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춘, 사회적경제를 말하다

우리 시대 ‘여럿이 함께 하는 경제’를 일구는 ‘청년’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또 어떤 고민, 어떤 혜안을 갖고 있을까. 입사 6개월 차, 20대, 사단법인 씨즈 매니저 김해인과 입사 6년 차,  30대, 희망제작소 사회적경제센터 선임연구원 이재흥, 두 사람이 협동조합, 공유경제기업, 중간지원기관에서 각각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 가고 있는 청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함께 해 주신 분
조금득 (토닥토닥협동조합 이사장, 서울시 청년명예부시장), 한상엽 (위즈돔 대표이사, 넥스터스 전 대표)
손범규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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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흥 (희망제작소 사회적경제센터 선임연구원 / 이하 ‘재흥’) : 오랜만에 뵙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동안 ‘세대공감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여러 시니어들을 만나 다양한 고민을 나누고 조언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이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 가 아니었나 싶어요. 이전 세대 선배들은 대학에 입학해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을 시작하면서 사회 문제, 사회운동에 눈을 뜨고, 그 연장선에서 시민사회와 사회적경제에 함께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던 것 같아요. 대표님들의 첫 시작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_1C|1197605518.jpg|width=”400″ height=”536″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좌측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조금득(토닥토닥협동조합 이사장, 서울시 청년명예부회장) 손범규(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연구원) 손범규(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연구원) 한상엽(위즈돔 대표이사, 넥스터스 전 대표)_##]
손범규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연구원 / 이하 ‘범규’) : ‘레이디 퍼스트’할까요? (웃음)

조금득 (토닥토닥협동조합 이사장, 서울시 청년명예부시장 / 이하 ‘금득’) : 그럴게요. (웃음) 20대 때 제 별명이 ‘알바천국’이었어요. 정말 다양한 알바와 비정규직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죠. 언론 인터뷰에서 많이 이야기했는데,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꿈은 연극배우, 예체능 쪽이었어요. 그래서 대학입시에도 같은 전공으로 도전을 했는데, 교수님들이 인재를 못 알아보셔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때마침 IMF 구제금융위기가 터져, 취업한파가 불어왔고요. 결국 최종적으로 선택했던 것이 나름 취업률이 높았던 전문대 호텔관광과였어요. 그당시만해도 ‘취업률 100%’ 이렇게 대대적으로 홍보를 해서,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 취업했던 거죠. 그런데 졸업해서 막상 취업시장에 나가보니 정말 어린 나이에 굉장히 당황스러운 환경이었어요. 그 취업률 100%라는 것이 작은 여관 ‘카운터’ 보는 일자리까지 포함하는 거였더라구요 어렵게 취직한 첫 직장에서도 어린 여자 실무자를 홀대하기 일쑤이고, 도무지 비전이 보이질 않았죠. 

그래서 이 길이 아니다 싶어 박차고 나와, 정말 안해 본 아르바이트,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예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일은 임상실험에 참여하는 거였어요. 한 번은 등에 선크림 바르고, 피부 반응을 살피는 실험에 참가했는데, 6개월간 굉장히 오래할 수 있어서 좋았던 기억이 나요. 포스터 붙이는 일, 전단지 돌리는 알바도 해 보고. 간헐적인 일들을 계속 끊임없이 했죠.

