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사람을 향하는 따뜻한 마음,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잃지 않은 이는 영원한 청년입니다. 직장과 가정을 위해 헌신했던 인생전반전, 이제는 더 큰 나눔과 사랑을 시작할 때입니다. 풍부한 삶의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활발한 사회공헌활동을 펼치고 있는 영원한 청년, <2009 해피시니어 어워즈> 수상자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수상자 소개영상 –
희망씨앗상 – NPO창업부문
– 한석규 (희망도레미 대표)
어떤 은행원 부인이 한자교습소를 열겠다며 소액대출(마이크로크레딧)을 신청했습니다. 남편이 은행 퇴직 후 사업에 손을 댔다 재산을 날렸다며 그간의 고생을 울음으로 터뜨리더군요. 어떤 아주머니는 방앗간을 하다 안 돼 액세서리 가게를 하려고 대부를 신청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장사가 될 것 같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대출을 거부해야만 했어요.
희망제작소 교육 수료 후 시작한 소액대출 심사업무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건 이렇게 일일이 사람들에게 전화로 통보해 주는 일이었어요. 은행에 있을 때는 가부만 결제하면 되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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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으론 비로소 제가 진짜 은행원으로서 사회와 소통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친김에 함께 교육을 받았던 대기업CEO, 금융회사 임원 등 전문직 퇴직자들 12명과 의기투합해, ‘희망도레미’ 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여러 재단들과 MOU를 체결해 직접 현장실사도 다니고, 소액대출심사, 컨설팅을 계속하고 있어요.
일감이 밀려들어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죠. 지금껏 이렇게 행복하게 일해 본 적이 없습니다. 세상이 새롭게 열리는 기분이랄까요.
희망을 대출해 드립니다
사실 IMF 구제금융 사태 당시 사표를 내고 나서, 평생 몸 담았던 은행이 합병돼서 간판이 없어지는 걸 보면서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 같아 한동안 참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은행원을 천직으로 여기며 살았거든요. 월요일이면 ‘이번 주에는 어떤 새로운 고객을 만나게 될까’ 하는 기대감으로 출근길이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을 정도니까요.
퇴직 후 골프도 하고 등산도 실컷 다녔죠. 출근 걱정 없이 술도 마시고, 손자 보는 재미에도 푹 빠져보고. 후배들이 주선해줘서 2년 정도는 어느 상장기업 사외이사를 맡기도 했어요. 하지만 허탈감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어느 날 책상에 앉아 지난날을 돌이켜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일 자서전을 쓴다면 내가 무엇을 했다고 내세울 수 있을까?’ 은행 서류에 묻혀 산 32년 이라는 시간 밖에 없었습니다. 직장과 가족을 제외하고 진정 남을 생각하며 살았던 적이 없었어요.
남은 인생은 정말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때마침 지인의 소개로 희망제작소 ‘해피시니어’ 교육을 받게 되었고, 원하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무척 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희망도레미 일을 하는 틈틈이, 일주일에 두 번은 ‘필리핀 공동체’를 찾아 상담, 번역도 하고, 청소 같은 허드렛일도 합니다. 다시 매일매일 들뜬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해요. ‘오늘은 또 어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게 될까’하는 기대감으로 말이죠.
희망씨앗상 – NPO창업부문
– 박영규 (달팽이건설 상임이사)
저는 인생을 세 단계로 구분해 살려고 합니다. 제1의 인생은 25세까지입니다. 학교에서 교육받고 군대에서 훈련받는 등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나 제도에 의해 강요된 삶이죠. 제2의 인생은 대졸 공채사원으로 입사해서 레미콘 회사 사장을 그만둔 50세까지 ‘눈칫밥과 스트레스의 25년’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에서의 경쟁, 남편과 아버지 또는 자식으로서의 역할, 선배와 상사의 위치로만 매여 있었습니다.
