬박 16개월이 걸린 것이다.

그동안의 시행착오도 이제는 추억에 불과하다. 예로부터 자염 생산을 위한 갯벌 흙은 갯벌에서 말렸다. 하지만 좀더 쉽게 많은 소금을 뽑아내기 위해 갯벌 흙을 퍼다가 시내로 가져와 고추 말리듯이 길가에 말린 적이 있었다. 바짝 말린 그 흙을 바닷물에 거른 뒤 정수시켜서 끓여보았는데, 소금은 생각 이상으로 많이 생산되었고 외관상으로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성분이 문제였다. 중금속 수치가 기준치 이상으로 많이 나온 것이다.

갯벌 흙을 갯벌에서 말려야 되는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됐다. 갯벌 흙을 말리면 광분해가 되는데, 이때 미네랄은 올라오고, 중금속은 아래로 빠져 내려간다. 결국 자연의 흐름을 거슬러서는 좋은 소금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자연 그대로를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 낮은 생산량과 힘든 작업 조건도 자연이 내린 축복을 얻기 위해 충분히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다. 갯벌에서 말린 갯벌 흙에 바닷물을 부어 10시간 동안 3톤 정도를 끓여야 6~80㎏ 정도의 자염을 얻을 수 있다. 그마저도 그냥 끓인다고 되는 것은 아니고, 간장 달이듯 끓여야 한다. 계속 거품을 걷어내며 끓여야 한다.

5천 명의 단골을 얻다

초보 사업가들이 저지르는 실수 중에 하나가 단가 산정이다. 사업 초기 장사가 잘 돼서 신바람이 나지만 정작 정산을 해보면 손에 쥐는 돈이 없는 경험을 한번쯤은 하기 마련이다. 가격을 정할 때 무엇 한두개를 빼먹었기 때문이다. 태안자염 역시 이러한 실수를 했다.

“나름 꼼꼼하게 가격을 정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우리가 일한 인건비를 뺐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사실 어떻게 가격을 정해야 할지 너무 모르기도 했어요. 가격을 높게 책정하면 팔리지 않을까 겁이 나기도 했죠. 제조업 마진이 보통 4~50% 된다고 하는데, 저희는 이에 크게 못 미쳐요. 그나마 물때가 안 맞아서 생산량이 적으면 마진이 더 내려가죠.”

그래도 소비자가 느끼는 체감 가격은 낮지 않다. 비교 대상이 천일염이기 때문이다. 천일염이 소매가로 20㎏에 1만5천원 가량 하는데 비해, 태안자염은 1㎏에 1만5천원이다.

판매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대리점을 두기에는 생산량이 너무 적어서 대리점이 이 제품 만으로 운영될 수는 없는 구조다. 자염의 연간 생산량은 20톤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는 대리점을 통한 간접 판매가 아니라 인터넷을 통한 직접 판매로 눈을 돌렸다. 그는 홈페이지를 구축하고 인터넷 쇼핑을 하기로 했다. 방송과 언론에 몇 번 소개가 된 터라 승부를 걸어보자는 것이었다. 다행히 자염이 입소문이 나면서 판매량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언론의 취재 요청도 계속 이어졌다.

주말마다 태안 인근 관광지로 직접 판매에 나서기도 했다. 관광 버스에 올라가서 팔기도 했다. 사실 큰 기대는 안 했지만, 맛을 본 사람들의 재주문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태안 지역 기업체나 관공서에서도 명절 선물로 태안자염을 구매하면서 큰 힘이 됐다.

이제는 고객수가 대략 5천명 정도된다. 물론 소금의 특성상 잦은 구매는 힘들다. 1년에 한번 사는 정도이다. 하지만 사업 시작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적자 구조도 면했다. 사실 희망소기업 중 흑자를 내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매출도 크지는 않지만 꾸준히 늘고 있다. 아직까지 반품이나 클레임이 없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제품에 대한 신뢰가 그 이유이다.