그렇게 서른 살을 맞게 되었는데, 갑자기 두려웠어요. 안정적인 일도 없고 막상 찾으려 해도 점점 나이 제한에 걸리기 시작했거든요. 일자리를 한참 찾다가 핸드폰 조립하는 구인광고를 봤는데, 25세 이하 여성만 뽑더라고요. 삼성공장에서도 23세 이하 여성만 뽑고요. 전문성을 갖고 있는 직종이 아니면 일을 찾기 정말 어려웠어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나이 제한 없음. 고수익 보장’ 이라는 문구를 내건 일을 발견한 거예요.  “이거다! 이 일 꼭잡아서 열심히 돈 모아야겠다.”는 각오로 찾아 갔죠. 그런데 막상 사무실에 도착해 보니 허름한 곳에 덩그러니 테이블만 하나 있는 거예요. 가니까 아저씨가 차에 일단 타라 하시고요. 알고 보니 일종의 아웃소싱, 인력파견 업체 같은 곳이었어요. 지금도 그때 광경이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마치 그 풍경이 초등학교 입학식 때 부모들이 아이를 보내고, ‘잘 다녀와~’ 하는 뭐 그런 분위기랄까 그랬던 것 같아요. 본청업체에 도착하니 뒤에 있는 파견업체 부장들이 ‘조금만 버텨’ 하는 눈빛으로 손을 흔들고 있고, 그 앞에서 저랑 비슷한 또래 언니들은 다들 뻘줌해 하며 서 있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일을 시작했는데, 또 때마침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했어요. 작업용 방진복을 입고 아침 8시부터 점심 12시까지 그냥 하염없이 앉아 있는 날의 연속이었죠. 다른 언니들은 하나둘 그만 두는데, 저만 경험이 없어 한 달인가를 그냥 그렇게 버텼던 것 같아요. 그렇게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비오는 날 아침 삼디다스에 양말 신고 통근버스 타고 출근하는 길이었어요. 도착하자마자 작업반장이 “집에 가라”고 했어요. 그날은 자재가 안 들어와서, 숙련공들이 할 수 있는 일감만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럼 돌아가는 통근버스는 어떻게 타는지 물었더니,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이렇게 이야기 하던 게 아직도 기억나요. “통근버스는 출퇴근하는 사람만 탈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양말이 다 젖도록 비를 맞고 집에 돌아왔어요. 그렇게 비자발적인 퇴직을 하게 됐습니다. 갑자기 그동안 사회생활하면서 받았던 모멸감과 서글픔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정말 펑펑 울었어요. 옆에서 그런 제 모습을 보시던 엄마가 힐난을 하시면서, 그러게 ‘애초에 대학을 가지 그랬냐’고 다그치시는 말씀이 무척 아팠어요. 그때 ‘내가 무척 위로받고 싶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 무척 힘들었죠. 학교다닐 때만 해도 친구들이 저를 정말 부러워했거든요. 명확한 꿈이 있다고… 그런데 있잖아요. 그렇게 간절한 일을 못하게 되니까, 그 꿈이 불숙불쑥 마음에 심장병처럼 튀어나오는 거예요. 가슴이 너무 아플 정도로. “아, 꿈이 오히려 나의 삶에 장애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그런 경험이 있어서, 요즘 청년들에게 격하게 공감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그러다 그 시기에 김영경이나 조성주 등을 만나게 되었죠. 지금도 생각나는데, 왜 ‘국가대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설득하고 의기투합해 뭉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 비슷한 꿈을 가진 조성주 씨가 일본사례를 보고 ‘청년유니온’같은 조직을 한 번 한국에서 해보자는 생각을 했대요. 그래서 여러 사람을 수소문해서 찾아다녔는데 대부분 다 거절당하고, 그러다 수원에 있는 ‘알바 천국’ 하는 청년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던 겁니다. 조성주 씨가 “한 번 해보자”고 제안을 건네는데 정말 눈물이 났어요. 이렇게 비슷한 이야기를 갖고 있는 청년들이 모여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구나 싶었죠.