달팽이건설 입사는 ‘제3의 인생’의 시작입니다. 나이 50이 가까워오면서 지난 인생을 반추해 보았어요. ‘언제가 가장 행복한 때였는가?’ 하고요. 얻은 결론이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활동을 할 때’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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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가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50세부터 75세까지 25년은 사회에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원래는 은퇴 후 홈스테이 NPO를 만들 계획이었어요. 홈스테이 가정으로 32명의 아동을 위탁 관리해 보았기 때문이죠. 입양아뿐 아니라 해외교포 2세나 3세 아이들도 홈스테이를 하여 모국을 익히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익을 10%이상 남기지 않는 회사
그런데 지인을 통해 건설협동공동체 형태의 회사인 달팽이건설에서 전문경영인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모든 인력이 완비됐으나 회사운영 노하우를 가진 전문경영인이 없어 흑자도산을 맞곤 했다더라고요. 흔쾌히 상임이사직을 수락하고 회사에 참여했어요. 주식회사 등록, 정관확정, 창립총회를 일사천리로 처리했더니 사원들이 다들 놀라더군요.
‘달팽이건설’은 5가지 경영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돈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과 가장 적게 받는 사람의 임금 차이가 ‘2배 반’을 넘지 않을 것. 둘째, 연말에 이익이 나면 34%만 주주들끼리 나눠 갖고 66%는 좋은 일에 기부할 것. 셋째, 형편이 딱한 사람이 “우리 집 좀 고쳐 달라”고 사정하면 눈 딱 감고 공사비를 깎아줄 것. 넷째, 기술자들 일당은 무슨 일이 있어도 1주일 안에 지불할 것. 다섯째, 이익을 10% 이상 남기지 않을 것.
어떻게 안 망할까 싶지요? 이래 뵈도 올해만 벌써 6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는걸요. 주로 복지관이나 비영리단체 신축·증축·개보수 공사가 많은데, 40만원짜리 개인주택 화장실 공사부터 3억 1500만원짜리 다가구주택 신축공사까지 다양해요. 서울시가 펼치는 공익사업에 참여해, ‘단돈 3700만원’을 받고 다 쓰러져가는 다가구주택 50가구를 고쳐준 적도 있어요.
앞으로도 변함없이 양질의 집을 짓거나 개축할 겁니다. 새 건축주에게 우리가 이미 시공한 건물의 주인과 맞대면을 하게 해 사전평가를 받을 거예요. 서민주택을 짓고 친환경적으로 공사를 해도 얼마든지 이익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새삶개척상 – NPO활동부문>
– 윤종태 (아힘나평화학교 교사)
반갑습니다. 혹시 ‘반갑습니다’ 부른 가수 아세요? 금강산에 가면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노래인데 그 가수가 여기 남한에 내려와 정착하고 있어요. 이 곳 안성에 있는 ‘하나원’을 거쳐 남한에 내려와 있습니다.
우리 ‘아힘나 평화학교’에도 북에서 내려와 하나원을 거쳐 온 아이들이 많아요. 제2의 고향인 하나원이 있는 안성시 삼죽면에서 이웃 어른들을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삼아 지내고 있지요.
제가 나고 자란 곳도 바로 이 곳 삼죽면입니다. 동네 구석구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아이들에게 ‘삼죽마을 역사알기’ 수업도 하고, 동네어른들과 함께 마을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마을잔치도 풍성하게 열었습니다. 제가 오기 전에는 주민들이 접근을 싫어해 진행을 못 하고 있었다는데, 지금은 주민들이 김치도 주시고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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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도 손수 만든 빈대떡을 들고 이웃 어르신을 찾아다닌 일, 풍산개 마을을 찾아가 풍산개와 뛰놀던 일, 매년 종중에서 지내는 조상님 제사에 참석해 어르신들과 고향의 향수를 느낀 일, 다민족음식축제를 하며 음식을 나눈 일은 아마도 저 북녘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겠지요.