”사용자
“천일염도 좋은 소금이에요”

“소금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저한테 어떤 소금이 좋은 소금인지 물어볼 때가 많아요. 자염 얘기도 하지만 저는 그럴 때 천일염이 좋다고 얘기 해요. 물론 소금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려주고, 선택은 본인이 하라고 하죠. 좋은 천일염을 고르는 법 정도는 알려주고 있어요.”

정 이사는 자염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좋은 조건에서 원칙을 지켜 생산한 천일염도 충분히 좋은 소금이라는 것이다. 천일염도 자염처럼 좋은 자연 환경을 가져야 한다. 광활한 갯벌 근처에 있는 염전에서 생산된 천일염이 특히 좋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천일염 중에서도 간수가 5년 이상 빠진 게 좋다. 매장에 가면 인위적으로 간수를 뺀 것이 대부분인데, 흔치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간수가 빠진 게 좋다. 생산 계절로 본다면, 봄에 만든 소금이 좋다. 낮과 밤의 일교차가 없을 때 소금이 만들어졌을 때 좋은 소금이 만들어지는데, 봄이 그러하다. 송화 가루가 필 때 소금이 좋다는 말이 있는데, 송화 가루가 필 때면 낮과 밤의 일교차가 없기 때문이다. 통상 4~9월 사이에 생산된 소금이 좋다.

천일염을 고를 때는 유리 같이 투명한 것은 피해야 하는데, 맛이 쓰기 때문이다. 외관상으로 눈같이 하얀 소금이 좋은 소금이다. 천일염을 꽉 쥐었다가 폈을 때 손에 소금이 붙어 있으면, 안 좋은 소금이다. 간수가 다 안 빠졌기 때문이다. 간수를 구성하는 성분이 칼륨과 마그네슘인데, 염화나트륨에 비해 이것의 비율이 너무 많으면 소금 맛이 떨어진다.

천일염이 좋다고 말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염에 대한 자부심은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자염은 성분도 성분이지만 음식의 맛을 살리는 그 능력이 탁월하다. 정 이사는 그래서 자염 맛을 느끼고 싶다면, 우선 콩나물 국에 자염을 넣어보라고 얘기한다. 콩나물 국은 소금 맛에 의존하는 경향이 큰데, 나쁜 소금을 넣으면 맛이 없고 쓰기 때문이다. 그 쓴맛을 없애기 위해 화학 조미료로 쓴맛을 지우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음식 맛을 죽이는 것이다.

“콩나물 국 끓일 때 맛 없으면 콩나물 탓 하지 마세요. 소금 잘못이에요. 가끔 어르신들이 오셔서 의심의 눈초리로 꼬치꼬치 물으실 때가 있는데, 그때는 ‘오늘 밤 댁에 가셔서 콩나물 국을 끓여보세요’라고 말해요. 맛이 없으면, 착불로 반송하라는 말도 덧붙이죠. 남자들은 잘 모르지만, 주부들은 대번에 알아요. 그렇게 지난 7년 동안 설명을 하면서 팔았는데, 아직 한번도 반품이 온 적은 없어요. 오히려 미각이 뛰어난 분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아요.”

마지막 자염 갯벌

대량생산을 통해 더 많은 소비자에게 자염을 알리고 싶지만, 갯벌의 면적이 해마다 줄고 있기 때문에 요원한 일이다. 대량생산을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연의 힘으로 만드는 자염의 특성상 대량생산은 불가능하다. 갯벌 흙을 끓이는 것이야 시설을 지어놓고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고의 성분을 지닌 자염을 생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그는 적은 양이라도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욕심을 버리고 소금에만 집중을 하니 소비자들의 신뢰도 자연스레 이어졌다. 지난 2007년, 태안 기름유출 피해가 있었을 때도 고객들은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이 사재기를 하기도 하고, 피해 여부를 묻는 전화가 오기도 했지만 큰 어려움 없이 그 시기를 지나갔다. 태안자염 소금밭은 미리 오일 펜스를 쳐놓아 기름이 유입되지 않았다.