그 이후, <청년유니온> 사무국장을 하면서 많은 청년들을 만나고, 공동체를 통해 고독과 괴로움을 조금씩 해소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청년들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보다 비정규직으로서 취업과 퇴직을 반복하는 거잖아요. 저희가 살펴보니, 이 문제에 대해 이슈파이팅은 있는데, 생활안정망 마련이 너무 안 되어 있는 거예요. 2011년에 <함께일하는재단>과 함께 
‘불안정노동청년사회안전망연구’를 진행했어요. 청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엄청난 돈이 아니라 한 달에 몇 십 만원 정도 되는 ‘생활부채’를 갚을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청년연대은행 (토닥토닥협동조합)>을 만들어보자는 데 의기투합을 하게 됐죠. 처음에는 <청년유니온> 내의 상호부조조직으로 출발했다가, 독자적인 조직으로 가야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 와중에 2012년 초기설립멤버 세 명이 각각 자기 영역과 비전을 고민하다 새로운 길을 가게 되면서, 영경은 청년정치와 정책수립하는 일을 맡았고, 조성주 씨는 서울시 노동전문관으로 가게 되었고. 제가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물론 서로 간에 역할을 나눠 맡은 것도 있지만, 제가 이 일을 맡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어요. 바로 2011년 최고은 작가의 죽음입니다. 당시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주변사람들은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하면 되지. 참 바보 같다.’ 라는 반응이 많았는데요, 사실 최고은 작가는 병을 앓고 있었고, 유서에서도 ‘쌀과 김치를 달라.’고 남겼던 것처럼, 나름 사회에 손을 내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아사하신 거죠. 청년연대은행 친구들은 이런 최고은 작가의 상황을 이해하고 아파했습니다. 그런데 극작가 조합원 한 친구가 있는데, 이 사건 즈음 1주일간 잠적을 하는 일이 생겼어요. 너무너무 두려웠죠.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나 싶어,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고 다녔어요. 그랬는데 다행히 얼마만에 이 친구가 페이스북 그룹에 나타나 ‘라면이 필요하다.’ 라는 글을 올렸어요. 라면이 필요하다…청년유니온 조합원들이 우수수 댓글을 달기 시작했습니다. 위로하고 격려하고 공감하고, 돕겠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했어요. 그때 누군가 ‘이 사람을 후원 해야하지 않나’ 하는 의견을 냈거든요? 그런데 바로 그 밑에 ‘이 친구가 그걸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달리더니, 다들 이 말에 공감을 하는 거예요. 그때 정말 감동 받았어요 ‘아, 청년들이 서로 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구나. 이렇게 서로 공감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재흥 : 참 가슴 아프면서도 공감가는 이야기네요. 주변의 친구들 가운데도 여전히 그런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이 많거든요. 그런데 아직 사회적금융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지 않고, 특히 법인격 관련된 부분을 포함해 제도 등도 잘 가다듬어 있지 않잖아요. 쉽지 않으셨겠어요.

금득 : 맞아요. 그런데 막상 은행을 하려고 하니 너무 겁이 났어요. 주변에서도 잘못하면 쇠고랑 찬다고 하시고 (웃음) 그래서 전문가 그룹을 모으기 시작했죠.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에듀머니>와 같은 기관도 그때 처음 만났는데, 한 달인가를 자문회의를 해도 도저히  답이 안나오더라고요. 쉽지 않은 길이고, 현재상황에서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냉정한 제언도 해 주셨고요. 그런데 그 와중에 <청년유니온>때부터 지켜본, 한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소> 연구원께서 “<청년유니온>도 세계 최초였다. 선례나 롤모델을 찾지 말고 <청년연대은행>만의 길을 만들어보자” 고 제안을 주셨고, 감사하게도 자문그룹 역시 자발적으로 해산을 해주셨어요. ‘그래, 늘 그렇듯 청년들에게 답이 있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그래서 욕구조사 포커스그룹인터뷰(FGI) 설문조사를 했고, 제도금융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청년들이 비빌언덕 공동체가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 금융과 공동체를 묶어내는 그림을 새로 그리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절망스러웠던 20,30대 시절이, 지금의 나를 이끈 것 같아요. 물론 부작용도 있어요. ‘청년’ 이란 단어만 나오면 완전 감정이입이 돼요. 최근에도 한 지자체에서 청년공동체 조성사업을 추진했는데 주민반발로 무산된 일이 있었는데, 일부 주민들의 반대의견 이유를 들어보니 너무 화가 났어요. ‘청년공동체가 조성되면, 유흥시설이 많아진다. 경범죄가 많아지고 치안이 불안해지는 동시에, 집값도 떨어진다.’가 논리였는데 정말 말이 안 되는 거죠. 