친구들이 반가워하고 내가 한 조그만 일로 아이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얼른 식당에 가서 점심부터 먹읍시다. 여기서 밥을 먹어야 진짜예요. 아이들이 밥을 얼마나 맛있게 하는지 몰라.
동남아 대신 고향마을로 떠나라
아힘나는 2005년에 개원했는데, 일이 바빠 관공서나 지역민들에게 홍보를 하고 협력을 구할 여력이 없었어요. 제가 경기도청과 교통연수원에서 근무했고, 삼죽면이 고향이라 알림이 역할을 자원한 거지요. 공직생활 중에 안면을 익혀둔 시장, 문화원장, 면장, 이장 등 지역인사들을 찾아 적극 홍보한 덕에 후원하겠다는 분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제도권 밖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퇴직자들이 할 일이 참 많아요. 은퇴 후에 혼자만 잘 살려고 동남아로 떠나면 안 됩니다. 해외로 나가는 한 사람의 건강한 노인이 열 사람의 노인을 감당할 수 있어요. 노인이 노인 상담을 하고, 농어촌 일손 돕기 등 여러 방법을 통해 얼마든지 사회에 공헌할 수 있죠. 나누며 함께 잘 살아야 행복하고 나중에 치매에 안 걸려요.
<행복나눔상 – 공공봉사 부문>
– 김대철 (아이정보기술 대표이사)
한창 사업을 키워나갈 때 부동산도 있고 꽤 잘 살았는데도 ‘현금으로 10억 정도 생기면 그 다음부터 봉사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00년에 사업이 부도가 난 거예요. 다행히도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빠르게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빚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는데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전에 돈 있었을 때나 지금 없을 때나 사는 것은 별로 다를 게 없다. 지금 안하면 못하겠다. 또 10억 모아서 봉사하려면 언제 하겠는가?’ 라는 생각이요.
[##_1C|1175353243.jpg|width=”430″ height=”300″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_##]그때 우연히 ‘아름다운 가게’ 자원활동가 광고를 봤어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과 영업하는 것은 계속 하는 일이기에 할 수 있겠다 싶어 자원했습니다. 한번 해보니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회사직원들과 함께 나눔행사도 열었지요.
활동을 계속하다보니 2007년부터는 아름다운가게 양재매장의 자원활동가 대표(점장)직함도 얻게 되었네요. 매장에서 활동하는 40여 명 자원활동가의 형, 오빠, 친구, 동생 역할을 잘 해달라는 격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연히 기회가 닿아 요즘은 강남구 자원봉사센터 등에서 중고등학생들과 예비활동가들을 대상으로 자원봉사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고요.
“지금 아니면 못해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몰라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어요. 봉사활동은 적극 광고해야 합니다. 저 역시 평소 친분이 있는 CEO들에게 권유해서 아름다운가게 행사도 함께 하고, CCTV장비를 납품하는 회사에게는 ‘장비를 기부해라, 내가 설치하고 관리하겠다’고 적극 권유하고 다녔죠.
그 결과 작년부터 한 달에 한 군데씩, 제품을 기증받아 저희 직원들이 여러 비영리단체에 설치하고 유지, 보수하고 있어요. 하나씩 퍼지면서 광고효과도 있고 보람도 생겨 그 회사도 너무 좋아하고 저희 직원들도 뿌듯해합니다. 지금은 다른 회사도 관심을 보이며 참여의사를 밝히고 있어요. ‘아! 이런 식의 봉사도 가능하구나’ 하며 퍼져 나가는 거죠.
자원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저력이요? 하하. 사실, 저는 한 가지 일하면서 열 가지를 받거든요. 사장이 이런 일 해도 회사 잘 돌아가지요. 몸과 마음 건강하지요. 가족 화목하고, 좋은 사람들 만나지요, 이거 다 받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도 바로 지금 시작하세요. 내일 하려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정리_해피시니어 이재흥 연구원(weirdo@makehope.org)
사진_강홍수, 이재흥
영상_김희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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