”사용자
자염이란 게 원래 태안의 것만은 아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경기도나 전라도 갯벌에서 모두 자염을 생산했었다. 하지만 자염의 명맥이 끊긴 지난 50년간 그 좋은 갯벌이 다 사라졌다. 현재로서는 아직 태안자염이 생산되는 그 갯벌 외에 마땅한 곳이 발견되지 않았다.

“새로운 갯벌을 찾아서 홍성 지역도 다녀보고 많은 곳을 다녀봤어요. 하지만 갯벌이 없더라고요. 조금 기간 동안 7~8일 넘게 갯벌이 드러나는 곳이 없어요. 거의 대부분의 곳이 간척 사업을 해서 변한 거에요. 우리 태안자염이 소문 나면서 다른 지역에서 많이 찾아왔는데, 그분들이 그래요. ‘이렇게 희한한 갯벌이 아직도 남아있나요?’ 그러면서 깜짝 놀랍디다.”


시인 정낙추, 그 남자의 손

정 이사는 시인이기도 하다. 태안에서 태어나 농사밖에 몰랐던 그는 지난 1989년부터 지방문학 동인지 ‘흙빛문학’에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13년이 흐른 2002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하게 된다. 2006년에는 그의 첫번째 시집 ‘그 남자의 손’을 출간하게 되며, 그해와 이듬해 문화관광부 우수 도서로 선정된다.

그의 시는 문학평론가 유성호 교수(한국교원대)의 말처럼 우리 시대 농민시의 전형을 보여주면서도 희망과 절망의 이중주(二重奏) 역할을 한다.

유교수는 “정낙추의 시편들은 이러한 ‘농민시’의 보편적 속성을 한편에서 견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근원적인 대지적 친화나 생명에 대한 경외 등 농민 특유의 긍정적 시심(詩心)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그의 시편들을 통해 우리 농촌 현실에 대한 가없는 사랑의 분노, 그리고 희망과 절망의 이중주를 듣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대표적인 시, 그 남자의 손을 보면 그가 전달하는 희망과 절망의 이중주가 들려온다. 무뚝뚝한 그의 표정만큼이나 그의 투박한 손이 만들어내는 자염의 짠 내는 덤으로 느낄 수 있다.

그 男子의 손, 정낙추

그 남자의 손은
무쇠솥 뚜껑보다 크고 투박합니다
소나무 옹이보다 억센 손마디로
여린 싹도 키우고 고운 꽃도 피우게 하는
요술쟁이 손
그 손바닥엔 딱딱한 못이 박혀 있습니다
살아 백년 죽어 천년이 지나도
풀리지 않을 단단한 못 속에는
서러운 세월을 안으로 삭힌
땀과 눈물이 고여 있는걸 아시는지요

그 남자의 손에는
잘 썩은 두엄 냄새와 구수한 곡식 냄새가 납니다
비누로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그 냄새는 그 남자가 지쳐 쓰러질 때마다
일으켜 세우는 신비한 힘입니다
그 손은 욕심 없는 정직한 손입니다
이 나라 만백성을 먹여 살리고도
생색 한 번 안 낸 위대한 손입니다

그 손이 요즘 들어
희고 부드러운 손 앞에서 주눅 들어
자꾸 주머니 속으로 숨습니다
아내의 가슴을 보듬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거친
그 남자의 손이 가엾어 죽겠습니다


”사용자글쓴이 노준형은 전공이 뭐냐고 물어볼 때가 제일 난감하다. 전자공학과 글쓰기의 상관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회로설계(Circuit Design)와 글쓰기의 원리는 동일하다고 종종 주장한다.
몇 차례 취재기자를 꿈꾸며 <코리아포커스>, <아시아경제 브이에스뉴스> 등에서 짧게나마 기자생활도 했으나 불가항력적 상황에 밀려 지금은 PR 대행사 커뮤니케이션플러스에서 일하고 있다.
 ‘노대리의 직딩일기’와 같은 자전적 에세이를 쓰고 싶지만, 잦은 야근에 치여 하루하루 꿈을 내일로 미 루고 있다. 희망제작소의 소중한 부름을 받게 된 것에 감사하며 사는 소박한 직장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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