청년들의 경우, 이런 외부의 비판이나 부조리에 맞닥뜨리면, 흔히 자기 스스로 자책모드에 빠지면서 자괴감을 느끼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저희 청년연대은행 슬로건이 원래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자!” 였거든요? 이 사건 이후에 아주 강한 슬로건을 새로 만들었어요. “어디 가서 쳐맞고 다니지 말아라.” 청년들이 자기 생각과 감정을 사회적으로 솔직하게 발언할 수 있고, 아픈 상처를 치유하며 서로 돕고 협력하는 가운데 성장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저희의 꿈입니다.

재흥 : 말씀 잘 들었습니다. 한상엽 대표님은 어떠셨나요? 우리나라에 사회적기업이란 개념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때부터 여기에 관심을 가지셨고, 요즈음 가장 ‘핫’한 분야인 공유경제관련 기업을 창업까지 하셨잖아요.

한상엽 (위즈돔 대표이사, 넥스터스 전 대표 / 이하 ‘상엽’) : 저는 어렸을 때부터 돈 없는 설움을 많이 느껴서, 금득샘과 조금 다르게 ‘내가 시스템의 정점에 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돈을 많이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해보니,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당시 잘 나가는 사업가들을 보니, 모두 속칭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왔더라고요. 그래서 일단은 이 세 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그다음 창업을 직접해 보는 것으로 일찌감치 목표를 잡았습니다.

제가 속칭 ‘이해찬 1세대 (1998년 이해찬 교육부장관 시절 중3 학생들을 일컫는 말)’ 였는데, 그 시기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워낙 혼란이 많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느끼면서, 이 체제 내에서 꼭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던 것 같아요. 훌륭한 사업가가 되어서 족적을 남겨야겠다는 결심을 했죠. 열심히 공부하고, 재수까지 한 끝에 운 좋게 원하는 학과 중 하나에 입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을 다니면서 내가 속고 살았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첫째, 경영학과는 창업가를 기르는 곳이 아니라 관리자를 길러내는 곳이었어요.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웃음) 그래서 일단은 사업을 해보기로 마음먹었어요.

그 와중에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 제가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만난 교수님이 바로 <하자센터(청소년직업체험학교)>를 만드신 조한혜정 교수님이셨어요. 그래서 덕분에 <하자센터>를 자주 출입하면서 굉장히 다양한 삶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됐던 것 같아요. 저와는 달리 체제에서 벗어난 친구들, 자기만의 길을 선언한 친구들을 보면서 정말 제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대학교 2학년에 창업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바로 사회적기업이었던 것 같아요. 홍대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작가들의 그림을 우리가 파는 사업을 했거든요. 당시 2005년에 처음 생긴 게 바로 ‘웹툰, 블로그 스킨’ 이었는데요, 우리가 작가의 작품들을 스킨으로 디자인 제작해서 포털 등에 파는 일을 해, 북디자인까지 확장하는 사업을 했어요.

처음 1년간은 정말 좋은 경험을 했어요. 사실 운 좋게 외부 장학재단 도움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고, 생활비도 지원받게 돼서, 돈 걱정하지 않고 몰입해서 사업만 하니RK 성과가 좋았거든요. 당시에는 돈 벌기가 참 쉽다는 생각도 조금 했을 정도예요. 그런데 1년쯤 지나니,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있지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처음 마음에 품었던 목표들, 돈을 많이 벌자, 창업하자라는 목표를 어느 정도 이뤄내 놓고 달려가고 있었거든요.

바로 그때 ‘사회적기업’을 알게 됐습니다. 친구 소개로 ‘사회적기업’ 관련 책을 받았는데, 읽고 나서야 깨달았죠. 내가 얼마나 비겁한 놈인지를.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가 뿐만 아니라, 돈을 어떻게 버는지 역시 굉장히 중요한 주제인데 이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던 거죠.

두 번째는 이 책을 읽고 그동안 품었던 모든 고민이 다 해결됐습니다. 내가 이 사업을 왜 하는지를 명확히 알게 되었어요. 사실 어렸을 때 돈 많이 벌면 장학재단을 만들어 나 같은  사람이 없게, 가난하다고 해서 공부를 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제 목표였는데요, 사회적기업이란 것이 ‘목적과 결과’뿐만 아니라, 사업을 하는 과정으로도 세상을 바꾸는 것이고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떤 상을 비로소 잡게 된 것 같아요.

그때가 2006년으로 당시 한국에서 네이버에 ‘사회적기업’ 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결과가 하나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반면에 구글 같은 곳에 검색하면 해외 사이트들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정보와 문서들이 검색돼서 나올 때였거든요. 한편으로는 답답하면서, 한편으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어요. 아무도 없다는 것은 그만큼 기회의 땅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사실 같은 이유로 그동안 제가 한 일이 늘 주목을 받았어요.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웹툰을 서비스하는 곳이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고, 사회적기업 동아리 <넥스터스>를 처음 만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사업체인 <위즈돔>도 많은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고 구상은 합니다.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는 플랫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요. 하지만 직접 실천하는 곳은 없었기 때문에 저희의 과감한 결정과 선택이 늘 주목을 받았던 겁니다.

처음 이런 고민을 시작할 때, 제가 한 일은 우선 주위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난 친구들을 분야별로 다 모으는 것이었어요. 삼고초려, 오고초려까지 하고, 나중에는 협박까지 해서라도  꼭 데리고 왔습니다. 심지어 처음에 회사를 창업했을 당시 공동대표했던 분은 지금 스님이 되어 계시는데, 운 좋게 그분이 정말 주변 사람들을 다 잘 이끌어주셔서 회사가 가능했던 것 같아요. <위즈돔>도 사실 돈을 먼저 투자받고 사업을 시작했거든요. 믿고 투자해 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할 따름이죠. 돈 걱정 없이 시작하는 소셜벤쳐, 정말 드문 게 현실이잖아요.

김해인(씨즈 매니저 / 이하 ‘해인’) : 인복이 많다니 부럽네요. 전생에 정말 나라를 구하셨나봐요. 그런데 창업을 하고 사업이 어느 정도 본 궤도에 오른 후, 갑자기 대기업에 입사하셨잖아요?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상엽 : 군대시절 ROTC로 전방에 장교로 복무했는데 그 당시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입대 전 <넥스터스> 동아리도 굉장히 잘 됐고, 동아리에서 펴낸 사회적기업 안내서 ‘세상을 바꾼 대안기업가’라는 책도 잘 팔렸는데요. 2년간 장교로 있는 동안 모든 네트워크가 끊어진 거에예. <넥스터스>도 사실상 해체되었고. 첫 창업기업은 사정상 정리를 하게 되었고요. 그렇다 보니 전역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죠. 지금 아니면 외국을 못 나갈 것 같은데, 나는 아직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서 솔직히 두렵기도 했고요.

나는 정말 리더일까. 왜 설립한 곳들이 다 실패할까. 그럼 조직에 들어가서 시스템을 배워보자. 그래서 첫 직장으로 대기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시스템을 알아보자는 생각이 가장 컸어요.

기대했던 대로 대기업에서 정말 많이 배웠어요. 대기업 사람들 정말 똑똑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대기업에서 깨달은 게 역설적으로 ‘시스템이 없다.’ 는 것이었어요.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생산계 아무개가 그 부분은 잘 알아. 가서 물어봐. 이리 오라고 해봐.” 하는  식으로 연륜이 있는 내부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거죠.

‘아, 내가 중심을 못 잡았구나, 그리고 조직 내부에 사람을 못 키웠구나.’ 하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습니다. 화두에 대한 답을 찾고 나니 대기업에서 일을 할 이유가 더 이상 없는 거예요. 물론 돈은 많이 받았지만, 정말 재미가 없었거든요. 제가 조직을 선택하는 세 가지 기준이 있는데 첫 번째가 성장곡선이 있는가, 두 번째 조직의 비전과 일치하는가, 세 번째 사람들과 일하는 게 재미있는가 입니다. 그런데 대기업에서는 첫 번째, 두 번째가 없다 보니, 많이 버는 돈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미련없이 그만 두고 나왔습니다.

재흥 : 기업 창업가라 아무래도 히스토리가 특별하신 것 같아요. 범규 씨는 어떠셨나요? 국내에서 가장 큰 협동조합 소속 중간지원기관(intermediary)이자, 희망제작소와 같은 싱크탱크에서 일하고 계시잖아요.

손범규 : 앞에 분들이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셔서 저는 짧게 하겠습니다. 제가 3살 때……

금득, 상엽 : 무려  27년 전이네요. (웃음)

범규 : 제가 3살 때 복부 밑으로 전신 화상을 입었어요. 그래서 제 어릴 적 꿈은 ‘슈바이쳐와 같이 어려운 사람을 살리는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가고 싶다고 해서,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는가는 완전 다른 문제잖아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재수까지 했는데, 국내에 갈 수 있는 의대가 없었어요. 최선을 다했기에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는 있었어요.    
 
그래서 수능점수를 맞춰서 대학을 갔습니다. 그동안 의대만을 보고 달려왔는데 좌절되고 나니까 하고 싶은 게 없더라고요. 한동안 방황을 했죠. 그러다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향하는 꿈이 ‘의사’라는 명사가 아니라, ‘어려운 사람을 살리는’ 이라는 형용사구나‘ 라고요. 사람을 살리는 직업은 하종강 선생님과 같은 노동운동가도 있으시고, 조영래 선생님처럼 인권변호사도 있는 거죠. 그래서 인권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뒤늦게 사법고시에 뛰어들었어요. 그런데 사법고시는 역시나 더 어렵더라고요. 사법고시는 딱 세 번만 본다고 마음 먹고  도전했고, 역시나 낙방했어요. 그래도 3번째 낙방하던 해에 바로 공인노무사 시험을 봤고  운 좋게 1차는 합격했어요. 제 젊은시절은 늘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괴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교 1~2학년 때, 방황하고 노느라 전공수업을 많이 듣지 못해서 1학년 과목들을 늦게 서야 수강을 했어요. 법철학, 모의법정 등등이었죠. 그런데 그 당시 용산참사, 한진중공업과  같은 사건이 발생한 거예요. 이를 주제로 형사소송법 강의에서 모의법정을 하는데, 이 현상이 일어나게 된 계기, 철거민들이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사회구조적 원인 등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어요.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측을 자진해서 맡아 정말 열심히 변론 준비를 했어요. 동기들은 다 취업 준비할 때 마치 민변 변호사 빙의된 것처럼 열심히 변론 준비를 했어요. 그 과정에서 법전이 아닌, 실재 사회의 대해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특히 언론-재벌-경찰-검찰-용역깡패에 이르는 단단한 사회구조에 대해서 눈을 떴죠. 
  
그리고 한진중공업 사건은 ‘시장경제의 이해’라는 경영학과 교양 수업에서 발제를 맡았어요. 마침 교수님이 뉴라이트계 학자라서 친구랑 함께 교수님의 일방적인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굉장히 열심히 변론을 했어요. 함께 수업을 듣던 경영학과 친구들의 질문과 주장에도 반박했어요. 그렇게 잘 방어를 했다 싶었는데, 수업이 마무리될 때쯤 어느 한 친구가 냉소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당신 말이 다 맞는데, 그래서 대안이 뭔데요?” 라고요. 당시엔 굉장히 자존심도 상하고 화가 나더라고요. ‘그냥 옳고 그름의 문제인데, 왜 내가 대안까지 만들어야 하는데?’ 하는 반발감도 들고, ‘사회 문제를 법으로만 풀 수는 없구나. 그런 구조가 있구나.’ 라는 생각에 좌절했었습니다.

이런 고민이 깊어질 무렵, 법철학 강의의 과제로 대안적 노동에 대한 과제조사를 했습니다. 그때 운명적으로 만난 책이 ‘프라우트가 온다’라는 책이었어요.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고민했던 모든 것들이 풀리는 거예요. ‘이런 방법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고민이 한창이던 중,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성공회대 협동조합경영대학원’ 모집공고를 보게 됐고, 공인노무사 2차 시험을 6개월 앞두고 뭔가에 홀린 듯이 무턱대고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반대하시는 어머니께는 “여기 가면 농협에 쉽게 취직할 수 있습니다.”고 사기를 쳤고요. 어머니는 요즘 들어 부쩍 ‘왜 아직 농협으로 안 가느냐.’ 고 재촉해  물으시곤 해요. 

대학원에 가서 정말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웠어요. 법대에서 당위성에 대해 배웠다면, 경영학과에서는 효율성, 효과성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어요. 서로 다른 두 가지 학문을 배우다 보니 당위적인 것을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는데 경영학이 유용한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제가 대학원에 입학할 당시는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기 무려 3년  전이었거든요, 일반인들은 물론 심지어 사회적기업에 관심 있는 친구들도 협동조합에 대해  색안경 끼거나 구질구질한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아마 협동조합은 평생 비주류이겠구나, 원래 정의는 비틀거리면 간다고 하니(웃음), 꿋꿋이 이 길을 평생 걸어야지’하는 수세적이지만 선비 같은 다짐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요즘 들어 제 20대를 괴롭게 했던 ‘하고 싶은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괴리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이제 보니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암기력이 아니었던 것뿐이더라고요. 그러니 최선을 다해도 일정한 암기력을 요하는 시험 같은 건 잘 안 맞았던 거죠. 이런 결론을 내리고 나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간단해지더라고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거죠. 전 암기력은 안 되지만 창의력은 좀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경영학을 더 재밌게 할 수 있었고, 지금은 ‘어려운 사람을 살리는 협동조합 연구자이자 활동가’로 꿈을 바꾸어 살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건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체득된다는 것도 알았어요.

이런 측면도 있었던 거 같아요. 그동안 전 화상이라는 상처에 대한 피해의식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나를 희생해서 남을 도와야겠다고 생각이 앞서다 보니, 나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게다가 마음과 생활이 충분히 안정되지 못해서 무엇인가에 매진하는 것도 내 노력에 못 미쳤던 것 같고요. 뭔가 꼬인 구석이 있었고, 미래가 아닌 과거에 갇혀 살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종교를 통해 내 상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자연스레 내 자신도 충분히 사랑할 이유와 방법을 알았어요. 또한 협동조합에서 일하면서 내 생활도 풍족하진 않지만 비교적 안정되고 나니, 남을 더 잘 도울 수 있겠더라고요. 말 그대로 ‘시혜가 아닌, 호혜와 연대’ 속에서 활동을 하고 있죠.

( 2부에서 계속됩니다.)

글 사진_ 이재흥 (사회적경제센터 선임연구원 weirdo@makehope.org)
              김해인 (사단법인 씨즈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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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경제 세대공감 인터뷰
(1)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일’로 해보자” _  (주)한국커퓨터재생센터 구자덕 대표
(2) “언니도 그랬어, 언니가 들어줄게”  _ 행복중심 생협연합회 김연순 전 회장
(3) 지역 속으로, 지역 속에서 _ 희망동작네트워크 유호근 국장
(4) 청춘, 사회적경제를 말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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